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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최고의 싸움꾼, 시라소니와 김두한의 싸움대결, 신마적과 이상대

   

시라소니와 신마적의 대결

   

경성 종로에서 큰 오야붕으로 군림했었던 신마적은 1937년도 여름에는 만주 봉천지역에서 오야붕으로 군림하고 있었다.

 

1936년도만 해도, 분명 종로의 우미관 뒷골목에서 큰 오야붕으로 행세깨나 했던 신마적이 어찌된 일인지, 37년도에는 만주 봉천의 유조구거리에서 자신의 주먹조직을 보유하게 된 것일까?

 

36년도에 종로 우미관지역에서 활동하던 신마적은 1937년도 초반에 소리소문도 없이 종로에서 완전 사라졌다.

 

신마적은 김두한과의 싸움에서 완패했고, 거기다가 턱뼈와 갈비뼈 4대가 부러지는 중상을 당하고 병원에 입원까지 했었다.

자신보다 나이 9살이 어린 김두한에게 처절하게 패했던 신마적은 부상을 당한 육체적 상처보다 더 큰 자존심의 상처를 입었으며, 이듬해인 37년 초에 병원에서 퇴원하자마자, 해학기, 곰치등 동생 7명을 데리고 도망치듯 만주로 떠나갔던 것이다.

 

 

그런데 신마적은 만주 봉천에서 일본 유학시절부터 친분이 있던 조선인을 다시 만나게되었고, 그 조선인은 봉천지역의 번화가에서 청니라는 큰 음식점을 경영하고 있었다.

 

7명의 동생들을 데리고 만주로 온 신마적은 그 조선인의 음식점에서 거주하다가, 어느날 만주지역을 호령하는 엄청난 거목을 만나게 된다.

 

1937년도경 만주에서 가장 큰 주먹조직을 거느리면서 만주를 호령했던 대단한 주먹이 있었다고 한다. 일설에는 만주에서 악명높았던 마적단들조차도 그를 보면 피해간다고 할 정도로 그는 만주지역에서는 대단히 무섭고도 두려운 존재였다고 한다.

 

그는 만주 봉천의 암흑가를 주름잡았던 봉천두 이상대라는 인물이다. 이상대는 원래 평양사람인데, 조선여자를 욕보이던 일본인들을 두들겨패고, 체포령이 내려져 만주로 피신해갔던 인물이다.

 

집도 절도 없이 만주 봉천지역으로 굴러들어간 이상대는 오직 주먹 하나로 만주의 봉천지역의 뒷골목을 평정하고, 자신의 거대한 주먹왕국을 만들었던 것이다.

만주에 거주하던 중국깡패 르망과 일본에서 만주로 진출한 일본 야쿠자들을 모조리 물리치고, 만주 봉천지역에 거대한 자신만의 주먹조직을 구축했던 것이다.

 

만주에서 가장 큰 주먹집단을 구축한 그를 사람들은 봉천두(봉천두)’라는 별칭으로 불렀는데, 그의 실제 이름은 이상대라고 한다.

 

 

한번은 만주지역에서 악명 높은 마적패들이 말을 타고 봉천에 나타나서, 도적질과 살육을 저지르고 다녔는데,

일본경찰들도 무섭다고 도망간던 중대규모의 마적집단은 100여명의 대원들이 모두 총기로 무장하고 있었는데, 이 마적패를 상대로 전투를 벌여서, 그들을 모두 쫒아냈던 대단한 전공을 올린 것도 바로 이상대의 주먹조직이었다.

 

봉천의 이상대의 주먹조직은 모두 합치면 500명까지 된다고 하며, 총을 가진자들도 상당수 있다고 한다. 그만큼 이상대의 주먹조직은 당시 만주 봉천에서 가장 강하고 거대한 주먹조직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신마적과 친분이 있던 조선인이 신마적에게 이상대를 소개해주었으며, 이상대는 신마적의 인물 됨됨이를 간파하고는 그에게 물자와 자금을 지원해주어서 주먹조직을 만들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고 한다.

 

만주 봉천에서 가장 거대한 주먹조직의 오야붕이었던 이상대의 물신양면의 도움을 받은 신마적은, 봉천의 유흥가거리인 유조구지역을 물려받아서, 자신만의 별도의 주먹조직을 만들 수 있었다고 한다.

 

김두한에게 패해서 만주로 떠나갔던 신마적은, 이상대의 도움으로 다시 재기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으며, 37년도 여름에는 봉천 유조구지역의 오야붕으로 부상하여, 자신의 휘하에 많은 주먹들을 거느리게 되었다.

 

돈이 잘되는 유흥가가 밀접한 유조구지역을 장악한 신마적은 계속해서 자신의 주먹조직을 크게 확장해나갔다고 하며, 몇 개월도 되지않아 자신의 주먹조적을 100명에 가까운 조직원들을 거느릴 수 있는 큰조직으로 키워나갔다고 한다.

 

신마적의 주먹조직은 외형상으로는 봉천의 최고오야붕인 이상대의 하부조직 역할을 하고 있었지만, 주먹조직이 더욱 커지고 확장되자, 이상대 마저도 어쩌지 못할 정도로 막강한 파워를 지닌 거대조직으로 발전하였다고 한다.

 

이당시 만주의 주먹조직들의 중간 간부급들을 대부분 총기를 소지하고 있었다고 한다. 왜냐하면 만주지역에 종종 출몰하는 마적패들에 대비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신마적 주먹조직의 중간보스급들은 모두 소총이나 권총등을 소지하고 있었고, 일반 조직원들 10명에 3명 정도는 권총 또는 소총을 소지하고 다녔다고 한다.

 

이렇게 경성에서 김두한에게 패해 쫒기듯이 만주로 떠나갔던 신마적은 봉천의 번화가 지역에서 자신만의 거대한 주먹조직을 만들어서 군림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신마적이 관리하는 유조구거리에 느닷없이 시라소니가 나타났다고 한다.

 

  시라소니 이성순 사진

 

신의주에 있을 때 칼잡이 김장손를 쓰러뜨렸고, 평안도 최고의 주먹인 박두성을 꺾은 후 북한지역의 최고의 싸움꾼으로 등극했던 시라소니가,

갑자기 만주 봉천바닥에 나타났는데, 1937년 여름 시라소니가 봉천에 나타난 것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고 한다.

 

시라소니의 고향친구가 봉천의 유조구거리에서 광목장사를 하고 있었는데, 어느날 느닷없이 들이닥친 건달패거리들이 세금을 낼 것을 요구하고 마구 두들겨팼다는 것이다.

 

이제 막 봉천지역의 시장통에서 간신히 조그마한 점포를 얻어서 광목장사를 시작한 그 친구는 그지역 건달패들에게 세금을 낼 것을 강요받았다고 한다.

그렇지만 지금 당장 돈이 없었던 그 고향친구가 시간여유를 달라고 부탁하자, 건달패 8명이 쳐들어와서, 다짜고짜 주먹부터 휘두르고 돌아갔다고 한다.

 

아닌 밤중의 홍두깨라고 난생 처음보는 건달패들이 처음보는 상인에게 돈부터 내라고 요구하면서, 주먹질하고 행패를 부렸던 것이다. 건달패에게 호되게 얻어맞아 부상까지 입었던 그 광목점상인은, 즉시 자신의 친구를 불러서, 억울한 사연을 토로했다고 한다.

 

그 친구가 바로 천하의 박두성을 깨버리고, 함경도를 재패했던 천재싸움꾼 시라소니였던 것이다.

자신의 고향친구가 아무 죄도 없이 건달패들에게 초주검이 되도록 두들겨맞은 사연을 들은 시라소니의 눈에서 불이 번쩍 났으며, 피가 거꾸로 솟는 전율과 분노를 느꼈다.

 

어떻게든 가족을 먹여살리려고 이역만리 먼 만주땅에 와서 어렵게 구한 쌈지돈을 투자해서, 겨우 점포 하나 차리고 장사를 시작한 친구를 같은 조선사람이 서로 돕지는 못할망정 처음 보자마자,

두들겨패고 돈부터 뜯어가려고 하다니, 시라소니 이성순은 이같은 상황을 도무지 그냥 넘기질 못하는 위인이다.

 

한번도 불의를 위해서 주먹을 쓴 적이 없으며, 약자를 구하기 위해서는 목숨을 걸고 적의 소굴로 뛰어드는 것이 시라소니의 스타일이다. 시라소니는 고향친구의 광목점 뒷방에서 대기하면서, 그 건달패들이 다시 찾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스라손

 

그러자 얼마 후에 며칠전에 왔던 그 건달패거리가 또다시 친구의 점포로 찾아왔다. 그들은 모두 8명이며, 그중에 중간보스쯤으로 보이는 한 뚱뚱한 사내가 가게로 들어오면서, 친구에게 세금부터 내라고 일갈을 퍼부었다.

 

그때 방안에 있던 시라소니가 대뜸 문을 열고 나오면서, 그 건달패 보스에게 큰소리를 쳤다.

시라소니는 밖으로 나와서 나랑 얘기 돔 하자고 그들을 밖으로 유인했으며, 점포밖에 있는 전당포의 넓은 마당으로 그들을 데리고 갔다.

 

먼저 앞장서 가던 시라소니는 갑자기 뒤로 돌아서면서 뒤따라오는 건달패의 중간보스인 곰치에게 뛰어들면서, 그대로 박치기를 퍼부었다.

덩치가 남산만한 곰치는 시라소니의 박치기를 정통으로 얻어맞고, 그대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그리고 옆에 있던 부하들이 시라소니를 노려보면서 빙 둘러싸자, 시라소니의 전광석화와도 같은 발차기가 이어졌다.

시라소니의 양발차기에 두명이 쓰러졌고, 또 한명이 달려들면서 시라소니에게 주먹을 날리자, 시라소니는 슬쩍 피하면서 자신의 오른 주먹을 그의 명치에 꽂아서 그를 쓰러뜨렸다.

 

그리고 달려드는 또 한녀석을 시라소니가 박치기로 받아버리자, 그대로 엎어지고 말았다. 또한 시라소니는 옆에 있던 한녀석의 턱에 오른펀치를 날려서 쓰리뜨리고 난후, 또 한녀석의 턱에 오른발킥을 날려서 그대로 KO시켜 버렸다.

 

그러던 중 제일 먼저 쓰러졌던 중간보스 곰치가 비실비실대면서 다시 일어났는데, 그가 일어나기가 무섭게 시라소니의 공중걸이 박치기가 그대로 그의 이마를 정통으로 들이받아 버렸고, 그 중간보스는 시라소니의 박치기를 두 번씩이나 맞고 그대로 기절해버리고 말았다.

 

건달패거리 7명이 모두 대자로 쓰러졌으며, 마지막 남은 한 명의 똘마니는 시라소니에게 완전 겁을 먹고서, 그대로 달아나버리고 말았다. 

시라소니 이성순은 자신의 고향친구에게 폭행을 저질렀던 건달패거리 6명을 혼자서 상대해서, 모두 완벽하게 쓰러뜨렸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새로운 문제가 발생한다. 시라소니의 친구에게 세금을 걷으러 왔던 건달들은, 바로 이곳 유조구지역을 관리하고 있던 신마적의 부하들이었던 것이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경성 종로에서 큰오야붕으로 행세를 했던 신마적이 만주 봉천으로 와서 거대한 주먹조직을 만들고는 조선상인들에게 세금을 뜯어내는 진짜 건달노릇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만주 봉천에서 이상대 주먹조직 다음으로, 거대한 주먹조직을 보유하고 있던 신마적조직이 관리하는 지역에, 시라소니가 나타나서 신마적의 부하들을 두들겨팼으니, 난리가 나도 보통 난리가 난 것이 아니었다.

