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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시황제의 업적과 추녀 과부 청씨, 음탕한 어머니와 노애 불륜

   

어메이징스토리에서 중국천하를 최초로 통일하고 천하를 호령했던 정복군주 진시황제와 그 아들의 숨겨진 비사를 공개해서, 많은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

 

중국의 분열된 전국시대를 종결시키고 중국천하를 통일했던 진시황제는 중국최초의 통일군주로서, 중국인들의 존경을 받는 대표적인 정복군주인데, 진시황제는 자신의 무덤을 호위할 6천점의 병마용과 갱도를 만들고, 중국의 도량형을 통일하고 거대한 만리장성을 축조하는 등 여러가지 큰 업적을 쌓았던 군주로도 유명하다.

 

기원전 221년경 조나라, 한나라, 위나라, 초나라, 제나라, 연나라등 중국의 전국7웅이라고 하는 주변의 강대국들을 모두 군사력으로 제압하고, 중국역사상 최초로 통일왕국을 건설하는 위대한 업적을 쌓았던 군주가 바로 진시황제다.

 

 

진시황제는 중국을 통일한 것 외에도, 도량형을 통일하고 거대한 병마용갱도를 짓고, 만리장성을 축조하고 중국대륙의 남북을 잇는 거대한 수로를 건설하는 등 대규모 토목사업을 일으킨 것으로도 유명하다.

 

정복군주일 뿐만아니라, 건설군주로도 유명한 진시황제는 특히 거대한 크기의 화려한 아방궁을 건설한 것으로도 유명한데, 동서로 700m, 남북으로 120m에 이르는 왠만한 궁궐보다도 몇배나 더 큰 2층궁전 아방궁을 축조했는데, 중국인 70만명을 동원해서 아방궁을 지었다고 하니, 아방궁은 1만명 사람을 수용할 수 있다고 하니, 그 화려하고도 엄청난 규모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진시황이 왜 이토록 거창하고 화려한 아방궁을 지었을까? 진시황제는 중국을 통일한 후, 전국에 있는 수많은 미녀들을 모집해서, 미인들과 향략생활을 즐겼다고 하는데, 아방궁은 바로 젊은 미녀들과 향락을 즐기기 위한 그의 은밀한 내실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중국천하를 호령했던 절대군주 진시황제도 두려운 것이 하나 있었다고 한다. 점점 나이를 먹으면서 서서히 늙어갈 수밖에 없는 신체적 노화현상과 죽음에 대한 공포였다.

 

 

천하를 모두 다 가졌지만, 노화현상과 죽음만큼은 어떻게 할 수 없었던 진시황제는 영원히 불로장생을 할 수 있는 불로초를 구해올 수 있는 사람들을 모집했다고 한다.

 

진시황제는 자신이 갖고있는 최고의 권력과 부귀영화, 그리고 최고의 미인들과의 향략을 영원히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자신의 늙어가는 노화현상을 막고 젊음을 계속 유지시키기를 원했던 것이다.

 

이러한 진시황제의 야망을 간파했던 서복이라는 사람은 진시황제에게 봉래산에 가서, 불로장생할 수 있는 불로초를 구해오겠다고 자원했다고 한다.

서복의 감언이설에 넘어갔던 진시황제는 진짜 볼로초를 얻을 기대에 잔뜩 부풀어올라서, 서복에게 수많은 금은보화를 주고 어린시녀 3,000명까지 하사하면서, 그에게 불로초를 구해오도록 지시했다고 한다.

 

 

그런데 불로초를 구해오겠다고 동쪽으로 떠났던 서복은 그후 영원히 돌아오지 않았다고 한다. 서복은 불로장생을 갈망했던 진시황제를 미혹해서, 수많은 금은보화와 미녀들만 챙기고는 다른 나라로 도주해버렸던 것이다.

 

그런데 전래되어오는 소문에는 서복이 불로초를 구해오겠다고 찾아갔던 장소가 제주도 서귀포시라는 전승설화가 존재한다. 바로 서귀포서복이라는 말이 변해서 만들어진 말이라고 한다.

