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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대무신왕 아들 호동왕자와 낙랑공주 설화 줄거리, 자명고

 

고구려의 호동왕자와 낙랑국의 낙랑공주와의 사랑이야기는 오래전부터 구전설화로 내려오던 이야기로, 많은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아내기에 충분한 만큼, 로멘틱하고 흥미롭다.

 

그러면 정말 오래전부터 설화로서 전해져 내려왔던 호동왕자와 낙랑공주간의 사랑이야기가 실화인지, 그리고 구체적인 사연은 어떠한지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다.

 

고구려의 호동왕자와 낙랑공주의 사랑이야기는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서 큰 줄기는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그리고 고구려의 호동왕자는 낙랑공주와의 사랑을 미끼로 해서, 낙랑국을 정복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만들었다고 한다.

 

 

적국의 여자를 사랑했지만 끝내 조국을 위해서 그 사랑을 배신할 수밖에 없었던 호동왕자와 적국의 왕자와 사랑에 빠져서, 자신의 조국을 배반할 수밖에 없었던 비운의 여인 낙랑공주와의 사랑이야기는 로맨틱하면서도 너무 슬프고 가슴아픈 사연을 남기고 있어서, 많은 사람들에게 큰 감동을 안겨다주고 있다.

 

호동왕자는 고구려 3대왕인 대무신왕의 서자로서 어머니는 갈사왕의 손녀이자 대무신왕의 차비이다.

호동왕자는 인물이 잘생기고 인상이 좋아서 부친인 대무신왕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라났다고 한다.

 

그런데 대무신왕에게는 원비가 낳은 태자 해우가 있었는데, 차비의 아들인 호동과 원비의 아들인 해우 사이에 왕위계승을 둘러싸고 갈등관계가 한창 조성되고 있었다.

 

 

대무신왕의 서자인 호동왕자는 인물도 출중하고 무예가 아주 뛰어났기 때문에 대무신왕의 총애를 많이 받고 있었기에, 태자인 해우는 호동왕자에게 혹시나 후계자자리를 빼앗길까봐 노심초사하면서, 호동왕자의 약점을 잡아내는 데에 혈안이 되어있었다.

 

기원후 1세기경 고구려는 군사력을 강화시키면서, 요동지역과 압록강 중류지역의 주변 부족국가들을 차례로 복속하고 정복해가면서, 꾸준히 영토확장사업을 벌여나가고 있었다.

 

그런데 한반도 서북부 대동강의 널따란 옥토지역을 차지하고 있는 낙랑국 만큼은 정복하는 데에 번번히 실패를 거듭하고 있었다.

낙랑국은 최리라고 하는 왕이 다스리는 나라로, 드넓은 곡창지대가 펼쳐져 있고, 철이 많이 생산되고 있는 그야말로 가장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역이어서, 고구려로서는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지역이었다.

 

당시 만주지역의 신흥강국으로 떠오르고 있는 고구려가 무려 30번씩이나 낙랑국을 공격해 들어갔지만, 계속해서 패배만 거듭하고 있어서, 고구려의 대무신왕의 근심과 고민은 한없이 깊어져만 가고 있는 상황이었다.

 

 

왕의 서자로서 대무신왕의 정실인 원비와 그녀의 아들인 해우로부터 심한 견제와 괄시를 받고있는 불우한 처지에 있었던 호동왕자는, 부왕인 대무신왕의 근심을 덜어주기 위해서, 스스로 낙랑으로 들어가 염탐을 하고, (자명고)를 찢어버리겠다고 자청하고 나섰다.

 

당시 낙랑국에는 아주 특이한 북이 하나 있었는데, 국경너머에서 적국이 쳐들어오면 스스로 북이 울려서, 모든 낙랑수비대가 결집해서 총력방어를 펼칠 수 있는 시스템이 갖춰져 있었다고 한다.

북이 적국의 침입을 알아차리고 스스로 북을 울림으로써, 적국의 공격으로부터 낙랑국을 지켜낸다는 것이다.

 

이렇게 스스로 울리는 북을 자명고(自鳴鼓)’라고 하는데, 자명고가 스스로 북을 울리는 바람에 고구려는 수천, 수만의 군사가 여러차례에 걸쳐서 낙랑국에 쳐들어갔지만, 번번히 패배만 반복했다고 한다.

그러니 고구려로서는 낙랑국에 있는 북(자명고)는 반드시 제거해야 될 제거대상 1호였던 것이다.