 

 

곰치일행이 시라소니에게 당했다는 소식은 해학기에게 먼저 전달되었다. 자신의 부하들 7명이 두들겨맞고 쓰러졌다는 소식을 접한 해학기는 눈에서 불이 났으며, 당장 그놈을 요절내겠다며 노발대발했다.

 

해학기가 누구인가? 해학기는 신마적 주먹조직의 제2인자이자, 신마적의 오른팔과 같은 존재이다.

해학기는 원래 YMCA에서 복싱을 연마했으며 한 때 만주 월터급챔피언을 역임했던 복싱경력을 갖고있는 관록있는 싸움꾼으로, 왠만한 상대는 주먹 한방에 KO시키는 KO펀치의 소유자라고 한다.

 

신마적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YMCA의 학생패의 오야붕은 해학기였다고 한다. 해학기는 1930년대 초반부터 YMCA에 들어가 운동하면서, 강철같은 주먹을 휘두르면서 수많은 경쟁자들을 쓰러뜨리고, YMCA의 학생패두목으로 우뚝 솟았던 인물이다.

 

YMCA에서 운동깨나 한다는 학생들이 해학기의 강철같은 펀치에 추풍낙엽처럼 쓰러져버렸던 것이다. 그렇게 YMCA의 학생패의 두목이 되었던 해학기에게 전혀 뜻하지않은 새로운 도전자가 나타났으니, 그가 바로 신마적이었다고 한다.

 

YMCA에서 해학기와 신마적간에 두목자리를 놓고, 대혈전이 벌어졌다고 한다. 그런데 신마적은 다른 상대들과는 다르게 엄청나게 힘이 좋은 괴력의 사나이였다고 한다.

 

해학기의 강철같은 주먹공격을 한손바닥으로 막고, 다른손으로 해학기의 허리춤을 잡아서 그대로 집어던졌다고 한다.

해학기의 강력한 주먹도 신마적에는 통하지 않았으며, 유도와 씨름기술에 능한 신마적의 집어던지기에 해학기는 마룻바닥에 내던져지고 말았다고 한다.

 

두사람이 피투성이가 되도록 싸운 끝에, 결국 최후의 승자는 신마적이 되었고, 해학기는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고 2인자로 만족해야 했다.

 

 

신마적에게는 비록 패했지만, 당시 경성 최고의 오야붕이라고 불리워지던 신마적과 거의 대등한 싸움을 펼쳤던 해학기는 강펀치의 소유자로 명성이 자자했던 인물이었다.

 

해학기는 그놈이 어디 있나며 노발대발하면서, 동생들 9명을 거느리고 시라소니의 행적을 찾아나섰다.

유조구거리에서 시장통으로 가던 길목에 있는 전당포 앞에서 유유히 팔자걸음으로 걸어가고 있던 시라소니를 발견한 똘마니는 바로 저놈입니다!’라고 해학기에게 일러바쳤다.

 

해학기는 시라소니를 보고는, 시라소니가 자신들의 동생 7명을 초주검이 되도록 두들겨팼다는 사실이 전혀 믿어지질 않았다.

이토록 깡마르고 볼품 없이 생긴 사내가 자신의 부하들 7명을 혼자서 쓰러뜨렸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해학기는 앞서가는 시라소니를 불러서 대뜸 너의 패거리들이 내 동생들을 두들겨팼다며! 내 동생들을 두들겨팬 너의 패거리들을 모두 데려와라!’고 명령조로 말했다.

 

해학기의 말에 시라소니는 패거리라니, 내레 그런 패거리레 없어야, 내레 혼자서 처리했어야, 아하! 임자가 아까 설쳐대던 똘마니들의 두목이란 말이디라고 받아쳤다.

 

해학기는 이토록 깡마르고 볼품 없이 생긴 사내가 혼자서 부하들 7명을 처치했다니, 기가 막히고 믿어지질 않았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사실로서 인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시라소니 혼자서 부하들을 모두 쓰러뜨렸다는 사실을 알게된 해학기는, 동생들을 뒤로 물러나게 하고는, 자신이 혼자서 시라소니를 상대하겠다며, 앞으로 나왔다.

 

강력한 라이트펀치를 보유하고 있는 해학기는 권투포즈를 취하면서, 시라소니에게 돌진해 들어갔다.

그런데 매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오른주먹을 내뻗으면서 시라소니에게 돌진해들어갔던 해학기는 하는 외마디 비명소리를 지르고는,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분명 해학기는 강펀치를 휘두르면서 시라소니에게 공격해 들어갔는데, 아이러니하게도 먼저 쓰러진 것은 시라소니가 아니라 해학기였던 것이다. 시라소니의 놀라운 싸움실력이 또다시 빛을 발한 것이다.

 

해학기가 펀치를 휘두르면서 앞으로 돌진하려는 순간, 시라소니가 먼저 땅을 박차고 공중으로 뛰어올랐으며,

그대로 공중걸이 박치기로 해학기의 이마를 정통으로 들이받았고, 곧바로 땅으로 착지한 시라소니는 앞으로 고꾸라지는 해학기의 복부를 오른쪽무릎으로 찍어버린 것이다.

 

시라소니의 공중걸이 박치기는 해학기의 공격보다 한 템포 더 빨리 이루어졌으며, 시라소니는 자신의 공중걸이 박치기를 정통으로 얻어맞고 큰 충격을 받아 앞으로 고꾸라지는 해학기의 복부에 전광석화와도 같은 무릎찍기로 찍어버렸던 것이다.

 

이같은 시라소니의 공중걸이 박치기와 무릎찍기는 거의 동시에 이뤄졌기 때문에, 엄청난 충격파를 해학기에게 안겨다준 것이다.

천하의 돌주먹이라고 큰 행세깨나 해댔던 신마적의 오른팔 해학기는 주먹 한번 제대로 써먹지도 못하고, 시라소니의 박치기와 무릎찍기 공격에 정통으로 걸려서, 그대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시라소니는 싸움시작 단 7초만에 천하의 강철주먹 해학기를 완전 KO시켜버렸으며, 해학기의 동생들은 엄청난 충격을 받고 그대로 얼어버렸다고 한다.

 

신마적의 오른팔이자, YMCA의 원조 오야붕이었던 천하의 해학기가 시라소니의 단 한방의 공격에 그대로 KO되어 버리자, 곁에 있던 동생들은 너무나도 충격을 받아서, 그다음에 어떤 동작을 취해야 할지를 전혀 갈피조자 잡지 못하고 있었다.

 

시라소니의 신출귀몰한 싸움기술에 완전 멘탈붕괴에 빠져버린 해학기의 동생들은 너무나도 놀라고 두려운 나머지, 시라소니와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우왕좌왕하고 있던 상태에서,

중간보스인 이모씨가 최후의 선택으로 뒷주머니에 숨겨놨던 권총을 꺼내들었다고 한다.

 

도저히 시라소니를 싸움으로는 제압할 수 없다고 판단한 이모씨는 권총을 꺼내서 시라소니를 겨누었다고 한다. 총 외에는 싸움천재인 시라소니를 결코 이길 수 없다고 하는 처절할 정도의 절박함이 그의 심장을 강타하고 있었다.

 

중간보스급인 이씨가 시라소니에게 권총을 겨누었지만, 동시에 시라소니의 매섭게 노려보는 눈길이 이씨의 눈과 맞부딪히며 충돌했다.

이씨를 노려보는 시라소니의 눈에는 총은 비겁자나 쓰는 물건이야!’ ‘총을 쓰면 너는 영원히 비겁자라는 멍에에서 벗어나지 못할꺼야!’라고 말하는 듯했다.

 

더욱이 시라소니와 싸움을 벌였던 전당포앞에는 시장 바로 앞에 있어서, 수많은 사람들이 드나들고 있어서, 권총을 꺼내들었던 이씨는 결국 시라소니를 쏘지도 못한 채, 그냥 쓰러진 해학기를 들쳐업고 철수하고 말았다.

 

이처럼 시라소니는 신마적이 관리하는 유조구거리에서 두번씩이나 신마적의 부하들을 아작냈던 것이다. 시라소니는 신마적 주먹조직의 2인자마저 쓰러뜨렸고, 시라소니에게 얻어맞은 해학기는 오른쪽 갈빗뼈가 4대나 부러지는 중상을 입었다고 한다.

 

 

이같이 부하들이 시라소니에게 처참하게 당했다는 소식은 곧바로 신마적에게 전달되었다고 한다.

2인자였던 해학기마저 시라소니에게 처참하게 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신마적은 노발대발하면서, 당장 시라소니를 찾아오라고 부하들에게 말하면서, 길길이 날뛰었다고 한다.

 

해학기를 쓰러뜨리고 난 후 시라소니는 그 유조구지역에서 찾을 수 없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한 부하로부터 시라소니의 거처가 포착되었다고 한다.

그 부하에 의하면, 시라소니는 현재 봉천의 외곽에 있는 산언덕 위에서 10여명의 중국사람들과 함께 술을 마시고 있다고 한다.

 

해학기와 곰치 등 부하들을 두들겨팬 시라소니에 대한 복수에 눈이 먼 신마적은 부하들을 전원 소집시켰으며, 중간보스급 이상의 부하들에게는 소총과 권총등으로 중무장시킨 채, 시라소니가 있다는 그 산언덕으로 찾아갔다.

 

정말 어이가 없고 기가 막힌 일이 벌어졌다. 한 때 종로와 경성을 주름잡았던 최고오야붕 신마적이 시라소니 한사람을 잡기위해서, 자신의 부하 80명을 대동하고 시라소니를 찾아간 것이다.

더욱이 부하들 중에는 소총이나 권총으로 무장한 부하들도 상당수 있었다고 한다.

 

김두한 이전의 시기까지는 서울을 대표하는 최고의 오야붕으로서 이름을 떨쳤던 신마적이 시라소니라는 한사람을 잡기위해서, 자신의 주먹조직 전원을 모두 소집해서,

80명이나 되는 부하들과 함께 소총으로 무장한 채, 시라소니에게 돌격해가는 정말 웃지못할 해프닝이 벌어졌던 것이다.

 

천하의 신마적이 시라소니가 그렇게도 두려웠던 모양이다. 시라소니 한사람을 잡기위해서 80명의 부하들을 이끌고 가는 것도 정말 가관이 아닐 수가 없는데, 더욱이 맨손의 시라소니를 상대하기 위해서,

20명 이상의 부하들에게는 소총으로 중무장시키기까지 했으니, 시라소니 한사람을 상대하기 위해서 마치 중대급 군대를 동원하는 모양새가 아닐 수가 없다.

 

이렇게 신마적은 자신의 부하 80명을 이끌고 시라소니가 있는 봉천 외곽의 산언덕베기까지 쳐들어갔다. 그 산의 넓다른 언덕베기에 시라소니는 중국건달로 보이는 사람들 10여명과 거적대기를 깔아놓고, 술판을 벌이고 있었다고 한다.

 

신마적은 소총을 어깨에 맨체로 시라소니에게 다가가서, 대뜸 네놈이 내 동생들을 두들겨팼다는 시라소니가 맞는가?’라고 일갈을 퍼부었다.

 

신마적이 부하들 80명을 대동하고 자신을 포위한 상태였지만, 시라소니는 전혀 겁먹지 않고, 신마적에게 당신이 신마적이구만, 내레 힘없는 상인들을 못쌀게 군다는 똘마니새끼들 몇 명을 손보아준 적이 있는데, 당신이 그 똘마니들의 오야붕이구먼이라고 말하

면서

 내레 똘마니에들이 하도 못된 짓을 많이 하길래, 버르장머리를 좀 고쳐둔 것인데, 나 한사람을 잡기 위해서, 수십명의 부하들을 대동하고 쳐들어오다니, 이거 정말 꼴 사납구먼 기래!’ 맞받아쳤다.

 

소총과 권총으로 무장한 80여명의 건달들이 포위하고 있는 위협적인 상황에서, 시라소니는 전혀 기죽지 않고 막말을 하는 시라소니를 보고, 신마적은 기가 막힐 지경이었고,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왔다.

