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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대무신왕 아들 호동왕자와 낙랑공주 설화 줄거리, 자명고

 

고구려의 호동왕자와 낙랑국의 낙랑공주와의 사랑이야기는 오래전부터 구전설화로 내려오던 이야기로, 많은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아내기에 충분한 만큼, 로멘틱하고 흥미롭다.

 

그러면 정말 오래전부터 설화로서 전해져 내려왔던 호동왕자와 낙랑공주간의 사랑이야기가 실화인지, 그리고 구체적인 사연은 어떠한지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다.

 

고구려의 호동왕자와 낙랑공주의 사랑이야기는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서 큰 줄기는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그리고 고구려의 호동왕자는 낙랑공주와의 사랑을 미끼로 해서, 낙랑국을 정복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만들었다고 한다.

 

 

적국의 여자를 사랑했지만 끝내 조국을 위해서 그 사랑을 배신할 수밖에 없었던 호동왕자와 적국의 왕자와 사랑에 빠져서, 자신의 조국을 배반할 수밖에 없었던 비운의 여인 낙랑공주와의 사랑이야기는 로맨틱하면서도 너무 슬프고 가슴아픈 사연을 남기고 있어서, 많은 사람들에게 큰 감동을 안겨다주고 있다.

 

호동왕자는 고구려 3대왕인 대무신왕의 서자로서 어머니는 갈사왕의 손녀이자 대무신왕의 차비이다.

호동왕자는 인물이 잘생기고 인상이 좋아서 부친인 대무신왕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라났다고 한다.

 

그런데 대무신왕에게는 원비가 낳은 태자 해우가 있었는데, 차비의 아들인 호동과 원비의 아들인 해우 사이에 왕위계승을 둘러싸고 갈등관계가 한창 조성되고 있었다.

 

 

대무신왕의 서자인 호동왕자는 인물도 출중하고 무예가 아주 뛰어났기 때문에 대무신왕의 총애를 많이 받고 있었기에, 태자인 해우는 호동왕자에게 혹시나 후계자자리를 빼앗길까봐 노심초사하면서, 호동왕자의 약점을 잡아내는 데에 혈안이 되어있었다.

 

기원후 1세기경 고구려는 군사력을 강화시키면서, 요동지역과 압록강 중류지역의 주변 부족국가들을 차례로 복속하고 정복해가면서, 꾸준히 영토확장사업을 벌여나가고 있었다.

 

그런데 한반도 서북부 대동강의 널따란 옥토지역을 차지하고 있는 낙랑국 만큼은 정복하는 데에 번번히 실패를 거듭하고 있었다.

낙랑국은 최리라고 하는 왕이 다스리는 나라로, 드넓은 곡창지대가 펼쳐져 있고, 철이 많이 생산되고 있는 그야말로 가장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역이어서, 고구려로서는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지역이었다.

 

당시 만주지역의 신흥강국으로 떠오르고 있는 고구려가 무려 30번씩이나 낙랑국을 공격해 들어갔지만, 계속해서 패배만 거듭하고 있어서, 고구려의 대무신왕의 근심과 고민은 한없이 깊어져만 가고 있는 상황이었다.

 

 

왕의 서자로서 대무신왕의 정실인 원비와 그녀의 아들인 해우로부터 심한 견제와 괄시를 받고있는 불우한 처지에 있었던 호동왕자는, 부왕인 대무신왕의 근심을 덜어주기 위해서, 스스로 낙랑으로 들어가 염탐을 하고, (자명고)를 찢어버리겠다고 자청하고 나섰다.

 

당시 낙랑국에는 아주 특이한 북이 하나 있었는데, 국경너머에서 적국이 쳐들어오면 스스로 북이 울려서, 모든 낙랑수비대가 결집해서 총력방어를 펼칠 수 있는 시스템이 갖춰져 있었다고 한다.

북이 적국의 침입을 알아차리고 스스로 북을 울림으로써, 적국의 공격으로부터 낙랑국을 지켜낸다는 것이다.

 

이렇게 스스로 울리는 북을 자명고(自鳴鼓)’라고 하는데, 자명고가 스스로 북을 울리는 바람에 고구려는 수천, 수만의 군사가 여러차례에 걸쳐서 낙랑국에 쳐들어갔지만, 번번히 패배만 반복했다고 한다.

그러니 고구려로서는 낙랑국에 있는 북(자명고)는 반드시 제거해야 될 제거대상 1호였던 것이다.

 

고구려의 호동왕자는 부왕인 대무신왕에게 자신이 낙랑국에 들어가서, 자명고의 위치를 알아내어, 그북을 찢어버린 후에 낙랑국을 멸망시키겠다고 고하고는 곧바로 낙랑국으로 잠입해 들어갔다고 한다.

 

 

호동왕자는 고구려와 낙랑국의 중간지역에 위치한 남옥저에 이르렀을 때에, 우연찮게도 위기에 처한 한 남자를 구해주게 된다.

 

옥저와 낙랑국의 국경지역으로 지나갈 무렵에, 괴한의 습격을 받아서 큰 위기에 놓인 한 귀족남자를 호동왕자가 구해준 것이다.

호동왕자는 자신의 몸을 날려서 괴한의 쏜 화살을 스스로 맞고는, 그 남자를 위기에서 구출해주었는데, 호동왕자가 구해준 사람은 다름아닌 낙랑의 왕 최리였다고 한다.

