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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 이산과 홍국영의 관계, 홍국영과 효의왕후, 세도정치와 반란

 

1762년 영조의 아들이자 세자였던 사도세자가 죽음을 당하고, 그의 아들인 정조가 영조의 뒤를 이어서 조선의 제22대 임금으로 등극했다.

 

정조는 영조의 뒤를 이어 임금이 되고 난 후에, 특별히 홍국영을 신뢰했고, 그에게 높은 관직을 하사해서 자신의 주변에 두었다고 한다.

 

정조는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죽음으로 인해서, 죄인의 아들이라는 멍에를 쓰게 되었고, 새손 시절부터 제대로 세손대접을 받지 못했는데, 홍국영은 이런 정조에게 보호막이 되어주고, 여러가지로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정조는 자신이 세손으로 있던 시절에 정치적 입지가 약했는데, 자신을 물신양면으로 돕던 홍국영에게 많이 의지를 했다고 한다.

 

홍국영 초상화

 

세손이던 시절 이산(정조)은 한밤중에 자객이 침투하여, 죽을 뻔한 위기에 처했다고 한다. 이산의 아버지인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고갔던 반대세력인 정후겸과 홍인한의 무리들이 돈으로 매수한 자객을 보내서, 이산의 암살을 기도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조선왕조실록의 영조실록에도 정후겸, 홍인한의 무리들이 돈으로 매수한 자객을 들여보냈다는 기록이 있다. 세손 이산을 옆에서 보좌하던 홍국영은 이산(정조)을 죽이기 위해 침입한 자객을 체포해서, 이산을 구해주었다고 한다.

 

 

이때부터 이산(정조)는 홍국영을 무척 신임하게 되었고, 나중에 왕이 되고난 후에도 홍국영에게 높은 벼슬을 주어서, 자신의 주변에 두고 의지했다고 한다. 

여러 사서에는 정조가 세손시절부터, 홍국영이 이산(정조)의 오른팔 또는 오른날개였다고 기록되어 있을 정도로, 이산(정조)와 홍국영은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고 한다.

 

 

결국 정조는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1776년 영조가 사망하자 조선의 제22국왕으로 등극할 수 있었다.

정조는 왕이 되자 마자, 두가지 일을 먼저 처리하는데, 하나는 자신의 즉위를 방해했던 반대세력을 척결하는 것이었고, 또하나는 세손시절부터 자신을 물신양면으로 도왔던 홍국영에게 벼슬을 내리는 것이었다.

 

정조는 임금으로 즉위한 후, 자신의 아버지를 죽게 만든 신하들과 자신의 즉위를 방해했던 반대세력들을 차례차례 숙청해나갔다.

왕이된 정조는 정적이었던 홍인한, 점후겸일당을 숙청하였고, 또한 정조는 자신의 즉위를 도왔던 홍국영을 1등공신을 책봉해서, 그에게 많은 벼슬을 하사했다고 한다.

 

정조는 도승지, 대사헌, 이조참판, 금위대장 등 홍국영에게 막강한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여러개의 벼슬을 내렸는데, 정조의 든든한 후광을 등에 업은 홍국영은 젊은 나이에 조선의 최고의 실세로 떠오르게 된다.

 

 

조선왕조실록의 정조실록의 기록을 보면, 홍국영은 군사권을 손에 쥐고, 정조를 호위하며 많은 것을 결정했으며, 모든 관리들이 그가 시키는 데로 했다고 한다.

정조의 신임이 두터워지면서, 자연스레 홍국영은 최고의 실세로 우뚝 솟아올랐고, 이른바 홍국영의 세도정치가 전개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홍국영이 최고의 실세가 되어, 거침없이 권력을 펼쳐나갈 즈음에, 새로운 갈등요인이 발생하게 된다.

 

정조의 즉위 이후, 권력이 막강해진 홍국영은 자신의 누이동생인 홍씨를 정조의 원빈으로 만드는데 성공했는데, 이것은 그당시 홍국영의 권세가 얼마나 컸었는지를 가늠해줄 수 있는 바로미터나 다름없다.