이사람은 도무지 겁이 없고 간댕이가 부어도 한참 부어있는 것이다. 중무장한 80명의 건달들의 위세를 전혀 개의치않고 있으니 말이다.

 

시라소니는 한술 더떠 신마적에게 당신의 동생들이 죄없는 내친구를 먼저 두들겨패고 행패를 부렸길래, 내레 당신 동생들의 버르장머리를 고쳐주려고 손 좀 본 뿐인데, 님자가 동생들 교육을 제대로 시키지않아서, 이런 사단이 벌어진 것 아닌가? 그렇지 않네?’라고 충고까지 하는 것 아닌가?

 

시라소니의 당돌한 말에 신마적은 혼자서 떠돌아다니는 건달 주제에, 감히 내동생들을 두들겨패고 선배인 나한테까지 막말을 해? 시라소니, 너 오늘 확실히 죽여주마!’라고 말했다.

 

이에 시라소니는 신마적에게 님자가 나한테 동생들 복수를 하겠다면, 내레 절대 피하지 않갔어!, 비열하게 동생들 희생시키지 말고, 우리 일대일로 정정당당히 맞붙어 보자우!,

님자가 진짜 오야붕이 맞다면, 나와 맞짱을 떠서, 나를 쓰러뜨려야만 할 게야라고 당돌하게 일대일 결투를 신청하고 나섰다.

 

자신보다 나이가 한참이나 어린 시라소니가 한참 선배인 자신에게 계속 막말을 하면서, 결투까지 신청을 하자, 신마적은 독이 오를 데로 바짝 올랐고, 자신의 소총을 시라소니에게 겨누면서, 시라소니에게 바짝 다가갔다고 한다.

 

김두한 이전의 시기인 1936년도까지만 해도 종로뒷골목에서 최고의 오야붕으로 군림했던 신마적과 북한지역에서 최고의 싸움꾼으로 명성을 떨쳤던 시라소니가 조선땅이 아닌 만주의 깊숙한 산속에서, 역사적인 대결을 펼치게된 순간이었다.

 

남과 북의 두 거물급 싸움꾼들의 역사적인 싸움을 벌이게 되었는데, 과연 누가 최후의 승자가 될 것인가? 그렇지만 신마적의 비열한 행동 때문에, 남과 북의 최고의 싸움꾼을 가리는 대결은 펼쳐질 수가 없었다.

 

신마적은 부하 80명을 대동하고 시라소니를 포위하고 있었으며, 그것도 모자라 비열하게도 자신의 소총으로 시라소니를 겨누고 있었던 것이다.

부하 80명을 대동하고 소총까지 겨누고 있는 신마적과 혈혈단신 맨주먹에 혼자인 시라소니간의 정당한 대결이 벌어지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했다.

 

이미 경성에서 김두한에게 호되게 당했던 신마적은, 그때의 악몽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김두한 못지않게 싸움을 잘하는 시라소니에게 정신적으로 이미 지고 있었으며,

또다시 그때의 망신을 두 번 다시 겪지않기 위해서, 80명의 부하들과 소총까지 갖고온 것이므로, 시라소니와 신마적의 역사적인 싸움대결은 결코 벌어질 수가 없었던 것이다.

 

신마적에게 일대일 대결을 신청한 시라소니와 시라소니와의 맞대결을 외면하고 싶은 신마적간의 불꽃 튀기는 눈싸움이 십여분 간 이어졌다.

그런데 산언덕 아래에서 누군가가 뛰어오면서 신마적에게 소리쳤다. 그는 바로 봉천의 최고오야붕 봉천두이상대였다.

 

만주지역에서 최대규모의 주먹왕국을 거느리고 있던 봉천두이상대가 두사람간의 싸움을 말리려고 이곳으로 달려온 것이다.

신마적이 봉천의 유흥가에서 자신의 주먹나와바리를 만들 수 있었던 것도 모두가 봉천두이상대의 아낌없는 지원과 조력 덕분이었다.

 

 

오늘날 신마적이 봉천의 유조구거리에서 탄탄한 주먹조직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은 봉천의 최고오야붕인 이상대의 지원과 협력 덕분이었던 것이다.

 

경성에서 김두한에게 패해서 동생 7명을 데리고 거의 거지꼴이 다 되어서, 봉천으로 굴러들어온 신마적일행을 자신의 휘하로 받아들이고, 그에게 별도의 주먹조직을 만들 수 있도록 모든 물질적·인적 지원을 다 해준 사람이 바로 봉천두이상대였던 것이다.

 

그런 이상대가 두사람간의 싸움을 말리려고 달려온 것인데, 이상대와 시라소니는 신마적이 봉천으로 오기 전부터, 서로 호형호제하는 협력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다.

 

혼자서 당돌하게 못된 건달패들을 꺾으면서, 힘없는 사람들편에 서서 의롭게 살아가는 시라소니의 용기와 담력을 크게 높이 샀던 봉천두이상대는 시라소니에게 인간적인 매력을 느끼게 됐고, 그를 자신의 조직의 식객으로 받아들였고,

시라소니가 만주에서 활동하는 동안 용돈도 두둑하게 챙겨주기까지 하면서, 시라소니와 좋은 협력관계를 맺고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신마적이 부하들을 무장시켜서 시라소니를 잡으러 간다는 소식을 접한 이상대는 이런 말도 안되는 싸움을 그냥 볼 수만은 없었던 것이며, 신마적의 뒤를 따라와서 두사람의 싸움판에 끼어들어서, 두사람의 대결을 만류하게 된 것이다.

 

신마적이 봉천지역의 왕이라고 한다면, 이상대는 왕보다 높은 황제격에 해당하는 사람이다. 더욱이 이상대는 신마적조직을 자신의 휘하에 두고 있었기 때문에, 신마적은 이상대의 말을 듣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상대는 신마적에게 다가가 시라소니를 건들리면, 장체 큰 화근이 생길 수 있다고 말하면서, 신마적을 말렸다고 한다.

결국 비겁하게 부하들 80명을 이끌고 시라소니에게 쳐들어왔던 신마적은 이상대의 만류에 시라소니에 대한 포위망을 풀었으며, 이상대의 주선으로 시라소니와 신마적은 극적인 화해를 했다고 한다.

 

일촉즉발의 대결의 상황에서, 이상대의 주선으로 극적인 화해를 했던 시라소니와 신마적, 그리고 이상대는 봉천 유흥가에 있는 칭니주점으로 가서, 밤새도록 술을 마셨다고 한다.

 

한 때 남한지역에서 최고의 오야붕으로 명성을 떨쳤던 신마적과 북한지역에서 최고의 싸움꾼으로 이름을 날렸던 시라소니간의 싸움은 이렇게 극적인 화해를 하고 무산되고 말았다.

 

일대일 맞대결을 원했던 시라소니와 달리 신마적은 소총과 수십명의 부하들을 대동하고 시라소니에 맞서는 아주 비열한 행동을 하였으며, 이사건으로 인해 시라소니의 주가는 더욱 올라가게 되었지만, 비겁한 행동을 한 신마적은 자신의 명성을 오히려 깎아버리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김두한에게 패배해서 한번 큰 망신을 당했던 신마적은 이번에는 시라소니에게 호되게 당할 뻔한 위기의 상황에서, 80명의 부하들과 소총 덕분에 간신히 시라소니에게 패배하는 상황을 피해간 것이다.

 

 

시라소니와 김두한의 싸움대결

  

이렇게 시라소니가 만주와 중국을 돌아니면서 호령하고 있을 즈음에, 남한의 경성(서울)에서는 김두한이 우미관을 중심으로 자신의 주먹세계를 확고하게 구축해나가고 있었다.

 

종로의 큰오야붕이었던 구마적과 신마적을 상대로 맞대결을 벌여서, 승리한 김두한은 193720살의 나이로 명실상부한 종로의 최고의 오야붕으로 우뚝 솟아오를 수 있었고, 그 여세를 몰아서, 왕십리, 서대문, 마포, 용산, 영등포 등 서울의 주변지역까지 진출해서 자신의 주먹조직을 크게 확장시켜 나가고 있었다.

 

김두한은 직접 동생들을 이끌고 서울의 중심지역에서 외곽지역까지 쳐들어가서, 그곳 주먹들과의 혈투를 벌여서 모두 제압함으로써, 1937년도에는 서울지역의 대부분을 자신의 주먹조직 휘하에 넣을 수 있었다고 한다.

 

김두한은 센 주먹 만큼이나 야심이 매우 큰 사람이었다. 김두한은 결코 경성(서울)의 오야붕으로 만족할 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김두한은 한반도 전체를 호령하는 전국구 주먹의 오야붕을 꿈꾸고 있었고,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 지방의 각 대도시들로 자신의 부하들을 파견해서, 지방의 군소주먹들을 복속시키는 작업을 진행하였다.

 

김두한은 용인, 수원을 시작으로 해서, 대전, 전주, 광주, 목포, 대구, 그리고 부산지역에까지 부하들을 파견해서, 그지역의 주먹들을 모조리 제압해서 항복을 받아내었고, 이렇게 지방의 주먹조직들을 자신의 우미관조직의 휘하에 복속시켜나갔다.

 

    젊었을 때의 김두한 사진

 

남한의 대부분의 도시들을 평정하고 난 후, 김두한은 북한지역으로 눈을 돌렸는데, 북한의 평양에도 동생들을 보내서 복종과 협력을 요구했다.

당시 평양의 오야붕이었던 이화룡은 김두한의 밀사를 만나 자리에서, 김두한의 복속요구에 순순히 동의해주었다고 한다.

 

김두한의 요구는 이런 것이었다고 한다. 종로의 우미관조직과 지방의 주먹조직이 서로 유기적으로 교류하고 협력하는 협력관계를 형성·유지하면서, 중요한 사안에 대한 결정은 우미관조직의 결정에 따르기로 하는 것이었다.

 

겉으로 볼 때에는 그냥 대등한 협력관계나 우호관계처럼 보이지만, 사실상 지방의 주먹조직들이 김두한의 우미관조직에 복속되는 관계나 다름 없는 것이다.

즉 우미관조직과 지방조직간에 주종관계 내지는 우미관의 신하국이나 속국이 되는 것으로 볼 수가 있다.

 

그렇지만 80여명의 김두한 부하들이 때거리로 평양에 나타나자, 그 위세에 기가 꺽인 이화룡은 김두한의 요구에 선뜻 동의해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김두한은 한반도 끝자락에 있는 신의주에까지 동생들을 파견했다고 한다. 부하들 40명을 이끌고 신의주에 진출한 김두한의 동생들은 당시 신의주의 오야붕이었던 정팔로부터 곧바로 동의를 받아내지 못했으며, 시간을 더 주기로 했다.

 

허지만 신의주로부터 한달이 넘도록 아무런 전갈을 받지 못하자, 김두한의 동생이자 행동대장인 털빠진개고기와 병수를 필두로 40여명의 돌격대가 신의주로 파견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비협조적인 신의주의 주먹들을 혼내주기 위해서, 신의주로 파견된 털빠진개고기와 병수등 김두한동생들은 신의주에서 뜻하지 않게 시라소니를 만나게 되었고, 시라소니에게 된통으로 두들겨 맞고 쫒겨오게 되었다고 한다.

 

신의주로 찾아간 김두한의 동생들은 정팔의 사무실에서 대기하고 있던 시라소니에게 걸려서, 초주검이 되도록 두들겨맞고 신의주에서 쫒겨나 경성으로 되돌아왔던 것이다.

  

한반도의 대부분의 도시들을 평정해나갔던 김두한은 자신의 동생들이 시라소니에게 두들겨맞고 돌아오자, 크게 대노했다고 한다. 다 완성되어가던 전국구주먹의 꿈이 시라소니라는 이상한 놈 하나 때문에, 이미지를 크게 흐리게 됐던 것이다.