 

우연인지 아니면, 호동왕자의 자작극인지는 뚜렷하지 않지만, 아뭏튼 호동왕자는 자신의 기지를 발휘해서, 낙랑국의 왕 최리를 위기에서 구출해줌으로써, 그의 신임을 얻어서 낙랑국의 왕궁으로 손쉽게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낙랑국왕 최리는 자신을 위기에서 구출해준 호동왕자를 낙랑국의 별궁에 머무를 수 있게 하면서, 극진히 그를 대접해 주었다고 한다. 호동왕자는 낙랑국의 진입에 성공한 후에 궁궐주변 이곳저곳을 염탐하면서, 자명고북의 위치를 찾아다녔다.

 

 

그러다가 궁궐의 외곽진 곳에서, 한여인이 활을 쏘고있는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그여인이 쏜 화살은 멀리 떨어져있는 백발백중 과녁에 정통으로 맞췄다고 한다.

 

신기할 정도로 뛰어난 활솜씨를 발휘한 그녀에게 접근한 호동왕자는 그여인에게 함께 활겨루기 하자고 청했으며, 호동왕자는 활겨루기에서 일부러 저주면서, 그녀의 환심을 사는 데에 성공하게 된다.

그녀는 바로 낙랑국왕인 최리의 딸인 낙랑공주였던 것이다 

 

그런데 자신의 정체를 의심의 눈으로 바라봤던 호위대장이 세밀하게도 호동왕자의 뒷조사를 한 끝에, 호동왕자가 고구려의 왕자라는 사실을 알아챘다고 한다. 낙랑국의 철천지 원수인 고구려의 왕자가 낙랑국을 염탐하기 위해서, 잠입해들어왔다는 사실을 모두 알아차린 그는 낙랑국왕에게 이같은 사실을 보고하였다.

 

그런데 호동왕자의 정체를 알아차린 낙랑국왕 최리는 그를 처단하지 않고, 그에게 자신의 딸 낙랑공주를 소개시켜주는 뜻밖의 행동을 했다고 한다.

 

 

이로써 낙랑국왕의 주선으로 인해서, 호동왕자와 낙랑공주는 서로 공식적인 연애를 할 수 있게 되었으며, 두사람은 이미 활쏘기시합의 인연이 있었던 만큼, 서로에 대한 뜨거운 연정을 나누는 연인관계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용모가 출중하게 잘생기고 교양이 높은 호동왕자에게 낙랑공주는 단번에 빠져버렸다고 하며, 낙랑국왕 최리의 적극적인 후원으로 두사람의 애정은 활활 타오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낙랑국왕 최리는 호동왕자가 염탐하기 위해 들어온 적국의 왕자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왜 그를 자신의 딸과 사귀도록 주선했던 것일까?

사실 그당시 낙랑국은 고구려에 비해서 군사력이 떨어지는 작은 나라였기 때문에, 낙랑국왕은 고구려와 전쟁을 지속하기 보다는 저절로 굴러들어온 고구려의 왕자를 자신의 딸과 혼인시켜서, 그를 볼모로 삼아 고구려의 침략을 저지해볼 속셈이었던 것이다.

 

고구려에서도 국왕의 왕자가 적국의 한복판에 볼모롤 잡혀있는데, 함부로 군사공격을 하기가 곤란했던 것이다. 낙랑국왕 최리는 바로 이러한 점을 노렸으며, 호동왕자를 자신의 사위로 삼고 그를 적극 활용해서, 고구려의 침략을 막는 수단으로 삼고자했던 것이다.

 

이러한 낙랑국왕의 속셈을 간파하고 있었던 호동왕자는, 낙랑공주를 자신의 방으로 불러들여서 그녀에게 사랑의 고백을 하고, 혼인을 맺자고 청혼했다고 한다.

 

호동왕자의 수려한 용모와 기품있는 모습에 홀딱 반해있던 낙랑공주는 호동왕자의 청혼을 흔쾌히 받아들였다고 하며, 두사람은 낙랑국 궁궐에서 낙랑국왕의 허락하에 혼인식을 올렸다고 한다.

그리고 혼인식을 치른 며칠 후에, 호동왕자는 자신의 부인인 된 낙랑공주에게 자신의 정체를 솔직하게 고백했다고 한다.

 

 

호동왕자는 낙랑공주에게 나는 사실은 고구려에서 염탐을 나온 고구려의 왕자라오, 나는 고구려왕으로부터 낙랑의 자명고를 찾아내서, 찢어버리라는 엄명을 받고 이곳으로 오게된 것이요라고 말하고는, 호동왕자는 부인, 만일 내가 고구려왕의 어명을 수행하지 못하고 돌아간다면, 나는 필히 죽음을 면치못할 것이요라고 말했다고 한다.

 

호동왕자는 자신이 낙랑의 자명고를 찾아 찢어버리는 공을 세우고 고구려로 돌아간다면, 큰공을 세운 댓가로 다음 보위를 이어 고구려의 왕이 될 수 있다고 말하고는, 낙랑공주로 하여금 자명고를 찢어달라고 간청했다고 한다.

호동왕자는 자신이 고구려의 왕이 된 후에는 낙랑국도 보호해주고, 낙랑공주도 자신의 정식부인으로 삼겠다고 다짐을 하면서, 낙랑공주를 설득했다고 한다.

 

낙랑공주는 호동왕자의 이같은 간청을 받고, 사랑을 택할 것인가, 아니면 조국을 택할 것인가의 기로에 서서 고민에 휩싸이게 된다. 낙랑공주 입장에서는 적국의 침략을 미리 알아차리고 북을 울려주는 자명고를 찢어버린다면, 그것은 아버지와 조국을 배신하는 행동이 된다.

 

반대로 호동왕자의 간청을 거절한다면, 호동왕자는 고구려로 돌아가버리고 자신은 그에게서 버림받게 되는 것이다.