 

홍국영은 자신의 누이동생을 왕의 후궁으로 만들어, 왕과 인척관계를 형성하면서, 그의 권력을 더욱 강력해지고 공고화된다.

또한 홍국영은 왕의 경호를 책임지는 금위대장이 되어서, 궁궐내 숙위소에 머물면서, 인사, 행정, 군사 등 모든 정사를 독단적으로 처리함으로써, 여러 가지 불협화음이 발생하게 된다

 

 

이제 나이 30밖에 안된 젊은이가 왕의 경호실잘과 비서실장을 겸직하는 직무를 맡았지만, 실제로 홍국영은 영의정급 이상의 권력을 휘둘렀으니, 다른 대신들의 반발과 정적들을 양산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할 수밖에 없었다.

 

홍국영 1인에게로 쏠리는 지나친 권력집중과 권력남용은 결국 정조와 효의왕후에게도 갈등을 안겨다주는 요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홍국영의 권력이 비대해지자, 정조의 정비인 효의왕후가 홍국영의 지나친 권력남용을 견제하였고, 이로써 홍국영과 효의왕후 사이에 갈등과 반목이 발생하게 된다.

더욱이 홍국영이 자신의 누이동생 홍씨를 정조의 원빈으로 만드는데 성공하자, 홍국영과 효의왕후 사이의 반목은 더욱 커지게 된다.

 

 

홍국영은 자신의 누이동생을 이용해서, 자신이 획득한 권력을 더욱 공고히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런데 홍국영의 이런 바램과는 달리, 원빈 홍씨는 원빈으로 책봉된 지 1년 만에 병으로 사망하고 만다.

 

자신의 여동생 원빈 홍씨가 1년 만에 사망하자, 홍국영은 여동생이 독살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고, 자신의 여동생을 효의왕후가 죽였다고 오해를 하게된다.

그렇지 않아도 평소에 반목하고 있었던 홍국영과 효의왕후는, 원빈 홍씨의 죽음 때문에 더욱 갈등이 심해지게 되고, 결국 홍국영은 효의왕후를 죽이려는 계략을 꾸미게 된다.

 

 

홍국영은 효의왕후(정종의 비)가 자신의 여동생을 독살했을 것으로 의심하고, 효의왕후의 음식에 독약을 넣어서 효의왕후를 독살하려고 시도했으나, 결국 실패로 끝났다고

한다.

정조실록의 기록에도 홍국영이 중전(효의왕후)을 죽이려고, 역모하였다고 분명히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홍국영에 대한 정조의 신임이 얼마나 컸던지, 정조는 홍국영의 중전독살 음모를 반대세력이 꾸며낸 정치적 모함으로 생각하였고, 홍국영을 전혀 치죄하거나 국문하지도 않았다고 한다.

그만큼 당시 정조의 홍국영에 대한 신뢰가 엄청나게 컷다는 것을 알 수가 있는 대목이다.

 

또한 홍국영은 정조의 재가를 받아서, 은언군 아들 완풍군을 죽은 원빈의 양자로 입적시켰는데, 완풍군을 죽은 원빈의 양자로 삼은 것은, 완풍군이라는 왕족을 자신의 조카로 만들어서 자신의 권력을 더욱 강화시켜나갈 의도라고 풀이된다.

 

홍국영은 죽은 원빈의 양자를 왕자로 만들어서, 자신의 권력을 영원히 유지해나가려고 의도했던 것이다.

 

 

1979년 어느날 홍국영은 일생일대의 치명적인 실수를 했으며, 그것으로 인해서 정조의 신뢰를 완전 잃어버리게 된다.

홍국영은 기생을 끼고 술은 마시던 술자리에서, 느닷없이 정조를 토끼로 비하하는 망언을 일삼았다고 한다.