 

고구려의 호동왕자는 부왕인 대무신왕에게 자신이 낙랑국에 들어가서, 자명고의 위치를 알아내어, 그북을 찢어버린 후에 낙랑국을 멸망시키겠다고 고하고는 곧바로 낙랑국으로 잠입해 들어갔다고 한다.

 

 

호동왕자는 고구려와 낙랑국의 중간지역에 위치한 남옥저에 이르렀을 때에, 우연찮게도 위기에 처한 한 남자를 구해주게 된다.

 

옥저와 낙랑국의 국경지역으로 지나갈 무렵에, 괴한의 습격을 받아서 큰 위기에 놓인 한 귀족남자를 호동왕자가 구해준 것이다.

호동왕자는 자신의 몸을 날려서 괴한의 쏜 화살을 스스로 맞고는, 그 남자를 위기에서 구출해주었는데, 호동왕자가 구해준 사람은 다름아닌 낙랑의 왕 최리였다고 한다.

 

우연인지 아니면, 호동왕자의 자작극인지는 뚜렷하지 않지만, 아뭏튼 호동왕자는 자신의 기지를 발휘해서, 낙랑국의 왕 최리를 위기에서 구출해줌으로써, 그의 신임을 얻어서 낙랑국의 왕궁으로 손쉽게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낙랑국왕 최리는 자신을 위기에서 구출해준 호동왕자를 낙랑국의 별궁에 머무를 수 있게 하면서, 극진히 그를 대접해 주었다고 한다. 호동왕자는 낙랑국의 진입에 성공한 후에 궁궐주변 이곳저곳을 염탐하면서, 자명고북의 위치를 찾아다녔다.

 

 

그러다가 궁궐의 외곽진 곳에서, 한여인이 활을 쏘고있는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그여인이 쏜 화살은 멀리 떨어져있는 백발백중 과녁에 정통으로 맞췄다고 한다.

 

신기할 정도로 뛰어난 활솜씨를 발휘한 그녀에게 접근한 호동왕자는 그여인에게 함께 활겨루기 하자고 청했으며, 호동왕자는 활겨루기에서 일부러 저주면서, 그녀의 환심을 사는 데에 성공하게 된다.

그녀는 바로 낙랑국왕인 최리의 딸인 낙랑공주였던 것이다 

 

그런데 자신의 정체를 의심의 눈으로 바라봤던 호위대장이 세밀하게도 호동왕자의 뒷조사를 한 끝에, 호동왕자가 고구려의 왕자라는 사실을 알아챘다고 한다. 낙랑국의 철천지 원수인 고구려의 왕자가 낙랑국을 염탐하기 위해서, 잠입해들어왔다는 사실을 모두 알아차린 그는 낙랑국왕에게 이같은 사실을 보고하였다.

 

그런데 호동왕자의 정체를 알아차린 낙랑국왕 최리는 그를 처단하지 않고, 그에게 자신의 딸 낙랑공주를 소개시켜주는 뜻밖의 행동을 했다고 한다.

 

 

이로써 낙랑국왕의 주선으로 인해서, 호동왕자와 낙랑공주는 서로 공식적인 연애를 할 수 있게 되었으며, 두사람은 이미 활쏘기시합의 인연이 있었던 만큼, 서로에 대한 뜨거운 연정을 나누는 연인관계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용모가 출중하게 잘생기고 교양이 높은 호동왕자에게 낙랑공주는 단번에 빠져버렸다고 하며, 낙랑국왕 최리의 적극적인 후원으로 두사람의 애정은 활활 타오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낙랑국왕 최리는 호동왕자가 염탐하기 위해 들어온 적국의 왕자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왜 그를 자신의 딸과 사귀도록 주선했던 것일까?

사실 그당시 낙랑국은 고구려에 비해서 군사력이 떨어지는 작은 나라였기 때문에, 낙랑국왕은 고구려와 전쟁을 지속하기 보다는 저절로 굴러들어온 고구려의 왕자를 자신의 딸과 혼인시켜서, 그를 볼모로 삼아 고구려의 침략을 저지해볼 속셈이었던 것이다.

 

고구려에서도 국왕의 왕자가 적국의 한복판에 볼모롤 잡혀있는데, 함부로 군사공격을 하기가 곤란했던 것이다. 낙랑국왕 최리는 바로 이러한 점을 노렸으며, 호동왕자를 자신의 사위로 삼고 그를 적극 활용해서, 고구려의 침략을 막는 수단으로 삼고자했던 것이다.

 

이러한 낙랑국왕의 속셈을 간파하고 있었던 호동왕자는, 낙랑공주를 자신의 방으로 불러들여서 그녀에게 사랑의 고백을 하고, 혼인을 맺자고 청혼했다고 한다.