 

동생들이 처참할 정도로 얻어맞고 돌아온 꼴을 보자, 김두한은 눈에서 불이 번쩍 났으며, 시라소니에게 복수를 하기위해서, 가슴에 칼을 품고 곧바로 신의주로 쳐들어갔다고 한다.

 

그런데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이란 말인가? 김두한이 찾아갔던 신의주에는 시라소니는 없었다고 한다. 시라소니는 이미 만주 봉천으로 떠났으며, 김두한은 시라소니를 쫒아서 봉천까지 열차를 타고 갔는데, 그만 봉천역에서 일본경찰의 불심검문에 걸려서 칼을 빼앗기고, 경성으로 강제송환당하고 말았다.

 

신은 한반도에서 최고주먹의 출현을 원치 않으셨나 보다! 남한지역을 대표하는 최고의 주먹 김두한과 북한지역을 대표하는 최고의 싸움꾼 시라소니간의 싸움이 벌어질 찰나에, 전혀 석연치않은 이유로 두사람간의 역사적인 대결은 이뤄지지 않았던 것이다.

 

이 당시가 1940년대 초반이었는데, 이때에 김두한과 시라소니가 실제 싸움을 벌였다면, 진정한 조선최고의 싸움꾼이 탄생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당시 일본경찰의 개입으로 두사람간의 역사적인 대결은 불발로 끝나고 말았으며, 진정한 남과 북의 최고의 싸움꾼을 가리지 못하게 된 아쉬움만 남겼다.

 

이렇게 한번 붙을 뻔했던 김두한과 시라소니는 우연찮게도 19462월 서울의 종로회관 술집에서 역사적인 조우를 하게 된다.

 

시라소니는 해방이 된 후 북한 신의주로 돌아와 신의주 치안대장에까지 선임되어, 잠시 신의주에서 활동하였는데, 북한의 공산주의자들의 잔인한 학살행위에 환멸을 느낀 나머지, 1946년 초에 남한으로 탈출해서, 남한으로 들어올 수 있게 되었다.

   

19462월경에 차가운 겨울바람이 콧김을 싸늘하게 스치던 어느날, 시라소니는 고향선배 이영환과 함께 종로 우미관에 있는 종로회관에 들러 술한잔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날 시라소니가 이영환과 함께 들어간 종로회관이 어떤 곳인가 하면, 바로 종로의 오야붕 아니, 한반도 전국구의 오야붕 김두한의 아지트였던 것이다.

 

 

시라소니가 김두한의 아지트에 느닷없이 나타나서, 거나하게 술한잔 걸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시라소니가 김두한의 본거지인 종로술집에 못 올 이유는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당시의 주먹세계에도 규칙 같은 것이 있어서, 다른 지역의 오야붕이나 싸움꾼이 특정지역의 아지트나 본거지에 들어가게 되면, 그 지역의 오야붕에게 먼저 인사를 올리는 것이 예의라고 한다.

만약 이런 룰을 위반하게 되면, 그것은 곧 전쟁을 의미하는 것으로 선전포고나 다름없는 것이다.

 

더군다가 종로회관은 한국 최고의 주먹황제인 김두한의 본거지인데, 더이상 말하면 무엇하랴? 

북한지역 최고의 싸움꾼이었던 시라소니가 종로의 한 술집에 떳다는 소식은 꼬붕들에 의해서, 곧바로 김두한의 귀에 들어갔다.

 

종로의 신신백화점 4층에 있는 자신의 사무실에 있던 김두한은 사리소니가 들어왔다는 전갈을 접하고서, 동생들을 소집했다.

김두한은 자신의 최측근으로 구성된 동생들 김영태, 문영철, 김무옥, 홍만길, 김삼수, 병수, 신영균, 망치, 보디가드인 김관철 등 10여명의 동생들을 거느리고 곧장 종로회관으로 들어왔다.

 

김두한일행이 종로회관으로 들어오자, 술집에서 술을 먹던 몇몇의 유지들은 자리에서 일어서서, 김두한에게 인사를 건네기도 했다. 김두한은 여유로운 미소를 머금으며 목례로 이들의 인사에 답례를 했다.

 

그런데 김두한일행의 자리에서 두 테이블 건너에 앉아있던 두사람 중 이영환이 김두한을 알아보고 서서 인사를 건넸다고 한다. 이영환은 스포츠계의 인물로 전에 김두한과 인사를 나눈 적이 있던 인물이다.

 

그 때 김두한의 동생 병수가 이영환의 맞은편에 앉아서 김두한쪽을 돌아다보는 시라소니를 알아보았고, 곧바로 김두한에게 저자가 바로 시라소니란 놈입니다라고 일러바쳤다고 한다.

사실 김두한의 동생 병수는 수년 전에 김두한의 명에 의해서 신의주에 파견갔다가, 시라소니에게 엄청나게 엊어맞고 쫒겨온 적이 있기 때문에, 시라소니의 얼굴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김두한은 시라소니가 종로회관에 들어왔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온 것이며, 그래서 싸움잘하는 중간보스급 동생들을 10명이나 대동하고 들어왔던 것이다. 김두한은 과거에 악연이 있던 시라소니를 오랫동안 벼르고 있었다고 한다.

 

언젠가 한번 만나면 단단히 손 좀 볼 것을 마음속으로 다짐하고 있었던 것인데, 시라소니가 제발로 호랑이굴로 굴러들어온 것이니, 김두한으로서는 더 이상 지체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김두한은 건너편에 등을 보이고 앉아있는 시라소니를 향해 대뜸 네가 시라소니란 놈이냐? 여기가 어딘데 겁도없이 호랑이굴로 함부로 찾아들어와라고 말하고는 개새끼, 네가 일전에 내동생들을 흠씬 두들겨 팼대며, 너 오늘 정말 잘못 걸렸다. 오늘이 네 제삿날이 될 줄 그리 알아?’라고 말하며 시라소니에게 시비를 걸었다.

 

김두한의 시비를 들은 시라소니는 김두한을 돌아보며 네가 김두한이냐?’라고 반말로 받아쳤다. 

처음 본 김두한으로부터 심한 욕설과 함께 모욕적인 시빗말을 듣게된 시라소니는 김두한의 존재감을 알아보고, 당당하게 반말로 대꾸했던 것이다.

   

김두한의 느닷없는 시빗말로 인해서, 두사람 사이에는 언제 싸움이 벌어질지 모르는 일촉즉발의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긴장감을 깬 것은 김두한의 보디가드였던 김관철이었다.

 

김관철은 시라소니가 김두한에게 반말로 대꾸하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시라소니를 공격하기 위해 돌진해왔던 것이다.

 

그리고 김관철이 시라소니를 향해서 주먹을 뻗으려던 찰나에 ’ ‘하는 파열음이 울렸고, 거대한 덩치의 김관철은 마치 고목나무 쓰러지듯이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몸놀림이 재빠른 시라소니는 김관철이 공격하기 전에 먼저 뛰어올라서 김관철의 이마를 들이받았고, 동시에 김관철의 옆구리를 무릎으로 찍어버렸던 것이다.

 

먼저 공격해들어간 것은 김관철이었지만, 시라소니는 한템포 빠르게 먼저 김관철의 이마를 받아버렸고 옆구리를 찍어버렸으며, 이 두 번의 시라소니의 공격을 받은 김관철은 주먹 한번 내뻗지도 못하고, 그대로 KO당하고 말았다.

 

시라소니의 전광석화와도 같은 공격에 거구의 김관철이 쓰러져버리자, 김두한과 동생들은 깜짝 놀라지않을 수가 없었다.

 

김관철은 184cm의 큰 키와 어깨가 딱 벌어진 거대한 덩치의 소유자로 김두한 동생들 중에서 엄청 괴력이 센 사나이로 유명하며 힘이 천하장사이다.

이처럼 힘과 괴력이 대단한 김관철 이기에, 김두한은 그를 경호인으로 삼아서 항상 대동하고 다녔던 것이다.

 

그런 김두한의 보디가드 김관철이 시라소니의 단 두방의 공격을 받고, 힘 한번 써보지도 못하고, 대자로 바닥에 쓰러져 기절해버렸으니, 김두한과 동생들은 긴장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김관철이 쓰러지자, 김두한과 동생들은 자리에서 모두 일어났으며, 김두한 동생들은 김두한의 공격지시를 기다린 채 시라소니를 노려보고 있었다.

곧 시라소니 한사람을 상대로 김두한과 부하들 10여명이 대혈투를 벌일 일촉즉발의 긴장된 상황이었는데, 이 때 적막을 깨고 시라소니가 먼저 김두한에게 말을 걸었다고 한다.

 

시라소니는 김두한에게 김두한, 당신은 나보다도 나이가 어린 것으로 알고있는데, 이렇게 처음보는 사람에게 욕지거리를 하고, 반말지꺼리를 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지 않나? 아무리 주먹으로 먹고사는 건달이지만 주먹세계에도 예의란 게 있어야 하지 않겠나? 이것이 김두한 당신의 예법이란 말인가!’라고 말했다고 한다.

 

종래에 알려진 사실과 다르게, 실제로 시라소니는 김두한에게 싸움을 신청하 게 아니라고 한다. 시라소니는 자신보다 나이가 2살 정도 어린 김두한에게 예의를 갖출 것을 요구했다고 한다. 좀 의외의 상황이 전개되었던 것이다.

 

그러자 느닷없이 김두한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고 한다. 시라소니를 노려보던 김두한은 갑자기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참 말로만 듣던 시라소니선생, 듣던 대로 정말 대단하신 분인 것 같습니다라고 말을 시작했다.

 

김두한 시라소니에게 시라소니가 우리 동네에 나타났다고 하길래, 어떤 사람인가 알아보기 위해서, 내가 이렇게 온 것입니다.

안 그래도 험악하기 짝이 없는 세상인데, 우리까지 서로 으르렁거릴 필요가 뭐가 있겠소이까? 우리 이제부터 서로 트고 지냅시다’ ‘참 명동에 있는 이화룡과도 친하게 지내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또한 김두한 계속해서 시라소니에게 당신이 나보다도 연배이시니까, 내가 당신을 형님으로 대접해드리겠습니다. , 이리 와서 술이나 함께 먹읍시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남한과 북한의 최고의 두 주먹이 만나, 싸움을 벌일 만한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두사람은 극적으로 화해를 했던 것이며, 김두한과 시라소니의 역사적인 싸움은 또다시 불발로 끝나고야 말았다. 

 

김두한은 시라소니와 싸움을 벌이는 대신에 화해하는 쪽을 택한 것이다. 이 장면을 놓고 일각에서는 김두한이 시라소니에게 형님이라고 부르며, 무릎을 꿇었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김두한이 시라소니에게 무릎을 끓고 항복하는 자세를 취했다는 얘기는 전혀 사실이 아니며, 과장된 이야기라고 본다.

 

이당시 종로회관에서 시라소니와 김두한이 서로 만났을 때에, 함께 그 자리에 있었던 XX’라고 하는 김두한 동생의 증언에 따르면, 김두한은 결코 시라소니앞에서 무릎을 끓은 적이 없다고 한다.

 

김두한이 시라소니에게 형님운운 한 것은 하나의 예의를 표시한 행동이지, 항복을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니라고 한다. 당시 시라소니는 30살의 나이였고, 김두한은 2살 어린 28세의 나이였으므로 나이가 2살 어린 김두한이 시라소니에게 예법상 형님이라고 부른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김두한이 자신의 아지트에 침입해온 시라소니에게 공격을 하지않고, 형님운운했다고 해서, 일부의 사람들은 마치 김두한이 시라소니에게 두려움을 느끼고 무릎을 꿇으면서 항복했다는 이야기로 와전되어서, 퍼져나갔던 것으로 판단된다.