 

홍국영은 술자리에서 자신이 어린 토끼 한마리를 키웠는데, 그 토끼는 자신의 말을 너무도 잘 듣는다고 말하고는, 자신이 언제가 이 토기를 제거하고 새로운 토끼를 세워서, 자신이 천하를 호령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홍국영은 놀랍게도 정조를 언젠가는 제거해야할 토끼로 바하하는 발언을 했으며, 이말은 곧바로 정조의 귀에 들어가게 된다. 이것으로 인해서, 오랫동안 홍국영을 굳게 신임해왔던 정조는 드디어 홍국영에 대한 믿음을 거둬들이게 된다.

 

홍국영은 정조가 자신에게 무한한 신뢰를 갖고 총애해주었는데도 불구하고, 왕의 신뢰를 고맙게 생각했던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정조를 최대한 이용해먹을 생각만 하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정조의 신임이 커지면 커질수록, 홍국영의 야망은 더욱 커져만 갔고, 정조의 후광이 커지면서 홍국영은 점점 안하무인격으로 되어버려,

권력을 독단하고 전횡을 일삼았으며, 너무 기고만장해진 홍국영은 결코 넘어서는 안될 선까지 넘게된 것이다.

 

왕의 신임을 역이용해서, 왕의 머리꼭대기까지 올라가려고 했던 홍국영은 결국 철퇴를 맞고 한없이 추락하고 만다. 

홍국영의 최후에 관해서, 그의 최후가 얼마나 비참했는지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궁금증을 갖고있다.

 

1779년도에 홍국영은 모든 관직에서 은퇴하는 상소를 올렸다고 하며, 정조는 홍국영의 사퇴를 반려하지않고 곧바로 윤허했다고 한다.

, 정조가 홍국영의 정계은퇴를 곧바로 수용했다는 것은, 홍국영의 은퇴상소가 바로 정조의 뜻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조에게 큰 약점을 잡혔던 홍국영에게, 정조가 관직에서 물러나서 은둔해서 살아가라는 밀명을 내렸다고 볼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절대적으로 신임했던 홍국영의 은퇴상소를, 그렇게 빨리 받아들였을 리가 만무한 것이다.

 

 

한중록정조대왕행장의 기록에도, 홍국영의 은퇴상소는 곧 정조의 뜻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그리고 홍국영이 은퇴한 이후에도, 다른 대신들의 홍국영 탄핵상소가 봇물처럼 올라왔다고 한다.

홍국영이 그동안 권력을 독단하고 전횡을 일삼아서, 많은 폐단을 낳았던 것을 성토하는 탄핵상소들이 계속해서 올라왔다고 하며, 1880년 홍국영은 강원도 강릉으로 유폐되어버리고 만다.

 

그리고 홍국영은 1881년 강릉의 유배지에서, 34살의 젊은나이에 병으로 사망하고 만다.

하늘을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엄청난 세도정치를 일삼았던 홍국영은 유배지로 쫒져가고 난 뒤, 정신적 충격이 얼마나 컸던지, 원인모를 병으로 사망하고 만다. 

 

홍국영의 권세가 얼마나 높았던지, ‘세도정치라는 말이 바로 홍국영 때문에 만들어졌다고 한다.

 

 

그렇지만 홍국영이 실질적으로 권력을 누린 기간은 고작 4년밖에 안되며, 이것은 홍국영의 권력기반이 생각했던 것보다는 훨씬 취약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으며,

그의 지나친 독선이 결국 자신을 신뢰하던 정조와 등을 지게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홍국영의 지나친 독선적인 성격이 결국 자기스스로를 무너뜨렸던 것이다.

 

홍국영은 정조로부터 절대적인 신임을 받았었는데, 자신의 독선을 조금만이라도 누그러뜨렸다면 평생 정조와 동거동락하면서,

이상적인 조선사회의 건설을 함께 추구하고 누려나갈 수도 있었을 텐데, 그의 지나친 독선과 야망 때문에 스스로의 발목을 잡은 꼴이 되고야 말았다.