 

호동왕자의 수려한 용모와 기품있는 모습에 홀딱 반해있던 낙랑공주는 호동왕자의 청혼을 흔쾌히 받아들였다고 하며, 두사람은 낙랑국 궁궐에서 낙랑국왕의 허락하에 혼인식을 올렸다고 한다.

그리고 혼인식을 치른 며칠 후에, 호동왕자는 자신의 부인인 된 낙랑공주에게 자신의 정체를 솔직하게 고백했다고 한다.

 

 

호동왕자는 낙랑공주에게 나는 사실은 고구려에서 염탐을 나온 고구려의 왕자라오, 나는 고구려왕으로부터 낙랑의 자명고를 찾아내서, 찢어버리라는 엄명을 받고 이곳으로 오게된 것이요라고 말하고는, 호동왕자는 부인, 만일 내가 고구려왕의 어명을 수행하지 못하고 돌아간다면, 나는 필히 죽음을 면치못할 것이요라고 말했다고 한다.

 

호동왕자는 자신이 낙랑의 자명고를 찾아 찢어버리는 공을 세우고 고구려로 돌아간다면, 큰공을 세운 댓가로 다음 보위를 이어 고구려의 왕이 될 수 있다고 말하고는, 낙랑공주로 하여금 자명고를 찢어달라고 간청했다고 한다.

호동왕자는 자신이 고구려의 왕이 된 후에는 낙랑국도 보호해주고, 낙랑공주도 자신의 정식부인으로 삼겠다고 다짐을 하면서, 낙랑공주를 설득했다고 한다.

 

낙랑공주는 호동왕자의 이같은 간청을 받고, 사랑을 택할 것인가, 아니면 조국을 택할 것인가의 기로에 서서 고민에 휩싸이게 된다. 낙랑공주 입장에서는 적국의 침략을 미리 알아차리고 북을 울려주는 자명고를 찢어버린다면, 그것은 아버지와 조국을 배신하는 행동이 된다.

 

반대로 호동왕자의 간청을 거절한다면, 호동왕자는 고구려로 돌아가버리고 자신은 그에게서 버림받게 되는 것이다.

사랑과 조국의 선택의 기로에서, 한참동안 흔들렸던 낙랑공주는 다시 정신을 가다듬고, 결국 호동왕자의 간청을 들어주기로 한다.

 

낙랑공주는 이미 호동왕자를 깊이 사랑하게 되었고, 또한 그의 아내가 된 이상, 아녀자로서 지아비의 뜻에 따르는 것이 순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고 낙랑공주는 호동왕자가 고구려로 돌아간 후에도, 낙랑국을 끝가지 보호해주겠다는 약속을 철저히 믿었던 것이다.

 

낙랑공주는 예리한 단검을 들고 몰래 자명고 앞에 다가가서, 자명고북을 산산히 찢어버렸다고 한다.

산산히 찢겨져버린 자명고북은 적국의 침략을 알려주는 북으로서의 기능을 완전 상실하고 말았다.

자명고가 찢어진 것을 확인한 호동왕자는 곧바로 고구려로 돌아왔고, 고구려의 대군을 이끌고 낙랑국으로 다시 공격해 들어갔다고 한다.

 

자명고 같은 조기경보체계가 완전 무너져버린 낙랑국은, 전혀 예상치도 못했던 고구려의 대군의 습격을 받고, 수비선이 완전 무너져버렸으며, 고구려의 대군은 승승장구하면서 진격해 들어가, 삽시간에 낙랑국의 왕성을 포위했다고 한다.

 

결국 고구려의 대군에 전면 포위당해 백척간두의 위기에 직면한 낙랑국의 왕 최리는 전의를 완전 상실했으며, 고구려에게 그대로 항복했다고 한다.

 

 

호동왕자는 서자의 신분으로서 적국에 들어가서, 자명고를 찢어버리는 수훈을 세웠을 뿐만 아니라, 낙랑국을 정복하는 데에 최고의 수훈을 세운 것이다. 낙랑국멸망에 큰공을 세운 호동왕자에 대한 대무신왕의 총애와 신임을 더욱 깊어지게 되었다.

 

이처럼 호동왕자가 대무신왕의 신임을 한몸에 받게되자, 원비는 자신의 아들이 갖고 있는 왕의 후계자자리를 혹시라도 호동왕자에게 빼앗길까봐, 호동왕자에 대한 시기와 견제가 더욱 더 깊어지게 된다.

 

원비는 대무신왕에게 호동왕자가 자신을 욕보이려고 했다는 거짓된 참소를 올렸다고 한다. 호동왕자를 한없이 시기헸던 원비는 마침내 엉뚱한 계략을 꾸며서, 호동왕자를 모함했던 것이다.