 

그후에도 많은 사람들이 진시황제를 찾아와서, 불로초를 구해오겠다고 진시황제를 미혹해서, 수많은 금은보화만을 챙기고 달아나버리는 사기행각이 계속 벌어졌다고 한다.

그후 진시황제는 다시는 사기행각이 일어나지 못하도록, 선불제를 후불제로 바꿔버렸으며, 약속했던 불로초를 구해오지 못하는 사람들을 모두 목을 베어버렸다고 한다.

 

 

진시황제는 중국을 통일한 후, 자신의 권력을 더욱 강화시키기 위해서, 자신의 정책에 반대하는 대신들이나 호족들을 가차없이 죽이는 등 피의 숙청작업을 계속 벌였는데, 자신을 업신여긴다는 이유를 들어서, 커다란 구덩이를 파서 학자 460명을 생매장시켜서 몰살시켰을 정도였다.

 

이러한 분서갱유는 진시황제의 포악하고 잔인한 성정을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무소불위의 절대권력을 휘둘렀던 진시황제도 한가지 콤플렉스가 있었다고 한다. 바로 진시황의 친어머니 조태후의 문란한 생활때문이었다고 한다.

진시황제의 어머니인 조태후는 음탕하고도 문란한 생활을 즐겼다고 하는데, 어머니 조태후로 인해서, 한때 진시황제는 커다란 위기에 몰리기도 했다고 한다.

 

 

진시황제의 아버지는 진나라의 30대왕인 광양왕이었으며, 진시황제의 어머니는 광양왕의 총애를 받던 기생 조희였다고 한다. 진시황 아버지 광양왕 시절부터 신하였던 승상 여불위는 자신의 첩실이었던 조희를 광양왕에게 헌납했다고 한다.

 

여불위의 애첩에서 졸지에 광양왕의 비가 된 조희는 광양왕에게 시집을 가자 마자, 진시황을 낳았던 것이며, 그러니까 진시황제의 진짜아버지는 광양왕이 아니라, 여불위였던 것이다.

 

조희가 여불위의 아들을 임신한 상태에서 광양왕의 눈에 띄여서, 광양왕의 비로 첩지를 받은 것인데, 광양왕에게 시집을 간 아후 아들 진시황을 낳았던 것이므로, 진시황은 당연히 광양왕의 뒤를 이어 왕이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이같은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된 진시황제는 자기혈통에 대한 심한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광양왕이 젊은 나이에 돌연 사망하게 되는데, 원래 뜨거운 욕정을 가슴에 품고있었던 조희(조태후)’는 광양왕이 죽자, 자신의 끓어오르는 욕정을 주체할 수가 없어서, 가짜 환관이었던 노애를 정부를 삼고는, 뜨거운 정사를 벌였다고 한다.

 

사마천이 쓴 사기의 기록에도 시황제가 장성한 후에도 어머니 조태후는 음탕함을 그치지 않았으며, 몰래 음경이 큰 노애를 자신의 정부로 삼아서 상간을 일삼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사마천이 지은 사서 사기의 기록을 살펴보면, ‘시황제가 장성한 이후에도 그 모후인 조태후는 음탕한 행동을 그치지 않았는데, 음경이 매우 큰 노애를 정부를 만들어서 수시로 상간을 일삼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진시황제가 장성한 이후에도 어머니 조태후는 자신의 정부인 노애와 음탕한 관계를 계속 벌여나갔는데, 이를 눈치채고 있었던 진시황제는 그냥 눈감아주었다고 한다.

 

 

그런데 문제는 전혀 엉뚱한 곳에서 싹트고 있었다. 진시황의 어머니 조태후는 궁궐밖에다 몰래 사가를 짓고는, 그곳에서 자신의 정부인 노애와 노골적인 정분관계를 계속 벌어나갔으며, 그리고 둘 사이에 두명의 아들까지 태어났다고 한다.

 

이미 오랜전부터 권력의 맛을 알고있었던 진시황제의 어머니 조태후는 정부 조애와 짜고서, 진시황제를 몰아내고 새로 태어난 아들을 황제로 만들 쿠테타를 모의했다고 한다.

 

친어머니가 배다른 어린 아들을 황제로 만들기 위해서, 자신의 큰아들을 제거하려는 음모를 꾸몄다니, 정말 어이가 없고 충격과 경악을 금지못할 사건이 아닐 수가 없다.