 

정조와 홍국영의 관계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한사람에게 너무 많은 권력이나 권한이 집중되게 되면, 오히려 그사람의 독선과 야망을 부채질하게 되어서, 종국에는 그 사람을 추락시키는 요인이 된다고 하는 교훈을 얻을 수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예로부터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는 말이 나온 것인데, ‘너무 지나친 것은 오히려 부족함만 못하다라는 뜻인데, 너무 지나쳐서 잔을 넘쳐 흐르는 것보다는, 차라리 약간 모자른 것이 오히려 더 낫다는 그런 의미이다.

 

홍국영이 왕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았더라도, 자신이 스스로 절제하고 자세를 조금만 낮추었더라면, 그렇게 비참한 최후를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 평생 정조의 곁에서 머무르면서, 정조와 함께 이상적인 조선사회를 만들어나갔을 지도 모른다.

 

정조 때가 조선이 근대화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는데, 영특한 임금이었던 정조에게 그의 개혁정치를 뒷받침해줄 만한 신하들이 없었기 때문에, 결국 정조때도 근대화의 기회를 잃어버리게 되고, 종국에는 조선은 부국강병을 이루지 못해서,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해버리고 만 것이다.

 

정조의 개혁정치를 뒷받침해줄 만한 우수한 신하들이 없었다는 것이 너무도 안타까울 따름이다.

 

 

 

 

 

 

 

Posted by 프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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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최고의 미인 양귀비 죽음의 비밀, 당현종, 자살 일본망명설

 

양귀비 (719~ 756년)

 

당나라시절 최고의 미인이라고 일컬어지던 양귀비는 중국의 대표적인 미인으로 손꼽히는 여인이다. 왕의 마음까지 온통 사로잡아서, 나라까지 위태롭게 만들 정도로 그 미색이 뛰어나다고 해서,

양귀비를 경국지색의 미인이라는 평가가 있을 정도인데, 양귀비는 서시, 초선, 왕소군과 함께 중국의 4대 미인이라고 부르고 있다.

 

양귀비는 당나라 6대황제인 현종의 눈에 들어서, 단번에 후궁중 최고의 서열인 귀비에 책봉되었고, 오랫동안 당현종의 아낌없는 총애를 받았다고 한다.

 

오죽하면 당나라황제인 현종이 정사를 제대로 돌보지 않고, 온종일 양귀비의 치마폭에 빠져있었을 정도로, 절색의 미모를 간직하고 있는 양귀비는 현종의 마음을 완전 사로잡아버리고 만다.

 

양귀비 초상화

 

그런데 당 현종의 총애를 한몸에 받았던 양귀비가 원래는 현종의 아들의 비 즉, 며느리였다고 해서 큰 놀라움을 주고 있다.

 

당현종이 절색의 미인이라는 소문이 자자한 자신의 18번째 아들(소왕)의 부인 양옥환(양귀비)의 미모를 보고, 첫눈에 홀딱 반해서 그만 상사병에 걸릴 정도로 그녀를 마음속으로 좋아했다고 한다.

 

미색을 엄청 밝혔던 현종이 자신의 18번째 며느리(양귀비) 때문에, 마음속으로 가슴앓이를 했다는 웃지못할 사연이 전해지고 있다.

 

 

이미 마음속으로 홀딱 반했으니, 그녀(양귀비)를 어떻게든 자신의 여인으로 만들어겠는데, 불행히도 그 여인(양귀비)이 자신의 18번째 아들의 비였다는 것이다.

 

양옥환(양귀비)를 끝내 마음속에서 지우지못하고 있던 현종은 양귀비를 차지하기 위한 음모를 꾸민다. 양옥환(양귀비)에게 말도 안되는 불경의 죄를 뒤집어씌워서, 그녀를 비구니로 만들어서 절에다 유폐시켜버렸다고 한다.

 

현종은 양옥환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아들(소왕)과 양옥환(양귀비)를 떼어놓는 것이 순서라고 생각하고, 죄도 없는 양옥환(양귀비)을 거짓죄의 누명을 씌워서 비구니로 만들고, 절에다 유폐시켜놓고서, 아들과 떼어놓는 데에 성공했다.