사랑과 조국의 선택의 기로에서, 한참동안 흔들렸던 낙랑공주는 다시 정신을 가다듬고, 결국 호동왕자의 간청을 들어주기로 한다.

 

낙랑공주는 이미 호동왕자를 깊이 사랑하게 되었고, 또한 그의 아내가 된 이상, 아녀자로서 지아비의 뜻에 따르는 것이 순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고 낙랑공주는 호동왕자가 고구려로 돌아간 후에도, 낙랑국을 끝가지 보호해주겠다는 약속을 철저히 믿었던 것이다.

 

낙랑공주는 예리한 단검을 들고 몰래 자명고 앞에 다가가서, 자명고북을 산산히 찢어버렸다고 한다.

산산히 찢겨져버린 자명고북은 적국의 침략을 알려주는 북으로서의 기능을 완전 상실하고 말았다.

자명고가 찢어진 것을 확인한 호동왕자는 곧바로 고구려로 돌아왔고, 고구려의 대군을 이끌고 낙랑국으로 다시 공격해 들어갔다고 한다.

 

자명고 같은 조기경보체계가 완전 무너져버린 낙랑국은, 전혀 예상치도 못했던 고구려의 대군의 습격을 받고, 수비선이 완전 무너져버렸으며, 고구려의 대군은 승승장구하면서 진격해 들어가, 삽시간에 낙랑국의 왕성을 포위했다고 한다.

 

결국 고구려의 대군에 전면 포위당해 백척간두의 위기에 직면한 낙랑국의 왕 최리는 전의를 완전 상실했으며, 고구려에게 그대로 항복했다고 한다.

 

 

호동왕자는 서자의 신분으로서 적국에 들어가서, 자명고를 찢어버리는 수훈을 세웠을 뿐만 아니라, 낙랑국을 정복하는 데에 최고의 수훈을 세운 것이다. 낙랑국멸망에 큰공을 세운 호동왕자에 대한 대무신왕의 총애와 신임을 더욱 깊어지게 되었다.

 

이처럼 호동왕자가 대무신왕의 신임을 한몸에 받게되자, 원비는 자신의 아들이 갖고 있는 왕의 후계자자리를 혹시라도 호동왕자에게 빼앗길까봐, 호동왕자에 대한 시기와 견제가 더욱 더 깊어지게 된다.

 

원비는 대무신왕에게 호동왕자가 자신을 욕보이려고 했다는 거짓된 참소를 올렸다고 한다. 호동왕자를 한없이 시기헸던 원비는 마침내 엉뚱한 계략을 꾸며서, 호동왕자를 모함했던 것이다.

 

대무신왕은 처음에는 원비의 말을 곧이 믿으려하지 않았지만, 호동왕자가 원비의 참소에 아무런 반박을 하지않았다고 하며, 자신을 전혀 변호하려고 하지 않았다고 한다.

호동왕자는 원비의 중상모략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하지않았다고 하며, 원비의 계속된 참소에 결국 대무신왕도 그녀의 말을 믿지않을 수가 없게된 것이다.

 

왕비를 능욕했다는 죄를 뒤집어쓴 호동왕자는 큰 공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억울하게 옥사에 갇히는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호동왕자는 원비의 거짓된 모함으로 죄도 없이 옥에 갇히는 꼴이 되고야 말았지만, 끝끝내 그 어떤 해명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호동왕자가 죄없이 억울하게 모함을 받았는데도, 자신을 해명하지 않았던 것은 자신의 큰 어머니(원비)를 곤경에 빠뜨리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사서의 기록에 의하면, 호동왕자는 만일 내가 내자신에 대한 변명을 하면, 이것은 큰어머니(원비)의 악함을 세상에 드러내게 되어, 부왕께 근심을 끼치게 되는 것이므로, 이것을 어떻게 효도라고 할 수 있겠는가라고 말했다고 한다.

 

큰어머니인 원비의 모함으로 감옥에 갇혔는데도 불구하고, 강직하고 의리가 강했던 호동왕자는 끝내 자신의 무고함을 호소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감옥에 수감되었던 호동왕자는 면회를 왔던 자신의 심복으로부터 뜻밖의 소식을 전해듣게 된다.

낙랑에 다녀왔던 그의 심복으로부터, 낙랑공주가 낙랑국의 왕인 최리에 의해서, 처형당했다는 비보를 전해들었다고 한다.

 

낙랑국이 고구려의 대군에게 포위당했던 당시에, 낙랑국왕 최리는 측근으로부터 낙랑공주가 자명고를 찢어놓아았다는 사실을 전해들었다고 하며, 국문을 열어서 낙랑공주의 자백을 받았다고 한다. 자신의 딸의 배신에 대노한 낙랑국왕은 자신과 나라를 배반한 낙랑공주를 곧바로 처형했다고 한다.

 

낙랑공주는 호동왕자와의 사랑을 지키기 위해서, 자신의 조국을 배신했으며, 그 때문에 자신의 친아버지로부터 죽임을 당하고야 말았다 

감옥안에서 낙랑공주가 자신 때문에 죽임을 당했다는 소식을 전해듣게 된 호동왕자는, 그때서야 자신이 낙랑공주를 배신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양심의 가책을 크게 느끼고, 칼을 꺼내서 자결했다고 한다.

   

낙랑공주는 적국의 왕자를 사랑했기 때문에, 젊은나이에 아까운 생을 마감하게 되었고, 호동왕자는 자신 때문에 낙랑공주가 죽었다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자살하고 만 것이다.