 

진시황제도 무척 잔인한 군주이지만, 그의 친어머니인 조태후도 아들 못지않게 엄청나게 잔인하고 포악한 여인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어떻게 어머니가 권력욕에 눈이 어두워 배다른 작은 아들을 황제로 세울 생각으로 큰아들을 죽일 생각을 할 수가 있겠는가?

 

 

그런데 이와같은 조태후와 노애의 음모는 사전에 모두 발각났으며, 두사람은 모두 체포되었다고 한다.

 

자신의 친어머니와 그 정부의 이같은 쿠테타음모에 충격과 분노감에 사로잡힌 진시황제는 배다른 두동생들은 즉시 참살하였고, 어머니의 정부 노애는 능지처참으로 죽였으며, 자신의 친어머니는 차마 죽일 수가 없어서, 먼곳으로 유배를 보냈다고 한다.

 

학자 460명을 갱도안에 몰아넣고 생매장시킬 정도로 포악했던 진시황제는 친어머니와의 천륜만은 저버릴 수 없었던가 보다. 진시황제는 몇 년이 지난 후에, 어머니 조태후를 다시 태후자리에 복귀시켜주었다고 한다.

   

이렇게 자신의 친어머니가 정부와 놀아나다가 자신마저 위태롭게 만든 사건이 발생한 후에, 진시황제는 어머니에 대한 콤플렉스가 더욱 심해졌다고 한다. 어머니에 대한 심한 콤플렉스에 시달렸던 진시황제는 그 이후 절대로 황후를 들이지 않았다고 한다.

 

아버지의 황후였던 어머니 조태후의 음탕한 행위에 환멸을 느껴왔던 진시황제는 아예 황후를 세우지 않고, 황후자리를 영원히 궐석으로 남겨놓았다고 한다. 

진시황제는 원래 엄청난 향략생활을 즐겼던 군주로 유명하다. 자신이 지은 궁궐보다 더 큰 아방궁에서, 중국전역에서 뽑은 1만명의 미인들을 모아놓고서 매일같이 향락의 밤을 보냈던 것으로 유명하다.

 

 

그런 진시황제였지만, 자신의 후궁중에서 간혹 황후자리를 넘보는 후궁들은 가차없이 처단해버렸다고 한다.

아무리 천하 절색의 미모를 지닌 후궁이라고 하더라도, 비어있는 황후자리를 탐내는 기색이 보이면 곧바로 처단했다고 한다.

 

그것은 어려서부터 어머니의 음탕한 생활을 보고자라면서 엄청난 마음의 상처를 받았던 진시황제였기에, 어머니 때문에 받은 심한 상처와 콤플렉스로 인해서, 황후라는 말 자체에 치를 떨었으며, 그래서 영원히 황후를 두지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그렇게도 잔인하고 포악했던 진시황제에게도 순정남이라고 불릴 만한 순수한 마음이 한구석에 자리하고 있어서 놀라움을 주고 있다. 포악한 진시황제를 순정남으로 변하게 만드는 한 여인이 있었다고 한다.

 

 

그녀는 이라고 하는 과부였는데, 남편을 일찍 여읜 그녀는 시부모님을 지극정성으로 봉양하고, 자식들을 훌륭하게 키워냈던 효부이자 열녀로 소문난 여인이었다고 한다.

 

과부 청씨는 어린나이에 시집을 와서 남편이 일찍 죽었지만, 끝까지 시부모님을 정성껏 봉양했으며, 자식들도 올바르게 교육시키는 등 끝까지 시댁식구에게 의리와 절개를 지켜왔던 소문난 열녀였다고 한다.

 

그녀의 소문을 들은 진시황제는 과부 청씨를 종종 궁궐로 초대해서, 그녀와 차를 마시면서 담소를 나누는 것을 즐겼다고 한다.

신하들에게는 그렇게 엄했던 진시황제는 과부 청씨 앞에서는 순한 양처럼 변했다고 하며, 항상 부드러운 미소와 상냥한 말투로 그녀를 극진하게 대해주었다고 한다.