 

양옥환(양귀비)은 현종의 모략에 휘말려서, 죄도 없이 소왕의 비에서 폐위된 후, 비구니가 되어서 절에서 살아가게 되었는데, 몇 년 후 세상이 잠잠해지고 난후 현종은 그녀를 몰래 궁궐로 데려와서, 자신의 귀비로 삼았다고 한다.

 

 

중국의 사서 신당서에는 당나라 현종이 자신의 아들 소왕의 아내 양옥환(양귀비)을 빼앗았고, 수왕에게는 다른 여인인 위씨를 소개시켜 줬다고 명문으로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27세의 나이에 당현종의 귀비로 책봉된 양귀비는, 도대체 얼마나 그 미색이 뛰어나길래, 자신의 시아버지인 현종의 마음을 완전 사로잡아버렸던 것일까?

 

중국의 정사에는 양귀비의 미모를 자질풍염(資質豊艷)’이라고 표현했는데, 양귀비는 얼굴이 동글동글하면서 통통하게 생긴 풍만한 미인이라는 의미이다. , 양귀비는 지금처럼 날씬하고 갸름한 미인이 아니라, 통통하고 풍만한 몸매의 미인이었다는 것이다.

 

지금의 시점에서 볼 때에 양귀비는 미인소리를 듣기가 힘들 수도 있지만, 당시 동아시아에서 최고의 절대귄력을 행사하던 황제의 마음을 사로잡을 정도였으니, 양귀비는 통통한 스타일의 8세기형 미인이었다고 보여진다.

 

 

양귀비는 745년에 현종의 귀비로 책봉되어서, 현종의 총애를 받으면서 온갖 호사를 다 누리고 지냈다고 한다. 그런데 그렇게 절색의 빼어난 미모를 타고난 양귀비에게도, 남에게 말못할 부끄러운 비밀이 하나 있었다고 한다.

 

경국지색의 미인에게도 치명적인 약점이 하나 있었다고 하는데, 그것은 놀랍게도 양귀비의 겨드랑이에서 나는 암내였다고 한다.

 

중국최고의 미인이라고 일컬어지던 천하의 양귀비에게 암내라고 하는 역한 냄새가 났다고 하니, 정말 믿기가 힘든 상황이 아닐 수가 없다. 양귀비의 암내가 얼마나 심했는가 하면, 양귀비의 목욕을 담당하던 궁녀들이 수시로 교체되었다고 한다.

 

 

양귀비의 겨드랑이에서 나는 암내는 엄청 역한 냄새였다고 하며, 보통 사람이 양귀비의 암내를 맡으면, 헛구역질이 날 정도였다고 한다. 

중국의 야사 기록에 따르면, 양귀비는 암내가 심해서 하루에도 5~6번씩 목욕을 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양귀비는 당대 최고의 미인답게 자신의 약점인 암내가 나는 것을 철저히 숨겼다고 하며, 소문을 내는 궁녀들은 가차없이 죽였다고 한다.

양귀비의 목욕을 담당하는 궁녀가 양귀비의 심한 암내 때문에, 놀라거나, 격한 반응을 보일 경우에도, 양귀비는 그 궁녀들을 죽이거나 교체해버렸다고 한다.

 

그렇다면 한가지 의문점이 생기는데, 궁녀들도 냄새를 맡으면, 헛구역질을 할 정도로 심한 암내를 현종은 어떻게 참았던 것일까?

 

다행스럽게도 현종은 코에 심한 축농증이 있어서 냄새를 잘 맡지못했다고 한다. 축농증 때문에 항상 코가 막혀있었던 현종은, 양귀비의 역겨운 암내를 전혀 맡을 수 없었다고 하니, 두사람은 정말 천생연분이 아닐 수가 없는 것이다.