 

서로 철천지 원수지간이었던 고구려와 낙랑국의 왕자와 공주가 서로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하게 되었고, 국적을 초월한 두사람간의 뜨거운 로맨스는 결국 두사람이 모두 죽고마는 비극으로 끝나고 말았다.

 

사랑 때문에 자신의 조국과 아버지를 배신할 수밖에 없었던 낙랑공주의 지고지순한 사랑의 마음이 너무나도 안타깝고 가엾게만 느껴진다.

 

 

자신의 조국인 고구려에게 승리를 안겨다주기 위해서, 한여인을 사랑으로 이용해먹었던 호동왕자도 결국엔 스스로 자살을 통해서 자신의 배신에 대한 댓가를 스스로 치뤘다고 볼 수 있다.

 

두 젊은 선남선녀가 당시의 정치적 암투와 전쟁 때문에, 순수한 사랑을 미치 꽃피워보지도 못하고, 젊은 나이에 억울하게 죽어버리게 되어, 너무나도 안타깝게도 애절하기만 하다.

두 사람이 젊은나이에 함께 죽었으니, 또다른 세상에 가서는 지상에서 못다 이룬 사랑의 결실을 꼭 이뤘으면 하는 바램이다.

 

우리나라의 초기 고대국가를 막 이루어나갔던 1세기경에 이렇게 뜨겁고 드러매틱한 로맨스가 전개되었다고 하니, 정말 놀라우면서도 진한 감동을 느끼게 된다.

 

 

 

 

 

 

 

 

Posted by 프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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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시황제의 업적과 추녀 과부 청씨, 음탕한 어머니와 노애 불륜

   

어메이징스토리에서 중국천하를 최초로 통일하고 천하를 호령했던 정복군주 진시황제와 그 아들의 숨겨진 비사를 공개해서, 많은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

 

중국의 분열된 전국시대를 종결시키고 중국천하를 통일했던 진시황제는 중국최초의 통일군주로서, 중국인들의 존경을 받는 대표적인 정복군주인데, 진시황제는 자신의 무덤을 호위할 6천점의 병마용과 갱도를 만들고, 중국의 도량형을 통일하고 거대한 만리장성을 축조하는 등 여러가지 큰 업적을 쌓았던 군주로도 유명하다.

 

기원전 221년경 조나라, 한나라, 위나라, 초나라, 제나라, 연나라등 중국의 전국7웅이라고 하는 주변의 강대국들을 모두 군사력으로 제압하고, 중국역사상 최초로 통일왕국을 건설하는 위대한 업적을 쌓았던 군주가 바로 진시황제다.

 

 

진시황제는 중국을 통일한 것 외에도, 도량형을 통일하고 거대한 병마용갱도를 짓고, 만리장성을 축조하고 중국대륙의 남북을 잇는 거대한 수로를 건설하는 등 대규모 토목사업을 일으킨 것으로도 유명하다.

 

정복군주일 뿐만아니라, 건설군주로도 유명한 진시황제는 특히 거대한 크기의 화려한 아방궁을 건설한 것으로도 유명한데, 동서로 700m, 남북으로 120m에 이르는 왠만한 궁궐보다도 몇배나 더 큰 2층궁전 아방궁을 축조했는데, 중국인 70만명을 동원해서 아방궁을 지었다고 하니, 아방궁은 1만명 사람을 수용할 수 있다고 하니, 그 화려하고도 엄청난 규모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진시황이 왜 이토록 거창하고 화려한 아방궁을 지었을까? 진시황제는 중국을 통일한 후, 전국에 있는 수많은 미녀들을 모집해서, 미인들과 향략생활을 즐겼다고 하는데, 아방궁은 바로 젊은 미녀들과 향락을 즐기기 위한 그의 은밀한 내실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중국천하를 호령했던 절대군주 진시황제도 두려운 것이 하나 있었다고 한다. 점점 나이를 먹으면서 서서히 늙어갈 수밖에 없는 신체적 노화현상과 죽음에 대한 공포였다.

 

 

천하를 모두 다 가졌지만, 노화현상과 죽음만큼은 어떻게 할 수 없었던 진시황제는 영원히 불로장생을 할 수 있는 불로초를 구해올 수 있는 사람들을 모집했다고 한다.

 

진시황제는 자신이 갖고있는 최고의 권력과 부귀영화, 그리고 최고의 미인들과의 향략을 영원히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자신의 늙어가는 노화현상을 막고 젊음을 계속 유지시키기를 원했던 것이다.

 

이러한 진시황제의 야망을 간파했던 서복이라는 사람은 진시황제에게 봉래산에 가서, 불로장생할 수 있는 불로초를 구해오겠다고 자원했다고 한다.

서복의 감언이설에 넘어갔던 진시황제는 진짜 볼로초를 얻을 기대에 잔뜩 부풀어올라서, 서복에게 수많은 금은보화를 주고 어린시녀 3,000명까지 하사하면서, 그에게 불로초를 구해오도록 지시했다고 한다.

 

 

그런데 불로초를 구해오겠다고 동쪽으로 떠났던 서복은 그후 영원히 돌아오지 않았다고 한다. 서복은 불로장생을 갈망했던 진시황제를 미혹해서, 수많은 금은보화와 미녀들만 챙기고는 다른 나라로 도주해버렸던 것이다.

 

그런데 전래되어오는 소문에는 서복이 불로초를 구해오겠다고 찾아갔던 장소가 제주도 서귀포시라는 전승설화가 존재한다. 바로 서귀포서복이라는 말이 변해서 만들어진 말이라고 한다.

 

그후에도 많은 사람들이 진시황제를 찾아와서, 불로초를 구해오겠다고 진시황제를 미혹해서, 수많은 금은보화만을 챙기고 달아나버리는 사기행각이 계속 벌어졌다고 한다.