 

당시의 상황을 면밀하게 살펴보면, 김두한이 시라소니에 비해 전혀 불리한 상황은 아니라고 본다그당시 김두한은 싸움잘하는 동생들 10여명이 대동하고 있었고, 김두한 자신도 천하의 싸움꾼이다.

 

전성기때의 김두한은 단도칼을 갖고 덤비는 하야시 부하들 8명을 혼자서 모두 쓰러뜨린 적이 있을 정도로 엄청 빠르고 싸움실력도 뛰어난 싸움꾼이다. 그런 김두한이 자신의 아지트에서 그것도 부하들 10여명이 보는 앞에서 시라소니에게 무릎을 꿇고 항복까지 했다고 하는 것은 전혀 앞뒤가 맞지않는 행동인 것이다.

 

시라소니가 수많은 강자들을 쓰러뜨린 싸움의 천재라고 하지만, 김두한은 그가 상대했던 다른 싸움꾼들과는 차원이 다른 싸움꾼이다.

김두한도 구마적, 신마적, 마루오까 같은 강자들을 쓰러뜨리고 최고의 오야붕에 올랐던 입지전적의 인물이었으며, 전성기 때에는 혼자서 10명 이상의 패거리들을 물리쳤던 화려한 싸움경력을 갖고 있다.

 

그런 김두한이 자신이 과거에 신의주까지 찾아갔던 시라소니 한사람이 무서워서 부하들과 다른 손님들이 보고있는 자신의 본거지에서, 시라소니에게 무릎을 꿇었다는 것은 전혀 말이 안된다고 본다.

 

김두한이 시라소니에게 형님이라고 예의를 갖춘 것을 두고, 후대의 사람들이 예의상 형님이라는 표현을 잘못 해석하여, 항복의 의미로 해석했던 것이며, 이 항복이라는 개념을 무릎을 꿇었다는 표현으로 와전되어서, 전래되었다고 본다.

   

김두한은 혈혈단신 혼자서 남한으로 내려와서 당당하게 싸워나가는 시라소니의 강직성을 높이 평가했던 것이며, 강자로서의 서로의 존재감을 존중해주었던 것이다.

 

겁도 없이 혼자서 당당하게 자기구역에 찾아왔던 시라소니의 비범함과 용력을 높이 샀던 김두한은 시라소니를 존중해주었던 것이다. 진정한 강자는 강자를 알아보는 법이라고 하지 않던가?

 

김두한의 동생인 홍씨는 그당시 시라소니도 무척 긴장했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여태까지 시라소니가 쓰러뜨렸던 상대들과 김두한은 전혀 격이 다른다는 것을 시라소니도 인식하고 있었다는 얘기다.

 

시라소니가 김두한과 일대일로 맞대결을 펼친다는 것도 그결과를 장담할 수 없는데, 김두한 외에도 싸움잘하는 부하 10명이 동시에 공격해올 수 있기 때문에, 시라소니로서도 쉽지만은 않은 싸움이 되었을 것이다.

 

남한 최고의 주먹인 김두한과 북한 최고의 싸움꾼인 시라소니간의 역사적인 대결이 펼쳐질 상황에서, 두 영웅은 싸움보다는 극적인 화해를 택함으로써 최고의 싸움꾼을 가리지 못하게 됐다.

결국 신은 우리 한반도에서 최고의 싸움꾼이 탄생하는 것을 결코 원하지 않으셨던 것 같다.

 

 

 

 

 

 

 

 

Posted by 프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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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최고의 주먹, 김두한과 구마적, 신마적 엄동욱의 대결,

 

일제시대 종로 우미관의 뒷골목에는 대단한 주먹이 나타나, 종로뒷골목을 주먹하나로 평정해나가고 있었다.

 

날카로운 눈매와 단단하고 다부진 체격을 가진 이 배짱좋은 사나이는 1930년대 중반 종로 뒷골목에 혜성처럼 나타나더니, 뒷골목의 이름난 깡패들과 주먹들을 하나둘씩 제압해나갔고, 급기야는 우미관 최고의 두목 구마적에게 당당하게 도전장을 내밀었다.

 

1930년대 중반 17세의 나이로 당시 종로의 뒷골목에서 최고의 오야붕으로 행세를 하던 구마적에게 도전장을 던졌고, 종로 최고의 주먹자리를 놓고 한판승부를 벌인 사람은 바로 김두한이다.

 

일제강점기 때, 우리나라 최고의 싸움꾼으로 이름을 날리던 두명의 주먹들이 있었는데, 한사람은 경성의 종로를 무대를 탄탄한 주먹왕국을 이룩해나갔던 김두한이고,

또 한사람은 북한 신의주를 무대로 눈부신 싸움실력을 선보이면서 북한은 물론 중국에까지 진출해 큰 명성을 날렸던 시라소니 이성순이다.


 

김두한과 시라소니, 이 두명의 싸움꾼들은 일제시대와 해방 이후 낭만파주먹의 대표주자들로서, 각각 남과 북을 대표하는 최고의 싸움꾼으로 명성을 날리면서 수많은 싸움신화를 만들어간다.

 

시라소니 이성순이 북한지역에서 최고의 싸움꾼으로 막 등극할 무렵인, 1930년대 중반 남한지역에서는, 약관 10대의 나이로 또한명의 걸출한 인물이 나타나, 싸움깨나 한다는 주먹들을 닥치는 데로 쓰러뜨리고, 종로의 뒷골목을 평정해나가고 있었다. 그가 바로 잇뽕 김두한이다.

 

김두한이 경성(서울)을 대표하는 우미관의 최고의 주먹으로 올라설 수 있었던 계기는 바로 종로의 큰오야붕이자 주먹계의 터주대감인 구마적과 신마적을 제압했기 때문이다.

 

그당시 서울 종로를 장악하는 주먹이 서울을 대표하는 가장 큰 주먹으로 행세할 수 있었고, 서울의 대표주먹이 우리나라 전체를 대표하는 가장 큰 주먹이자, 오야붕으로 인정받게 된다고 한다.

 

 

또한 1930년대 당시, 경성(서울)에서 가장 상권이 발달한 지역은 바로 우미관이었기 때문에, 우미관을 장악하는 오야붕은 자동적으로 경성 최고의 오야붕자리를 얻게 됨을 의미한다.

일제시대 당시 종로의 우미관골목은 크고 작은 술집들이 즐비해있고, 대형 우미관극장이 자리잡고 있어서, 서울지역에서 최고의 금싸라기땅에 속하는 지역이었다.

 

이 우미관골목의 헤게모니를 장악하는 주먹은 결국 전국을 대표하는 최고의 오야붕의 귄위를 인정받을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싸움도 잘하지만 상황판단이 무척 빠르고, 머리가 잘 돌아가는 김두한은 바로 이러한 지정학적 이유로 해서, 종로로 넘어온 뒤부터 호시탐탐 우미관골목의 최고의 오야붕으로 군림하던 구마적과 신마적을 노리고 있었다.

   

김두한의 싸움실력

 

김두한은 다들 알다시피 김좌진장군의 아들이다. 독립운동을 가열차게 벌여나갔던 김좌진장군을 아버지로 둔 이유 때문에, 김두한의 어머니는 수없이 일경에게 끌려가 탄압을 받고 감옥에 수감되는 신세가 되었으며,

어려서부터 아버지와 어머니의 보호를 제대로 받지못했던 김두한은 길거리를 떠돌다가 한때는 수표교다리 밑에서 들어가 거짓생활로 유년생활을 보냈다.

 

그리고 나이가 어렸을 때에, 종로에서 설렁탕집을 운영하던 원노인을 만나게 되고, 김두한이 김좌진장군의 아들임을 알고있는 원노인의 배려와 보호를 받으면서 생활하게 되는데, 원노인은 김두한에게 매일같이 설렁탕국을 끓여주었고, 저녁에는 당수도장에서 운동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

 

김두한은 이당시 원노인이 챙겨준 영양식을 먹으면서, 기골이 장대한 사나이로 성장하게 되었고, 당수도장에서 정권치기와 발차기를 혹독하게 연마해서, 그의 뛰어난 싸움기술의 기틀이 이때에 만들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17세가 된 김두한은 1930년대 중반 종로 우미관골목에서 탄탄한 주먹집단을 보유하고 있던 김기환의 수하로 들어감으로써, 본격적으로 주먹세계에 발을 들여놓게 된다.

 

옛우미관 극장 터

 

김두한이 우미관 뒷골목에서 깽판을 자주 벌이던 주먹들과 건달들을 혼자서 싸워 쓰러뜨리는 것을 본 두목 김기환은 김두한의 뛰어난 싸움실력과 인물됨을 미리 간파하고, 그를 자신의 휘하로 불러들여 부하로 삼았던 것이다.

 

김두한은 본래 야망이 매우 큰 사람이다. 김두한은 원래 남의 밑에서 부하로 지내는 것 자체를 용납할 수 없을 만큼 야심이 큰 사람이다.

형식적으로는 우미관 뒷골목의 오야붕인 김기환의 부하로 들어가서 적을 두고 있었지만, 원채 야심이 컸던 김두한은 자신의 별동부대를 따로 두어서, 자신이 직접 관리하며 두목으로 행세하고 있었다고 한다.

 

우미관 뒷골목에서 자신의 주먹조직을 서서히 키워나가면서, 언제가 주먹황제의 자리에 오를 야심을 품고있던 17세의 청년 김두한은 자신이 종로 최고의 주먹황제로 등극할 수 있는 기회만을 엿보고 있었다.

 

1930년대 중반이던 이 당시의 종로 뒷골목에는 여러개의 주먹조직들이 혼재해있었다고 한다. 어느 한 개의 주먹조직이 종로 전체를 장악한 것이 아니라, 10여개의 군소 주먹조직들이 혼재한 상태에서 각각 저마다의 세력을 과시했던 춘추전국시대였다고 한다.

 

 

따라서 이당시의 종로뒷골목에는 오야붕도 십여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10여명의 오야붕 중에서 경력이나 파워면에서 가장 세다고 알려진 큰 오야붕이 두명 있었는데, 그당시 큰 오야붕으로 떠받들어졌던 인물은 바로 구마적과 신마적이었다고 한다.

 

주먹도 가장 쎄고, 경력이나 스펙이 가장 뛰어났던 구마적과 신마적이 종로 뒷골목에서 가장 영향력 있고 강한 오야붕으로 많은 주먹들의 신망을 받고 있었다고 한다.

 

구마적과 신마적이 종로 뒷골목을 모두 통제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곳의 주먹이나 건달들은 조직을 초월해서 이 두 마적형님들을 큰 오야붕으로 인정했고, 최고의 강자로서 대접을 해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두 마적 다음으로 김두한이 속해있던 주먹조직의 두목 김기환이 종로에서 한 세력 하고 있었다.

김기환은 체육관을 직접 운영하며 복서로도 활동할 만큼 운동과 주먹에 일가견이 있던 인물로 서대문지역에서 활동하더니, 나중에는 종로로 넘어와서 자기만의 주먹조직을 확보해나가고 있었다.

 

 

이렇게 1930년대 중반의 종로바닥은 십여개의 군소 주먹조직들이 할거했지만, 가장 큰 세력은 YMCA의 신마적, 우미관패의 구마적, 그리고 관철동의 김기환이렇게 3대 조직이 종로를 대표하고 있었다.

   

이처럼 1930년대 중후반 우미관을 비롯한 종로뒷골목에서 구마적과 신마적이 가장 센 오야붕으로 행세하고 있었다는데, 그 이유는 두마적의 주먹이 실제로도 가장 쎘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다른 주먹 김기환은 30년대 후반 종로술집에서 일본형사를 두드려패는 사고를 쳐서,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6년 이상 철장신세를 지게됨으로써, 그는 종로의 3대주먹 자리에서 낙오될 수밖에 없었으며, 종로는 구마적과 신마적을 중심하는 2대 주먹세력이 종로뒷골목의 헤게모니를 장악하게 된다.