 

대무신왕은 처음에는 원비의 말을 곧이 믿으려하지 않았지만, 호동왕자가 원비의 참소에 아무런 반박을 하지않았다고 하며, 자신을 전혀 변호하려고 하지 않았다고 한다.

호동왕자는 원비의 중상모략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하지않았다고 하며, 원비의 계속된 참소에 결국 대무신왕도 그녀의 말을 믿지않을 수가 없게된 것이다.

 

왕비를 능욕했다는 죄를 뒤집어쓴 호동왕자는 큰 공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억울하게 옥사에 갇히는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호동왕자는 원비의 거짓된 모함으로 죄도 없이 옥에 갇히는 꼴이 되고야 말았지만, 끝끝내 그 어떤 해명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호동왕자가 죄없이 억울하게 모함을 받았는데도, 자신을 해명하지 않았던 것은 자신의 큰 어머니(원비)를 곤경에 빠뜨리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사서의 기록에 의하면, 호동왕자는 만일 내가 내자신에 대한 변명을 하면, 이것은 큰어머니(원비)의 악함을 세상에 드러내게 되어, 부왕께 근심을 끼치게 되는 것이므로, 이것을 어떻게 효도라고 할 수 있겠는가라고 말했다고 한다.

 

큰어머니인 원비의 모함으로 감옥에 갇혔는데도 불구하고, 강직하고 의리가 강했던 호동왕자는 끝내 자신의 무고함을 호소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감옥에 수감되었던 호동왕자는 면회를 왔던 자신의 심복으로부터 뜻밖의 소식을 전해듣게 된다.

낙랑에 다녀왔던 그의 심복으로부터, 낙랑공주가 낙랑국의 왕인 최리에 의해서, 처형당했다는 비보를 전해들었다고 한다.

 

낙랑국이 고구려의 대군에게 포위당했던 당시에, 낙랑국왕 최리는 측근으로부터 낙랑공주가 자명고를 찢어놓아았다는 사실을 전해들었다고 하며, 국문을 열어서 낙랑공주의 자백을 받았다고 한다. 자신의 딸의 배신에 대노한 낙랑국왕은 자신과 나라를 배반한 낙랑공주를 곧바로 처형했다고 한다.

 

낙랑공주는 호동왕자와의 사랑을 지키기 위해서, 자신의 조국을 배신했으며, 그 때문에 자신의 친아버지로부터 죽임을 당하고야 말았다 

감옥안에서 낙랑공주가 자신 때문에 죽임을 당했다는 소식을 전해듣게 된 호동왕자는, 그때서야 자신이 낙랑공주를 배신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양심의 가책을 크게 느끼고, 칼을 꺼내서 자결했다고 한다.

   

낙랑공주는 적국의 왕자를 사랑했기 때문에, 젊은나이에 아까운 생을 마감하게 되었고, 호동왕자는 자신 때문에 낙랑공주가 죽었다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자살하고 만 것이다.

 

서로 철천지 원수지간이었던 고구려와 낙랑국의 왕자와 공주가 서로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하게 되었고, 국적을 초월한 두사람간의 뜨거운 로맨스는 결국 두사람이 모두 죽고마는 비극으로 끝나고 말았다.

 

사랑 때문에 자신의 조국과 아버지를 배신할 수밖에 없었던 낙랑공주의 지고지순한 사랑의 마음이 너무나도 안타깝고 가엾게만 느껴진다.

 

 

자신의 조국인 고구려에게 승리를 안겨다주기 위해서, 한여인을 사랑으로 이용해먹었던 호동왕자도 결국엔 스스로 자살을 통해서 자신의 배신에 대한 댓가를 스스로 치뤘다고 볼 수 있다.

 

두 젊은 선남선녀가 당시의 정치적 암투와 전쟁 때문에, 순수한 사랑을 미치 꽃피워보지도 못하고, 젊은 나이에 억울하게 죽어버리게 되어, 너무나도 안타깝게도 애절하기만 하다.

두 사람이 젊은나이에 함께 죽었으니, 또다른 세상에 가서는 지상에서 못다 이룬 사랑의 결실을 꼭 이뤘으면 하는 바램이다.

 

우리나라의 초기 고대국가를 막 이루어나갔던 1세기경에 이렇게 뜨겁고 드러매틱한 로맨스가 전개되었다고 하니, 정말 놀라우면서도 진한 감동을 느끼게 된다.

 

 

 

 

 

 

 

 

Posted by 프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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