그후 진시황제는 다시는 사기행각이 일어나지 못하도록, 선불제를 후불제로 바꿔버렸으며, 약속했던 불로초를 구해오지 못하는 사람들을 모두 목을 베어버렸다고 한다.

 

 

진시황제는 중국을 통일한 후, 자신의 권력을 더욱 강화시키기 위해서, 자신의 정책에 반대하는 대신들이나 호족들을 가차없이 죽이는 등 피의 숙청작업을 계속 벌였는데, 자신을 업신여긴다는 이유를 들어서, 커다란 구덩이를 파서 학자 460명을 생매장시켜서 몰살시켰을 정도였다.

 

이러한 분서갱유는 진시황제의 포악하고 잔인한 성정을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무소불위의 절대권력을 휘둘렀던 진시황제도 한가지 콤플렉스가 있었다고 한다. 바로 진시황의 친어머니 조태후의 문란한 생활때문이었다고 한다.

진시황제의 어머니인 조태후는 음탕하고도 문란한 생활을 즐겼다고 하는데, 어머니 조태후로 인해서, 한때 진시황제는 커다란 위기에 몰리기도 했다고 한다.

 

 

진시황제의 아버지는 진나라의 30대왕인 광양왕이었으며, 진시황제의 어머니는 광양왕의 총애를 받던 기생 조희였다고 한다. 진시황 아버지 광양왕 시절부터 신하였던 승상 여불위는 자신의 첩실이었던 조희를 광양왕에게 헌납했다고 한다.

 

여불위의 애첩에서 졸지에 광양왕의 비가 된 조희는 광양왕에게 시집을 가자 마자, 진시황을 낳았던 것이며, 그러니까 진시황제의 진짜아버지는 광양왕이 아니라, 여불위였던 것이다.

 

조희가 여불위의 아들을 임신한 상태에서 광양왕의 눈에 띄여서, 광양왕의 비로 첩지를 받은 것인데, 광양왕에게 시집을 간 아후 아들 진시황을 낳았던 것이므로, 진시황은 당연히 광양왕의 뒤를 이어 왕이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이같은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된 진시황제는 자기혈통에 대한 심한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광양왕이 젊은 나이에 돌연 사망하게 되는데, 원래 뜨거운 욕정을 가슴에 품고있었던 조희(조태후)’는 광양왕이 죽자, 자신의 끓어오르는 욕정을 주체할 수가 없어서, 가짜 환관이었던 노애를 정부를 삼고는, 뜨거운 정사를 벌였다고 한다.

 

사마천이 쓴 사기의 기록에도 시황제가 장성한 후에도 어머니 조태후는 음탕함을 그치지 않았으며, 몰래 음경이 큰 노애를 자신의 정부로 삼아서 상간을 일삼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사마천이 지은 사서 사기의 기록을 살펴보면, ‘시황제가 장성한 이후에도 그 모후인 조태후는 음탕한 행동을 그치지 않았는데, 음경이 매우 큰 노애를 정부를 만들어서 수시로 상간을 일삼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진시황제가 장성한 이후에도 어머니 조태후는 자신의 정부인 노애와 음탕한 관계를 계속 벌여나갔는데, 이를 눈치채고 있었던 진시황제는 그냥 눈감아주었다고 한다.

 

 

그런데 문제는 전혀 엉뚱한 곳에서 싹트고 있었다. 진시황의 어머니 조태후는 궁궐밖에다 몰래 사가를 짓고는, 그곳에서 자신의 정부인 노애와 노골적인 정분관계를 계속 벌어나갔으며, 그리고 둘 사이에 두명의 아들까지 태어났다고 한다.

 

이미 오랜전부터 권력의 맛을 알고있었던 진시황제의 어머니 조태후는 정부 조애와 짜고서, 진시황제를 몰아내고 새로 태어난 아들을 황제로 만들 쿠테타를 모의했다고 한다.

 

친어머니가 배다른 어린 아들을 황제로 만들기 위해서, 자신의 큰아들을 제거하려는 음모를 꾸몄다니, 정말 어이가 없고 충격과 경악을 금지못할 사건이 아닐 수가 없다.

 

진시황제도 무척 잔인한 군주이지만, 그의 친어머니인 조태후도 아들 못지않게 엄청나게 잔인하고 포악한 여인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어떻게 어머니가 권력욕에 눈이 어두워 배다른 작은 아들을 황제로 세울 생각으로 큰아들을 죽일 생각을 할 수가 있겠는가?

 

 

그런데 이와같은 조태후와 노애의 음모는 사전에 모두 발각났으며, 두사람은 모두 체포되었다고 한다.

 

자신의 친어머니와 그 정부의 이같은 쿠테타음모에 충격과 분노감에 사로잡힌 진시황제는 배다른 두동생들은 즉시 참살하였고, 어머니의 정부 노애는 능지처참으로 죽였으며, 자신의 친어머니는 차마 죽일 수가 없어서, 먼곳으로 유배를 보냈다고 한다.

 

학자 460명을 갱도안에 몰아넣고 생매장시킬 정도로 포악했던 진시황제는 친어머니와의 천륜만은 저버릴 수 없었던가 보다. 진시황제는 몇 년이 지난 후에, 어머니 조태후를 다시 태후자리에 복귀시켜주었다고 한다.

   

이렇게 자신의 친어머니가 정부와 놀아나다가 자신마저 위태롭게 만든 사건이 발생한 후에, 진시황제는 어머니에 대한 콤플렉스가 더욱 심해졌다고 한다. 어머니에 대한 심한 콤플렉스에 시달렸던 진시황제는 그 이후 절대로 황후를 들이지 않았다고 한다.