 

신마적과 구마적은 스스로 실력행사를 통해서, 종로지역의 큰오야붕의 지위를 획득하게 된 것이다.

신마적은 원래 본명이 엄동욱으로, 보성전문(현 고려대학교의 전신)2년 중퇴하고 일본유학까지 갔다온 인테리형 주먹이다.

 

신마적은 종로2가에 있는 YMCA에 혈혈 단신으로 들어가서, 해학기 같은 권투부학생들과 유도부 학생등 그곳을 장악하고 있던 학생주먹들을 모두 쓰러뜨리고, 당당히 YMCA 학생부의 보스로 올라섰던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또한 신마적은 종로뒷골목에 술을 마시러왔던 경성제국대학의 일본유도부학생 10여명과 싸워 혁혁한 전과를 올림으로써, 종로의 큰오야붕으로 등극할 수 있었다고 한다.

 

구마적의 본명이 고희경으로 종로의 가장 큰 이권이었던 우미관극장과 조선극장의 기도주임(경호부장?)으로 있으면서, 공짜영화를 보러오는 건달들과 주먹들을 닥치는 데로 흠씬 두들겨패는 등 실력행사를 통해서, 스스로 종로뒷골목의 큰오야붕으로 부상할 수 있었다고 한다.

 

구마적 고희경 사진

 

또한 구마적은 힘과 완력이 무척 쎈 장사라고 한다. 구마적은 한 때 종로3가에 있는 자동차수리공장에서 일했는데, 목격자의 말에 의하면,

고장난 자동차바퀴를 교체하기 위해서, 구마적은 자동차의 앞부분을 혼자서 번쩍 들어올렸다고 하며, 다른 인부가 앞바퀴를 다 교체할 때까지, 구마적은 흔들림없이 자동차의 앞차체를 계속 들어있었다고 한다. 한마디로 말해서, 구마적은 힘이 천하장사였다고 한다.

 

이렇게 구마적과 신마적은 스스로의 힘과 주먹을 바탕으로 해서, 괄목할만한 실력을 보여줌으로써, 종로뒷골목의 건달들로부터 큰형님으로 대접받는 큰오야붕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김두한과 구마적의 싸움

 

이렇게 엄청난 관록을 자랑하는 두마적 형님들에게, 이제 겨우 17세가 된 하이틴주먹 김두한이 감히 도전장을 던지고야 말았다.

남의 밑에 있는 것을 결코 용납하지 않고 항상 최고가 되기를 바라고있었던 야심만만한 김두한이 감히 큰 오야붕에게 도전장을 던졌던 것이다.

 

김두한은 주먹치고는 머리가 잘 돌아가고 상황판단이 빠른 사람이다. 김두한은 자신이 종로의 가장 큰주먹인 구마적과 신마적을 제압하지 못한다면, 자신이 추구하는 주먹황제에의 길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잘 알고있었다.

 

우미관골목에서 소규모의 주먹조직을 만들어 거느리고 있던 17세의 김두한은 1934년도에 당당히 구마적 엄동욱에게 도전했으며, 우미관극장 앞에서 벌어진 두사람간의 싸움에서, 김두한은 발차기 단 두방을 구마적의 턱에 꽂아넣고, 깨끗하게 KO시켜버렸다고 한다.

 

힘이 천하장사였던 구마적이었지만, 기습적으로 날아온 김두한의 공중 발차기를 턱에 얻어맞고 쓰러진 구마적은 다시 일어났지만, 연이어 날아온 김두한의 두번째 발차기를 다시 턱에 맞고, 그대로 고꾸라지고는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고 한다.

 

 

김두한의 특유의 위력적인 발차기기술로 천하장사였던 구마적을 눈깜짝할 사이에 KO시켜버린 것이다.

17세의 김두한의 자신보다 12살 정도 많은 종로의 큰오야붕 구마적을 완벽하게 KO시켜버리고, 종로뒷골목의 새로운 신흥강자로 우뚝 솟아오르게 되었다.

 

김두한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튼튼한 체력과 기골이 장대한 덩치를 갖고있었다. 김두한의 키는 176cm1930년대 당시로는 상당히 큰 키에 해당하며, 다리가 특히 길어서 발차기에 능했다고 한다. 참고로 시라소니의 키는 175cm.

 

일부에서는 김두한 키를 183cm이라고 소개하고 있는데, 이것은 잘못된 정보로, 김두한이 친한친구인 김동회와 같이 찍은 사진을 보면 김두한의 키를 간접적으로 측정할 수 있다.

 

김동회의 키는 184cm인데, 김동회와 같이 찍은 사진에서 김두한은 김동회보다 한참 작게 나왔는데, 7~8cm 정도 김동회보다 작아보였다. 그러므로 김두한의 키는 176cm 전후가 확실히 맞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놓치고 있는 부분은 김두한은 단지 힘만 쎄고, 주먹만 강한 싸움꾼쯤으로 알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지만 김두한은 스피드가 무척 빠른 싸움꾼이며, 특히 김두한의 발차기기술은 거의 신기에 가깝다고 한다.

 

김두한의 싸움의 대부분은, 김두한이 자신의 신기에 가까운 발차기기술을 활용해서 강자들를 쓰러뜨렸다고 한다.

김두한을 싸움을 할 때에, 순간적으로 앞으로 치고나가면서, 그 탄력을 이용해 공중으로 도약하면서, 발차기로 상대방의 안면에 적중시켜서, 쓰러뜨린다고 한다.

 

남들보다 한박자 더 빠른 스피드와 공중으로 도약하면서 차는 발차기기술에 한번 걸리면, 왠만한 주먹들도 견디지 못하고, 그대로 쓰러지고 만다는 것이다.

김두한이 중년에 접어들었을 때에는 살이 많이 쪄서 몸무게가 90kg에 육박했지만, 20대 전후의 김두한은 매우 날씬하고 균형잡힌 몸매를 갖고 있었다고 한다.

 

김두한과 부하들

 

젊었을 때의 김두한은 무척 빠르고 날렵했으며, 싸움에서 자신의 빠른 스피드를 최대한으로 활용했는데, 싸움이 벌어지면 김두한은 눈깜짝할 사이에 상대방의 이마를 발로 걷어차서 순식간에 상대방을 KO시켜버리곤 했다고 한다.

 

전성기때의 김두한은 힘도 셌지만, 스피드도 매우 뛰어났으며, 일대일 싸움에서는 자신의 발차기기술을 사용해서, 몇초만에 싸움을 끝내버렸다고 한다. 구마적, 신마적, 마루오카 등 당대의 강자들을 김두한은 자신의 빠른 스피드와 신기에 가까운 발차기기술을 사용해서 10초 이내에 KO시켰다고 한다.

 

, 김두한은 파워와 스피드와 싸움기술의 세박자를 모두 갖추고 있는 완벽한 싸움꾼이었던 것이다.

 

구마적은 자신이 기도주임으로 있던 우미관극장에서 공짜영화를 보기위해 들어온 나이 어린 주먹들을 무참히 두들겨팼고, 밤에 몰래 들어와 극장바닥에서 잠을 자는 거지들을 두들겨패서 쫒아버리곤 했다.

이러한 일은 우미관의 기도부장으로 있던 구마적의 업무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구마적에게 흠씬 두들겨맞았던 어린 주먹들과 거지들 대부분이 김두한의 조직에 속해있던 동생들이었던 것이다.

 

김두한은 동생들을 종종 두들겨팼던 구마적을 상대로 싸움을 걸어서, 그를 쓰러뜨림으로써 동생들의 신망을 더욱 두텁게 얻고, 동시에 자신은 최고의 오야붕을 쓰러뜨린 성과를 등에 업고, 종로최고의 주먹에 한결 더 다가갈 수 있는 12조의 효과를 노렸던 것이다.

 

김두한은 당당히 태산같은 구마적 고희경을 쓰러뜨림으로써, 종로황제에의 길에 한발짝 더 다가갈 수 있게 되었다.

   

김두한과 신마적의 대결

 

그런데 그가 제압할 상대는 한사람 더 남아있었다. 그것은 구마적과 함께 종로뒷골목에서 최고주먹의 쌍두체제를 이루고있던 신마적을 극복하는 일이었다.

 

신마적 엄동욱은 YMCA 학생패의 큰형님으로써, 종종 동생들을 데리고 종로뒷골목에서 맥주를 마시곤 하였는데, 술집에서 시비를 걸어오는 건달들을 닥치는 데로 쓰러뜨리면서, 종로의 싸움꾼으로 이름을 크게 떨쳤던 인물이다.

 

신마적 엄동욱 사진

 

신마적은 일본유학시절에 배운 유도가 수준급 이상이었고, 원체 힘이 좋고 완력이 쎄서 신마적에게 한번 붙잡힌 상대는 손한번 써보지 못하고, 그대로 신마적으로부터 들어올려져 패대기쳐져, 혼절하고 만다는 것이다.

 

기본 유도를 베이스로 한 신마적의 싸움기술을 상대를 낙아채서 엄청난 완력으로 집어던지는 기술이며, 던져서 떨어지는 상대방에게 또한번의 발차기공격으로 이중의 충격을 주어서 완전 침몰시킨다고 한다. 신마적과 싸움에서는 그에게 붙잡히는 날에는 갈비뼈가 부러지거나, 완전 아작이 난다는 것이다.

 

신마적은 1930년대 중반 종로 2가 뒷골목의 맥주집에 놀러왔던 경성제국대학 출신의 일본유도부 학생패거리 10여명과 시비가 붙었다고 한다.

신마적이 종로 뒷골목의 맥주집에서 맥주를 마시고 있었을 때에, 일본유도부학생패들 10명이 그 맥주집으로 들어와서 조선여자를 농락하면서, 행패를 부렸다고 한다.

 

일본유도부 학생패들의 행패가 점점 도가 심해지자, 맥주를 마시던 신마적이 일본학생들에게 행패를 더이상 부리지말 것을 요구하면서, 시비가 붙었다고 한다.

 

일본유도부 학생패들은 자신들을 저지하는 신마적에게 욕을 퍼부으면서 시비를 걸어오자, 신마적이 이들을 맥주집 밖으로 나가자고 유인을 했으며, 맥주집밖으로 나오는 일본학생들을 차례로 집어던져서, 땅바닥에 내다 꽂았다고 한다.

 

먼저 맥주집밖으로 나간 신마적은 특유의 엄청난 괴력으로, 밖으로 나오는 일본학생들을 한사람씩 차례로 낚아채서 그대로 집어던져 내다꽂았다고 하며, 오직 혼자서만 10명의 일본학생들을 모조리 쓰러뜨렸다고 한다.

 

자주 종로뒷골목에 와서 행패를 부리곤 했던 악명놓은 일본유도부 학생들은 신마적에게 된통으로 혼나고 난 다음부터는 다시는 종로뒷골목으로 찾아오지 않았다고 한다.

 

경성제국대학의 일본유도부학생들이 신마적의 유도기술에 걸려서, 모두가 아작이 나고말았던 것이다.

이렇게 신마적이 혼자서 악명놓은 일본유도부학생 10여명을 모조리 쓰러뜨리는 것을 그곳에 있는 많은 상인들과 주먹들이 목격했다고 한다. 그후부터 신마적은 종로뒷골목의 큰오야붕으로 급부상하게 되었다고 한다.

 

종로에서 오랫동안 터주대감 노릇을 해왔던 구마적 고희경도 신마적의 실력을 인정했다고 하며, 신마적이 1909년생이고 구마적은 신마적보다 3살 많은 나이라서 두사람은 서로 자연스럽게 호형호제하면서 친하게 지냈다고 한다.

 

, 구마적과 신마적은 서로가 강자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서로가 서로의 권위를 인정해주면서, 경쟁보다는 서로 손을 잡으면서 협력관계를 맺었던 것이다.