 

그런데 과부 청씨는 전혀 미인이 아니었으며, 오히려 외모는 추녀라고 할만한 못생겼다고 한다.

그런데도 진시황제는 자주 과부 청씨를 궁궐로 불러서 자신이 직접 차를 끓여주면서 극진히 대접해주었다고 한다.

 

 

복잡한 국사에 머리가 아플 때나, 골치아픈 일이 발생해서 큰 스트레스를 받게되면, 진시황제는 과부 청씨를 궁궐로 초대해서, 담소를 나누면서 자신의 모든 시름을 잊을 수 있었다고 한다.

 

과부 청씨는 진시황제에게는 편안한 안식처와도 같았으며, 평생을 의리를 지키면서 수절하면서 살아온 그녀를 진시황제는 극진하게 대접해주었다고 한다.

 

진시황제 스스로는 아방궁을 짓고 수많은 후궁들과 방탕한 생활을 즐겼으면서도, 평생 절개를 지켜온 과부 청씨를 극진히 대접해주었고 하니, 정말 아이러니가 아닐 수가 없다.

과부 청씨가 보여준 굳은 절개와 극진한 효성심이 포악하기 그지없었던 진시황제의 잔인한 마음을 훈훈하게 녹여주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어쩌면 자신의 친어머니 조태후의 음탕함에 환멸을 느낀 나머지, 그 정반대되는 절개심이 강한 여성 청씨에게서 어머니에게서 받지 못한 모성애와 위안감을 느꼈기 때문일 수도 있으리라!

진시황제는 어머니에게 받은 환멸과 상처를 절개가 굳은 과부 청씨에게서 위안받고 보상받고자하는 심리였을 것으로 느껴진다.

 

진시황본기의 기록을 살펴보면, ‘청씨는 과부였지만 남들로부터 엄신여김을 당하지 않았으며, 가업을 잘 지키고 자녀들을 훌륭하게 키워서 진시황제로부터 칭찬을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진시황제가 음탕한 어머니로 인한 심한 콤플렉스를 가졌기 때문에, 더욱 더 과부 청씨의 올바른 행동을 보면서 위안을 받고자 했던 것 같다.

 

 

중국을 통일하고 천하를 호령했던 진시황제였지만, 이처럼 어머니에 대한 심한 콤플렉스에 시달렸으며, 평생 황후를 두지 않고 외로움을 가슴 한켠에 담아주면서 살아갔던 것이다.

 

진시황제는 자신이 어렵게 획득했던 절대권력을 영원히 누리기 위해서, 불로장생의 삶을 추구했지만, 어쩔 수 없는 운명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전국을 순행하는 순행길에서 쓸쓸하게 병사하고 만다.

 

그런데 진시황제의 사후에, 그의 유언장이 간특한 환관 초고의 계략에 의해서, 되바뀌어버리게 된다. 

진시황제가 환관에게 장자인 부소를 자신의 후계자로 삼으라는 유언장을 남겼지만, 환관 초고가 중간에서 유언장을 바꿔치기 해서, 26번째 아들인 호해가 다음 황제로 등극하도록 모략을 꾸몄다고 한다.

 

 

환관 초고는 진시황제의 장자가 아닌 26번째 아들이자 막내인 호해를 진시황제의 후계자로 임명했다는 가짜 유언장을 만들어서, 호해가 다음 황제로 등극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진시황제의 뒤를 이어 황제로 등극한 호해는 천하의 난봉꾼이자 어리석기 그지없는 멍청한 군주였다고 한다.

초고의 간계로 황제에 오른 호해는 정사는 돌보지 않고, 화려한 아방궁에 눌러앉아, 수많은 미녀들과 향락생활에 빠져서, 방탕한 생활을 일삼았다고 한다.

 

  진시황의 병마용  갱도

 

호해의 방탕과 무능함으로 인해서, 국고가 탕진되고 백성들의 원성이 더욱 높아지자, 다시 중국의 여러지역에서 반란이 일어났으며, 진시황제가 통일했던 진나라는 다시 분열되었고, 초나라의 공격을 받은 진나라는 기원전 207년도에 멸망하고 만다.

 

 

 

 

 

 

 

Posted by 프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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