 

아버지의 황후였던 어머니 조태후의 음탕한 행위에 환멸을 느껴왔던 진시황제는 아예 황후를 세우지 않고, 황후자리를 영원히 궐석으로 남겨놓았다고 한다. 

진시황제는 원래 엄청난 향략생활을 즐겼던 군주로 유명하다. 자신이 지은 궁궐보다 더 큰 아방궁에서, 중국전역에서 뽑은 1만명의 미인들을 모아놓고서 매일같이 향락의 밤을 보냈던 것으로 유명하다.

 

 

그런 진시황제였지만, 자신의 후궁중에서 간혹 황후자리를 넘보는 후궁들은 가차없이 처단해버렸다고 한다.

아무리 천하 절색의 미모를 지닌 후궁이라고 하더라도, 비어있는 황후자리를 탐내는 기색이 보이면 곧바로 처단했다고 한다.

 

그것은 어려서부터 어머니의 음탕한 생활을 보고자라면서 엄청난 마음의 상처를 받았던 진시황제였기에, 어머니 때문에 받은 심한 상처와 콤플렉스로 인해서, 황후라는 말 자체에 치를 떨었으며, 그래서 영원히 황후를 두지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그렇게도 잔인하고 포악했던 진시황제에게도 순정남이라고 불릴 만한 순수한 마음이 한구석에 자리하고 있어서 놀라움을 주고 있다. 포악한 진시황제를 순정남으로 변하게 만드는 한 여인이 있었다고 한다.

 

 

그녀는 이라고 하는 과부였는데, 남편을 일찍 여읜 그녀는 시부모님을 지극정성으로 봉양하고, 자식들을 훌륭하게 키워냈던 효부이자 열녀로 소문난 여인이었다고 한다.

 

과부 청씨는 어린나이에 시집을 와서 남편이 일찍 죽었지만, 끝까지 시부모님을 정성껏 봉양했으며, 자식들도 올바르게 교육시키는 등 끝까지 시댁식구에게 의리와 절개를 지켜왔던 소문난 열녀였다고 한다.

 

그녀의 소문을 들은 진시황제는 과부 청씨를 종종 궁궐로 초대해서, 그녀와 차를 마시면서 담소를 나누는 것을 즐겼다고 한다.

신하들에게는 그렇게 엄했던 진시황제는 과부 청씨 앞에서는 순한 양처럼 변했다고 하며, 항상 부드러운 미소와 상냥한 말투로 그녀를 극진하게 대해주었다고 한다.

 

그런데 과부 청씨는 전혀 미인이 아니었으며, 오히려 외모는 추녀라고 할만한 못생겼다고 한다.

그런데도 진시황제는 자주 과부 청씨를 궁궐로 불러서 자신이 직접 차를 끓여주면서 극진히 대접해주었다고 한다.

 

 

복잡한 국사에 머리가 아플 때나, 골치아픈 일이 발생해서 큰 스트레스를 받게되면, 진시황제는 과부 청씨를 궁궐로 초대해서, 담소를 나누면서 자신의 모든 시름을 잊을 수 있었다고 한다.

 

과부 청씨는 진시황제에게는 편안한 안식처와도 같았으며, 평생을 의리를 지키면서 수절하면서 살아온 그녀를 진시황제는 극진하게 대접해주었다고 한다.

 

진시황제 스스로는 아방궁을 짓고 수많은 후궁들과 방탕한 생활을 즐겼으면서도, 평생 절개를 지켜온 과부 청씨를 극진히 대접해주었고 하니, 정말 아이러니가 아닐 수가 없다.

과부 청씨가 보여준 굳은 절개와 극진한 효성심이 포악하기 그지없었던 진시황제의 잔인한 마음을 훈훈하게 녹여주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어쩌면 자신의 친어머니 조태후의 음탕함에 환멸을 느낀 나머지, 그 정반대되는 절개심이 강한 여성 청씨에게서 어머니에게서 받지 못한 모성애와 위안감을 느꼈기 때문일 수도 있으리라!

진시황제는 어머니에게 받은 환멸과 상처를 절개가 굳은 과부 청씨에게서 위안받고 보상받고자하는 심리였을 것으로 느껴진다.

 

진시황본기의 기록을 살펴보면, ‘청씨는 과부였지만 남들로부터 엄신여김을 당하지 않았으며, 가업을 잘 지키고 자녀들을 훌륭하게 키워서 진시황제로부터 칭찬을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진시황제가 음탕한 어머니로 인한 심한 콤플렉스를 가졌기 때문에, 더욱 더 과부 청씨의 올바른 행동을 보면서 위안을 받고자 했던 것 같다.

 

 

중국을 통일하고 천하를 호령했던 진시황제였지만, 이처럼 어머니에 대한 심한 콤플렉스에 시달렸으며, 평생 황후를 두지 않고 외로움을 가슴 한켠에 담아주면서 살아갔던 것이다.

 

진시황제는 자신이 어렵게 획득했던 절대권력을 영원히 누리기 위해서, 불로장생의 삶을 추구했지만, 어쩔 수 없는 운명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전국을 순행하는 순행길에서 쓸쓸하게 병사하고 만다.

 

그런데 진시황제의 사후에, 그의 유언장이 간특한 환관 초고의 계략에 의해서, 되바뀌어버리게 된다. 

진시황제가 환관에게 장자인 부소를 자신의 후계자로 삼으라는 유언장을 남겼지만, 환관 초고가 중간에서 유언장을 바꿔치기 해서, 26번째 아들인 호해가 다음 황제로 등극하도록 모략을 꾸몄다고 한다.