 

구마적 고희경은 그는 종로에서 최고의 파워과 실력을 선보임으로써 마적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는데, 당시 마적은 만주지역에 사는 사람들에는 공포의 대상이었다고 한다.

 

마적(馬賊)은 쉽게 말하면, 말을 타고 다니는 도적패라는 뜻의 한자어이다. 1930년대~1940년대 당시 중국 만주지방에는 마적때가 들끓었으며, 한번 마적때가 마을을 휩쓸고 지나가면, 사람이고 짐승이고 남아나는 것이 없었다고 할 정도로 공포의 대상이었다고 한다.

 

  만주의 마적단

 

만주에서 자주 출몰했던 마적떼는 말을 타고다녀 기동력이 무척 뛰어났으며, 말을 타고 다니면서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면서, 수많은 마을과 도시들을 휩쓸고 다녔던 악명높은 도적집단들이라고 한다.

마적패들은 작게는 30명에서 많게는 수백명까지, 그 규모가 천차만별이라고 하며, 또한 마적패들은 대부분 총과 무기를 소지하고 다녔기 때문에, 더욱더 무서운 존재감이었다.

 

쉽게 이야기하면 마적은 단순한 도적패가 아니라, 무기로 중무장한 하나의 군대라고 보면 정답이다. 사실은 마적패는 원래 청나라때의 지방군벌들이라고 한다. 그러니 마적패들은 총이나 대포 같은 무기들로 중무장하고 다니는 것이다.

 

마적패는 만주지역에 주둔하고 있던 지방군벌들이었는데, 청나라가 망하고 난후 지방군벌들이 중앙정권으로부터 독립해나갔고, 이렇게 중앙정부의 통제에서 벗어난 지방군벌은 또다시 여러 소규모부대로 쪼개지게 됐다.

 

그렇게 중앙정부와 상위군벌로부터 자유로워진 소규모 지방부대원들은 더이상 중앙정부로부터 군량지원이나 급료를 받지못하게 되자, 스스로 먹고살 길을 찾아 나섰는데, 그게 바로 도적질하는 것이었다.

그렇게해서 청나라때의 지방군벌들이 청나라가 망한 후에 중무장한 도적패, 즉 마적이 된 것이다.

 

그러니까 청나라가 망하면서, 이합집산으로 흩어진 지방군벌이 중앙의 군량지원마저 끊기자 도적패로 둔갑해버린 것이다.

그러니 마적패들은 원래 군대였으니, 각종 무기들로 중무장한 상태였기 때문에, 일선의 경찰들도 이들의 상대가 되질않았다고 한다.

 

만주에서는 중무장한 마적때가 쳐들어오면 경찰이 제일 먼저 도망간다고 한다.

그리고 그마을은 완전 쑥대밭이 된다고 한다. 이렇게 중앙정부의 통제를 받지않게된 지방군벌의 일부가 마적패로 돌변해서 백성들을 괴롭혔던 것이다.

 

종로에서 무시무시한 포스를 과시했던 고희경이 자연스럽게 마적의 호칭을 얻게 되었고, 나중에 종로바닥으로 들어온 엄동욱이 고희경 몾지않은 혁혁한 전과를 올리자,

그도 마적의 호칭을 부여받게 되었는데, 사람들은 먼저 마적이 된 고희경을 구()마적, 나중에 마적의 호칭을 얻은 엄동욱을 신()마적이라고 부르게된 것이다.

 

 

이렇게 구마적과 함께 종로뒷골목에서, 큰오야붕으로 패권을 잡고있던 신마적 엄동욱에게는 구마적이 김두한에게 무너졌다는 사실은 큰 충격이었을 것이다.

 

시퍼렇게 젊은 김두한이 큰오야붕 구마적을 쓰러뜨렸다는 것은 그다음 상대는 바로 신마적 자신일 수 있기 때문이다. 신마적은 1909년생으로 그당시 17세였던 김두한보다 9살이 나 더많은 엄연한 형님뻘이다.

 

그런데 막둥이같은 김두한이 위계질서를 완전 무너뜨리고 큰형님뻘되는 구마적을 무지막지하게 패서 쓰러뜨렸으니, 김두한에게 단단히 가르침을 주어야 하는 게 신마적의 체면상 맞는 일이라고 본다.

그런데 신마적은 왠일인지 자신과 친했던 구마적을 쓰러뜨린 김두한에게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구마적이 쓰러진 지, 2년 후인 1936년도에 김두한은 마지막 남은 큰오야붕 신마적에게 당당히 도전장을 내밀었다. 

 

1936년도의 추운 겨울날 여느때처럼 신마적은 동생들을 데리고 종로뒷골목에 있는 비너스맥주집에서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신마적이 맥주집에 들어와서 동생들과 함께 맥주를 몇잔 들이키고 있을 때, 느닷없이 김두한이 문을 박차고 들어와서, 신마적 앞에 우뚝 버티고 서버렸다고 한다. 그리고 뒤따라 들어온 김두한의 동생들이 신마적일행을 빙둘러 포위해버렸다고 한다,

 

 

김두한이 신마적에게 시비를 걸고있는 것이다. 김두한은 자신보다 9살이나 더 많은 신마적에게 형님, 형님이 제 동생들을 손좀 보셨다고요, 오늘은 이 동생이 형님을 좀 때리려고 합니다!’고 당돌하게 말을 건넸다고 한다.

 

김두한이 종로의 큰오아붕 신마적에게 감히 정식 도전장을 내민 것이다. 이 말을 들은 신마적은 탁자를 뒤짚어 버리면서 노발대발했다고 한다.

 

종로의 최고의 주먹황제 자리를 꿈꾸었던 야심만만 김두한은 그동안 종로의 난다긴다하는 주먹들을 하나둘씩 재압해왔고, 2년 전에는 종로의 양대산맥 중 하나인 구마적에게 도전해 완벽한 승리를 거두었다.

 

그리고나서 자신의 주먹조직을 더욱 크게 확장해왔던 김두한은 마지막 남은 큰오야붕 신마적을 쓰러뜨리기 위해서,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런데 며칠 전 종로뒷골목에서 신마적이 자신의 동생 2명을 두들겨팼다는 소식이 들어왔으며 김두한은 드디어 기회가 왔구나 하고 회심의 미소를 지었던 것이다.

이제 자신이 종로 최고의 주먹황제가 되는 데에, 마지막 걸림돌이었던 신마적을 쓰러뜨릴 기회가 왔다고 생각한 김두한은 곧바로 신마적에게 도전장을 내민 것이다.

 

김두한은 다른 싸움꾼처럼 무턱대고 싸우는 그런 무지막지한 싸움꾼은 아니라고 한다.

김두한은 싸우기 전에 철저하게 싸움의 명분을 먼저 판단한다고 한다. , 김두한은 명분없는 싸움은 기피하고, 명분 있는 싸움을 선호한다고 한다.

 

왜냐하면 무턱대고 싸워서 상대를 제압한다면, 현재는 싸움에서 이겨서 승리를 만끽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나중에 그 패자나 그의 부하들로부터 보복을 당할 수도 있기 때문에, 싸움의 명분을 충분히 갖춘 후에 싸움으로써,

승자와 패자가 모두 싸움결과에 승복할 수 있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싸움에도 그럴싸한 명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또한 새카맣게 어린 동생이 나이가 훨씬 많은 큰형님뻘 되는 대선배님을 아무 명분이나 이유없이 때렸다고 한다면, 과연 자신을 동생들이 존경하게 신망을 보낼 수 있을까 하는 부분도 생각을 많이 한 것이다.

 

어쩌면 그래서 김두한은 구마적을 쓰러뜨린 후, 2년을 기다린 끝에 신마적에게 도전하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며칠 전에 김두한의 동생 두명이 우미관 뒷골목을 지나가던 신마적과 눈이 맞추쳤는데도 인사도 하지않게 히죽히죽 웃었다고 한다.

감히 똘마니들이 종로의 큰오야붕인 신마적을 쳐다보고 인사도 없이 웃는다는 것은 한마디로 말해서 신마적을 모욕하는 행동이다.

 

그래서 크게 화가난 신마적이 그 둘을 잡아다가 집어던져버렸다고 한다.

그런데 신마적에게 패대기를 당한 두 똘마니들은 모두 김두한의 동생들이라고 하며, 그들은 곧바로 김두한에게 달려가 고자질했던 것이다.

 

김두한은 신마적에게 동생들을 싸움에 끌어들이지 말고 11 대결을 신청했다고 한다. 또한 평소에 신마적이 호신용으로 칼 두자루를 다리춤에 끼고 다닌다는 것을 알고있는 김두한은 칼을 모두 동생들에게 맡겨놓고, 정정당당하게 맨손으로 겨루자고 제안했다고 한다.

 

실제로 신마적은 다리춤에 숨겨놓았던 단도 두자루를 꺼내서 동생에게 맡겼다고 한다.

  그리고 맥주집 밖으로 나간 김두한과 신마적은 종로의 최고의 오야붕을 가리는 역사적인 대결을 벌였다고 한다.

 

빠르고 민첩하며 싸움기술이 뛰어난 김두한과 엄청난 괴력의 장사인 신마적간의 피할 수 없는 운명적인 싸움이 벌어진 것이다.

 

 

선제공격에 나선 것은 김두한이었다. 김두한은 쏜살같이 앞으로 튀어오르더니 순식간에 오른발킥으로 신마적의 안면을 걷어차버렸다. 그리고 바닥으로 내려온 김두한은 또다시 왼발킥을 신마적의 가슴팍을 차버렸다.

 

순식간에 두 번의 발차기공격을 당한 신마적은 바닥에 쓰러졌다가 곧바로 다시 일어나서 공격자세를 취하고, 김두한의 팔을 잡으려고 다가왔다.

 

그런데 이번에도 먼저 공격한 것은 김두한이었으며, 김두한은 재빠르게 오른발로 신마적의 복부를 찍어버렸다고 한다. 그리고 또다시 이어지는 김두한의 횐발킥은 신마적의 턱을 정확하게 강타하고 지나갔다.

 

김두한의 이 네방의 킥공격으로 치명적이었으며, 천하의 싸움꾼 신마적은 마치 항공모함이 침몰하듯이 바닥으로 고꾸라지고 말았다고 한다.

수년동안 종로 뒷골목의 대표적인 주먹으로 군림해왔던 신마적은 단 한번의 제대로된 공격도 못해본 채, 김두한에게 처참하게 얻어맞고 충격적인 KO패를 당하고 말았다.

 

신마적은 자신의 주특기인 유도기술을 전혀 써보지도 못하고, 김두한의 빠르고 신속한 킥공격에 무너지고 만 것이다 

신마적은 그동안 수없이 많은 싸움을 치렀고, 그때마다 상대를 모두 제압해왔지만, 김두한은 신마적이 상대하기에는 너무도 빠르고 너무도 싸움기술이 뛰어났던 것이다.

 

신마적이 그동안 쓰러뜨렸던 상대들과 김두한은 본질적으로 차원이 달랐던 것이다. 신마적은 그동안 싸울 때마다 자신의 주특기인 잡고 집어던지기가 안통하는 상대가 없었는데, 김두한처럼 이렇게 빠른 상대는 한번도 만나보지 못했던 것이다. 그만큼 김두한은 신출귀몰하게 빨랐으며, 싸움기술이 한수 위였던 것이다.

 

신마적은 김두한에게 얻어맞고 쓰러진 후에 동생들에게 업혀서 근처에 있는 반도병원으로 후송되어 갔다고 한다.

신마적은 갈비뼈 4대가 부러졌다고 하며, 육체적인 상처도 상처지만, 자신보다 한참 어린 막내동생 같은 김두한에게 패했다 것 때문에, 마음의 상처가 더욱 컸다고 한다.

 

종로 뒷골목에서 거의 5년 동안 구마적과 더불어 종로의 주먹세계를 주름잡았던 천하의 신마적이 주먹 한번 써보지도 못하고, 동생들이 보는 앞에서 새파랗게 어린 김두한에게 만신창이가 되도록 엊어맞았으니, 세상에 이런 망신도 없는 것이다.