 

 

환관 초고는 진시황제의 장자가 아닌 26번째 아들이자 막내인 호해를 진시황제의 후계자로 임명했다는 가짜 유언장을 만들어서, 호해가 다음 황제로 등극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진시황제의 뒤를 이어 황제로 등극한 호해는 천하의 난봉꾼이자 어리석기 그지없는 멍청한 군주였다고 한다.

초고의 간계로 황제에 오른 호해는 정사는 돌보지 않고, 화려한 아방궁에 눌러앉아, 수많은 미녀들과 향락생활에 빠져서, 방탕한 생활을 일삼았다고 한다.

 

  진시황의 병마용  갱도

 

호해의 방탕과 무능함으로 인해서, 국고가 탕진되고 백성들의 원성이 더욱 높아지자, 다시 중국의 여러지역에서 반란이 일어났으며, 진시황제가 통일했던 진나라는 다시 분열되었고, 초나라의 공격을 받은 진나라는 기원전 207년도에 멸망하고 만다.

 

 

 

 

 

 

 

Posted by 프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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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뜰하고 저렴한 유아용품 직거래장터 중고시장, 유모차 ‘아이 베이비무료교환

 

유아용품을 살 수도 있고, 팔 수도 있는 유명한 유아용품 직거래장터가 있어서 소개해볼까 합니다.

유아용품 파는 재미도 쏠쏠하고, 유아용품 사는 재미도 쏠쏠한 그런 곳이 바로 유아용품 직거래장터인 아이 베이비입니다.

 

아이를 키우시는 주부님들, 하루가 모르게 쑥쑥 커나가는 아이들 때문에, 장난감도 사주랴, 옷도 사주랴, 돈도 많이 들고 신경 쓸 일이 여간 많은 겐 아니시죠?

 

하루가 모르게 쑥쑥 커나가는 아이들 때문에, 얼마 전에 사주었던 신발이나 옷, 그리고 유모차가 맞지않아 또다시 더 큰 옷과 신발 등을 사주어야 하는 아이들은 정말 돈먹는 하마가 아닐 수 없답니다.

 

그렇다고 발육이 좋은 아이들을 탓할 수도 없고발육이 잘되는 아이들에게 뭐든 부족함이 없이 해주고싶은 것이 부모님 마음 아니겠습니까?


  

그렇지만 하루가 모르게 계속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더 큰 옷과 더 큰 신발을 계속해서 사주어야 하기 때문에, 가계의 재정상태에 큰 부담이 되는 것은 사실이랍니다. 

어디 옷과 신발 뿐이겠습니까? 아이들에게 장난감도 사주어야 하고, 유모차도 사주어야 하고, 지능발달에 좋은 동화책이나 놀이기구도 사주어야 한답니다.

 

이것저것 아이들한테 필요한 유아용품들을 수시로 사줘야 하는데, 돈이 결코 만만치않게 드는 것이 사실이랍니다.

 

아이들을 잘 키우고 싶은 부모마음 때문에, 다양한 유아용품들을 사주고, 옷과 신발도 계속해서 새것으로 구입한다면, 아이 육아는 가계에 엄청난 부담으로 작용하게 된답니다.

 

 

그렇다고 한참 커나가는 아이들 때문에, 필요한 옷가지나 유아용품을 안사줄 수는 없는 노릇이고, 가계부담은 계속 커지게 되는데, 이렇게 아이들 유아용품 때문에 고민하시는 주부님들을에게 도움이 되는 유아용품 직거래장터가 있다고 합니다.

 

바로 아이 베이비라고 하는 유아용품 직거래장터라고 합니다.

이 유아용품 직거래장터 아이 베이비에는 매일같이 아이들에게 필요한 유아용품들이 산더미처럼 올라오고 있답니다.

 

이이들에게 필요한 유아용품을 중고로 저렴하게 살 수 있는 중고유아용품 직거래 장터입니다.

 

 

한참 자라나는 아이들은 금방 몸이 커져버려 몇개월 입지도 못하고, 또다시 더 큰 옷가지나 신발을 사주어야 하는데, 굳이 값비싼 새옷과 새신발을 사줄 필요는 없지요. 몇 개월 지나면 또다시 못쓰는 옷가지가 되어버릴 테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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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 다른 주부들이 올린 중고 유아용품이기 때문에, 값이 매우 저렴하고 몇 개월 쓰지 않은 것들도 많아서, 새것처럼 깨끗하고 온전한 유아용품들이 많이 있답니다.

더욱이 아이를 키우는 같은 주부님들끼리 유아용품을 거래하기 때문에, 서로간 육아에 필요한 정보도 교환할 수 있어서 더욱 좋은 점이 많답니다.

 

 

 

중고유아용품 직거래장인 아이 베이비에서는 아이들 육아에 필요한 거의 모든 유아용품들이 다양하게 올라오고 있지요.

 

0~3세까지의 신생아 및 영유아 의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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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세 이상의 초등 남자아이 의류

8세 이상의 초등 여자아이 의류

유아용 신발, 가방, 모자류

유아용 장난감, 놀이기구

유모차

 

그리고 아이 베이비에는 장남감, 아이들 지능발달도서와 놀이기구, 가방잡화, 기저귀와 분유, 수유용품, 또한 유모차도 진열되어 있습니다. 

중고유아용품 직거래장터 아이 베이비에는 신생아에서부터 초등학교 아동까지 육아와 양육에 필요한 모든 필용한 용품들이 총 집결해있다고 보시면 된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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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선택한 유아용품을 택배로 받아볼 수 있답니다.

 

이곳에는 아이들 육아에 필요한 옷가지, 가방, 모자, 장난감 등 정말 없는 게 없고, 모든 것이 거의 다 있을 정도인데, 매일같이 수시로 유아용품들이 올라오고 있어서, 마치 중고유아용품 종합백화점을 방불케할 정도랍니다. 가격도 중고용품이니 당연히 저렴하고 착한 가격이랍니다.

 

유아용품 직거래장터 아이 베이비의 또다른 좋은 점은 현재 내 아이가 쓰고 있는 옷가지나 모자 등 유아용품이 필요없어질 때에는, 이곳에서 다시 판매할 수가 있다는 점입니다.

금년에 산 우리 아이 옷이나 신발이 해가 지나서 작아서 못입게 되면, 다시 유아용품 직거래장터인 아이 베이비에서 판매할 수가 있다는 점이지요.

 

아이가 커서 못쓰게 된 옷이나 유아용품을 그냥 버릴 게 아니라, ‘아이 베이비에서 다시 판매함으로써, 돈도 벌 수 있다는 장점이 있어서 더욱 좋습니다.

 

 

만약에 아이가 사용하던 유모차를 그냥 버릴 경우에는 부피가 커서 동사무소에 돈주고 버려야 하지요. 그런데 이렇게 더 이상 필요없어진 유모차이지만, 신생아를 낳은 다른 주부님에겐 필요한 유아용품이 되기 때문에, 돈 주고 버릴 게 아니라, 적당한 가격을 붙여서 직거래장터인 아이 베이비에서 판매하면 오히려 돈을 벌 수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직거래장터 아이 베이비에서 번 돈을 가지고, 내 아이에 필요한 옷이나 유아용품이나 주방기구들 구입하는 데 쓸 수 있기 때문에, 가계재정에도 적지않은 도움을 얻으실 수 있습니다.

 

아이 베이비는 내 아이에 필요한 유아용품을 저렴한 가격에 구입할 수 있어서 좋고, 또한 불필요해진 유아용품을 처분해서 돈도 벌 수 있으니, 이야말로 일석이조의 효과를 볼 수 있는 곳이랍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번 유아용품 직거래장터인 아이 베이비에 발을 들여놓으신 주부님은 사는 재미, 파는 재미에 쏙 빠져서, 계속해서 아이 베이비를 활용하시게 된다고 합니다.

 

내가 갖고있는 유아용품을 판매할 경우에는 편의점택배를 이용해서 손쉽게 배송처리할 수 있습니다. 요즘 동네마다 편의점들이 많이 있는데, 편의점들마다 편의점택배를 운영하고 있으며 택배비용도 일반택배보다 저렴한 편이랍니다.

 

그리고 아이 베이비에서는 편의점택배를 이용하시는 분들에게 마일리지점수를 부여하고 있어서, 이 마일리지가 쌓이면 경제적인 혜택도 얻으실 수 있어서 더욱 좋지요!

 

 

아이 베이비에 파는 물건들이 너무 많아서 내가 내놓은 유아용품이 잘 안팔린다면, ‘빨리 팔고 싶어요팁을 이용하시면 내물건을 빨리 파실 수 있습니다. 아이 베이비에서 마일리지점수를 벌어서, 그 점수로 빨리 팔고 싶어요팁을 이용하는 비용으로 충당하시면 된답니다.

 

빨리 팔고 싶어요팁을 이용하면, 내 상품이 유아용품 판매페이지의 최상단에 큰 이미지로 노출되기 때문에, 많은 방문자들의 눈에 쉽게 띠여서, 내 상품을 더빨리 판매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아이 베이비에는 유아용품만 있는 게 아니랍니다. 엄마들이 사용할 수 있는 성인용 의료와 가방, 성인용 구두와 신발, 그리고 주방용품 등도 거래할 수 있습니다.

엄마용 10,000원짜리 구두도 있으며, 아빠용 옷과 신발도 거래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이처럼 아이 베이비에서는 유아용품을 비롯해서, 엄마와 아빠용 중고용품과 그리고 육아나 출산, 주방용 중고용품들이 다양하게 구비되고 있기 때문에, 주부님들에게 매우 유용한 생활장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내 집안을 샅샅이 뒤져보세요! 아마 쓰다가 보관한 유아용품, 그리고 주방용품이나 갖가지 생활용품들이 한박스 이상 나올 수 있습니다. 이것들을 그냥 방치할 게 아니라, 중고용품거래장터인 아이 베이비에다 판매등록을 해보세요!

 

필요한 유아용품도 싸게 구입할 수 있고, 불필요해진 유아용품도 판매해서 돈도 벌 수 있는 아이 베이비를 잘 활용하셔서, 지혜롭고 알뜰한 주부님이 되세요!

 

 

아이 베이비 사용방법

 

아이 베이비에 접속 -‘직거래장에 들어가서 필요한 카테고리를 찾아서 물품을 구입하면 된다.

만일 내물건을 팔고 싶다면 직거래장에 들어가서, ‘팝니다 물품등록을 하면, 내물건을 팔 수가 있다.

 

아이 베이비에서 물건을 사고 싶다면, ‘직거래장의 카테고리에서 필요한 물건을 찾아서 살 수가 있습니다.

만일 직거래장의 카테고리에서 내가 원하는 물건이 없다면, ‘직거래장삽니다물품등록을 눌러서, 내가 필요한 물품을 등록하시면, 판매자가 언제가는 그 물건을 올리게 되며, 그때 그 물건을 사면 된답니다

 

 

 

 

 

 

Posted by 프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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