 

결국 김두한에게 패했다는 엄청난 상실감과 수치심에 사로잡힌 신마적은 병원에서 퇴원한 그 이듬해인 1937년 초에 곧바로 경성(서울)을 떠나버렸다고 한다.

 

김두한에게 패배한 기억을 도저히 떨쳐버릴 수 없었던 신마적 엄동욱은 동생 7명을 데리고, 병원에서 퇴원하자 마자, 곧바로 경성을 떠나서 만주 봉천으로 향했다고 한다.

신마적은 서울에서는 김두한에게 패해 대망신을 당했지만, 그가 새로이 이주했던 만주 봉천에서는 몇 개월 후에 또다른 주먹조직을 만들게 됐고, 봉천에서 제2의 주먹신화를 만들어나가게 된다.

 

   

2년전에는 구마적을 꺾고, 이제 신마적마저 꺾은 김두한은 명실상부한 종로의 최고오야붕으로 등극하게 되었다. 경성 최고의 주먹황제를 꿈꿨던 김두한의 꿈은 두명의 거물급 주먹들을 완벽히 쓰러뜨림으로써, 이제 그 꿈은 현실로 다가온 것이다.

 

김두한은 구마적과 신마적을 꺾은 후에, 자신의 주먹조직을 더욱 크게 확장시켜나가게 된다. 김두한은 우미관일대를 완전 장악한 후에, 이제는 서서히 경성(서울)의 다른 지역들로 진출해나갔으며,

왕십리, 서대문, 영등포, 마포 등의 주먹들을 제압하면서 서울의 대부분의 주요지역들을 자신의 휘하에 두게 되었고, 결국 김두한은 경성을 대표하는 거대한 주먹조직의 오야붕으로 군림하게 된다.

 

김두한은 자신이 꿈꿔왔던 조선 최고의 주먹왕국의 서막을 열게 된 것이다. 김두한은 경성의 모든 주먹조직을 접수하고 난 후에, 지방으로까지 자신의 주먹조직의 세력을 확장시켜나갔다고 한다.

 

서울근교의 수원, 용인을 필두로 대전, 전주, 광주, 대구, 심지어는 부산까지 자신의 부하주먹들을 진출시켜서, 이들 지역을 모두 자신의 휘하에 복속시켰다고 한다.

결국 김두한이 궁극적으로 꿈꿨던 것은 단순한 최고의 주먹이 아니라, 전국을 자신의 주먹조직으로 통할하는 전국구주먹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김두한이 경성의 최고주먹으로 우뚝 솟고, 전국으로 진출해나갈 즈음에, 자칫 신의주의 시라소니와 한판 대결을 펼칠 뻔한 사건이 터졌다고 한다.

바야흐로 남한 최고의 주먹 김두한 대 북한 최고의 주먹 시라소니의 역사적인 대결이 펼쳐질 뻔한 사건이 발생했다고 한다.

 

남한의 주요도시들을 대부분 손아귀에 넣은 김두한은 북한지역으로도 눈을 돌렸는데, 평양에도 동생들을 보내서 복속을 추진해서 성과를 거두었으며, 저멀리 신의주에도 동생들을 보내서 우미관에 복속하기를 독촉했다고 한다.

 

그런데 문제는 평양이나 다른 지역들은 손쉽게 복속과 협력을 이끌어냈지만, 신의주는 만만치 않았다고 한다.

 

1940년대 초경 당시 신의주에는 정팔이라는 인물이 오야붕노릇을 하고있었다. 신의주의 최고의 주먹은 누가 뭐래도 시리소니임은 더할 나워가 없다.

그런데 그당시 시라소니는 일본경찰을 두들겨패고 체포령이 내려져서 만주로 떠난 후라 신의주에는 없었고, 신의주는 시라소니의 동생뻘 되는 정팔이 시라소니를 대신해서 통치하고 있었다.

 

 

김두한은 경성최고의 주먹으로 올라서고 난 후, 남한의 대부분의 대도시를 자신의 휘하에 복속시켰고, 이제 북한의 남아있는 신의주마저 복속시키기 위해서 동생 병수와 털마진 개고기를 중심으로 일련의 주먹들을 신의주로 보냈던 것이다.

 

그런데 김두한 동생들로부터 우미관에 귀속하라는 메시지를 전달받은 신의주의 정팔은 즉답을 회피한 채, 다음에 답을 주겠다고 시간을 달라고 요구했다고 한다.

 

이렇게 신의주의 정팔이 시일을 질질 끌면서 지연작전을 쓰게 되자, 몇 달이 지나도록 답변을 못받은 김두한은 다시 수십명의 부하들로 돌격대를 편성해서 신의주로 올려보냈다고 한다.

 

그런데 우미관의 중간보스급인 병수와 털빠진 개고기를 위시로 해서, 수십명의 돌격대가 신의주의 정팔사무실로 들어서자 마자, 전혀 의외의 인물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고 한다. 바로 만주로 갔다던 시라소니가 정팔의 사무실에 딱 버티고 있었다고 한다.

 

신의주에서 오야붕노릇을 하고있던 정팔은 우미관에 복종하라는 김두한 동생들의 메시지를 받았지만, 즉답을 하지않고 버틴 것은, 바로 만주에 있던 시라소니를 믿었기 때문이다. 

일주일 후에 답장을 우미관으로 보내겠다고 거짓 약속을 한 정팔은 이렇게 시간을 벌어놓고서, 재빨리 만주 봉천으로 사람을 보내서 시라소니를 모시고 온 것이다.

 

천하의 싸움꾼 시라소니라는 든든한 백그라운드로 갖고있는 정팔은 김두한의 부하들에게 결코 항복할 수는 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김두한부하들에게는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말하고 난 후, 곧바로 만주 봉천에 가있던 시라소니를 재빨리 모셔왔던 것이다.

 

우미관의 중간보스급인 병수와 털빠진 개고기가 동생들과 함께 정팔 사무실로 들어가자, 사무실앞에 딱 버티고섰던 시라소니는 대뜸 김두한동생들에게 뭔일로 이곳에 왔냐고 물어봤다.

병수가 신의주의 우미관복속 이야기를 꺼내자, 시라소니는 앙칼진 목소리로 신의주는 자신이 관리하는 지역이며, 신의주는 그 어떤 조직에도 귀속 따위는 안한다고 일성을 내밷었다고 한다.

 

그리고 시라소니는 내말을 용인하지 못하겠다면 자신을 쓰러뜨려보라고 말했다. 시라소니는 김두한의 동생들에게 부하들을 희생시키지 말고 대표끼리 싸워서 승부를 내자고 제의를 했으며, 드디어 시라소니와 김두한 동생들간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사무실 밖으로 나온 시라소니는 쏜살같이 뛰어나가면서 그대로 병수의 이마를 들이받아 버렸고, 또한 옆에 있던 털빠진 개고기에게 오른발킥을 날려서 턱에 명중시켰다.

싸움이 시작된 지 몇초만에 시라소니의 전광석화같은 콤비플레이공격에 두명의 김두한 동생들을 그대로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그리고 다시 일어난 털빠진 개고기가 거품을 물면서 달려들자, 시라소니는 이번에는 공중으로 뛰어오르면서 공중걸이 박치기를 체중을 실어서 털빠진 개고기의 이마에 들이받아 버렸다.

 

뛰어오는 탄력을 이용해서 몸전체의 체중까지 실린 엄청난 파워의 시라소니의 공중걸이 박치기는 그 한방으로 털빠진 개고기를 그대로 실신시켜 버렸다.

그리고 다시 일어난 병수에게 시라소니의 오른손 펀치 한방이 턱에 적중되고 이어진 무릎찍기에 복부를 가격당한 병수는 신음소리도 못내고, 바닥으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눈깜짝할 사이에 두명의 사내들을 쓰러뜨린 시라소니의 눈부신 싸움실력을 본 김두한의 부하들을 더이상 싸울 기력을 잃어버리고 그대로 철수해버렸다고 한다.

   

이렇게 신의주에서 시라소니에게 된통으로 당하고 철수한 김두한의 동생들은 경성으로 돌아오자 마자, 김두한에게 이같은 사실을 알린다. 자신의 동생들이 신의주의 시라소니에게 묵사발이 될 정도로 얻어맞고 온 사실을 접한 김두한은 노발대발했다고 한다.

 

내 이런 시라소니란 촌뜨기놈을 당장 찾아가 요절을 내버려야지!’ 하면서 화가 머리끝까지 난 김두한은 곧바로 동생들을 데리고, 열차를 타고 신의주로 떠났다고 한다.

이당시 김두한은 경성(서울)을 모조리 다 장악하고 경성의 최고주먹으로 급부상해있었기 때문에, 수도 경성의 오야붕은 전국을 대표하는 오야붕의 권위를 인정받게 된다고 한다.

 

따라서 경성의 오야붕인 김두한의 동생들이 찾아오면 지방의 주먹들은 그들을 최고오야붕인 김두한에 버금가는 예로써 극진히 대접하는 게 예의라고 한다.

그런데 자신의 동생들이 만신창이가 되도록 두들겨맞고 돌아왔으니, 김두한으로서는 자신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당시는 김두한의 기세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아오르던 시절이었고 김두한에게 맞설 자는 없었던 시절이었다. 김두한은 지체없이 시라소니를 손보기 위해서, 신의주행 열차를 타고 신의주로 찾아갔다고 한다.

김두한의 몸속에는 피아노줄을 갈아서 만든 날카로운 칼한자루가 숨겨져있었다고 한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한 김두한의 호신용 칼이다.

 

그런데 김두한이 찾아간 신의주의 정팔사무실에는 시라소니는 없었으며, 신의주 그어디에도 시라소니는 없었다고 한다. 신의주에서 체포령이 내려져있는 시라소니는 김두한 동생들을 두뜰겨패고 난후, 다시 만주 봉천으로 되돌아갔던 것이다.

 

그렇지만 시라소니에 대한 복수심에 사로잡혀 있었던 김두한은 시라소니가 있다는 만주 봉천까지 찾아갔다고 한다.

그런데 봉천역에 내린 김두한일행은 그만 일본경찰의 불신검문을 당했으며, 가슴팍에 숨겨놓았던 칼이 발견되어서, 자신의 정체가 탄로난 김두한과 동생들을 일본경찰의 명령으로 다시 열차를 타고 경성으로 되돌아올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1940년대 초반 남한최고의 주먹 김두한과 북한최고의 주먹 시라소니의 역사적인 대결이 벌어질 뻔했지만, 전혀 석연찮은 이유로 인해서, 조선최고의 주먹을 가리는 두사람의 대결은 무위로 끝나버리고 말았다.

 

만일 이때 김두한과 시라소니가 실제로 만나 싸움을 벌였다면, 과연 누가 이겼을까? 이시기는 김두한도 혈기왕성한 20대 초반의 나이 때이고 시라소니도 김두한보다 2달 더 많은 20대의 나이라서 정말 볼만한 싸움이 벌어졌을 뻔했는데,

일본경찰의 불신검문 때문에, 두사람의 대결이 이뤄지지 않아서 안타까울 따름이다.

아마도 신은 최고의 주먹의 출현을 원치 않으셨나 보다!

 

그렇게 싸움이 무산되었던 김두한과 시라소니는 해방이 된 후인 1946년 초에 종로 우미관의 한술집에서 우연찮게도 다시 조우하게 되는데, 이때는 김두한이 먼저 시비를 걸어서 두사람간의 운명적인 대결이 벌어질 상황에 처했다고 한다. 

 

게시글이 너무 길어진 사정으로 인해서, 김두한과 시라소니의 대결은 다음 게시글에서 포스팅하기로 한다.

 

 

 

 

 

 

 

 

Posted by 프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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