 

 

 

한쪽은 심한 악취를 풍기고, 다른 상대방은 코가 막혀서 악취를 맡을 수가 없으니, 이보다 더 잘맞는 천생연분이 또 있을까? 양귀비는 자신의 암내를 숨기기 위해서, 항상 몸에 진한 향수를 뿌리고 다녔다고 한다.

 

천하일색 양귀비에게 이런 약점이 있다고 하니, 믿어지지 않지만, 중국 역사서에 기록되어 있으니, 사실로 받아들여야 할 것 같다.

 

양귀비는 귀비로 있는 동안에 현종으로부터 최고의 사랑과 총애를 독차지 했을뿐만아니라, 정사에도 깊이 관여해서 국사를 흐트려 놓았다고 한다. 양귀비를 몹시도 총애하였던 현종은 양귀비의 간청을 받아들여, 양귀비의 오빠 양국충에게 큰 벼슬을 내려서, 국사를 담당하게 했다고 한다.

 

 

양귀비의 6촌오빠인 양국충은 양귀비의 후광을 등에 업고, 감찰어사가 되어서 막강한 권력을 휘둘러서 국정을 문란케 만들었으며, 나중에는 재상의 자리에 올라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

 

현종의 든든한 후광을 등에 업은 양귀비와 양국충의 권력남용과 부패정치로 인해서, 민생은 도탄에 빠지게 되었고 백성들의 원성이 크게 높아지자, 평소에 양국충의 전횡과 횡포에 불만을 품어왔던 안록산이 양국충과 양귀비타도를 기치로 해서 반란을 일으키게 된다.

 

수많은 지방세력들을 규합해서 처들어온 안록산의 기세가 매우 강성해서, 현종은 촉나라 부근까지 피난가게 되었다고 한다.

 

촉나라 부근의 성도까지 피난간 당나라 조정대신들과 장수들은 반란이 일어난 근본적인 원인은, 황제의 총애를 등에 업은 양귀비와 양국충의 부패정치에 있다고 보고, 나라를 어지럽힌 책임을 물어서, 양국충은 살해하고 양귀비는 자살토록 조치하였다.

 

일본과 중국에 있는 양귀비의 묘

 

오랫동안 양귀비와 쾌락에 빠져서, 정사를 돌보지 않았던 현종은 대신과 장수들의 신뢰를 잃어서, 양귀비의 죽음을 막을 만한 힘이 없었고, 결국 근위병들이 주도해서 양귀비의 자살을 촉구했다고 한다.

 

오랫동안 현종의 총애를 한몸에 받고, 엄청난 권세를 누렸던 양귀비는 근위부대의 강요에 의해서, 스스로 자결함으로써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그런데 여기서 잠깐, 오랫동안 양귀비는 스스로 자살한 것으로 알려져왔는데, 중국의 또다른 역사서를 보면, 양귀비는 자살한 것이 아니라, 일본으로 도주했고 일본땅에서 죽었다고 한다.

 

양귀비는 죽는 순간까지도 현종의 총애를 감사하며, 목숨을 구걸하지 않고 당당하게 목을 메어 죽었다고 그동안 알려져 왔었다. 그런데 실제로 양귀비는 자결하지 않았고, 몰래 일본땅으로 도망쳤다고 한다. 

 

 

1970년대에 일본국민들의 우상으로서, 일본국민들의 사랑을 많이 받았던 아이돌 여가수 야마구치 모모에가, 자신은 양귀비의 후손이었다고 2001년도에 중국에서 밝혔다고 한다.

 

2001년도에 중국을 방문했던 일본의 아이돌가수 야마구치 모모에는 기자회견장에서 중국기자들의 질문을 받고, 자신의 조상이 바로 중국에서 온 양귀비라고 하며, 자신은 양귀비의 직계자손이라고 밝혔다는 것이다.

 

일본에서 한시대를 인기높은 아이돌여가수로 풍미했던 야마구치 모모에가 중국 당나라의 양귀비의 직계후손이라고 하니, 정말 놀랄만한 일이 아닐 수가 없다.

 

중국의 정사인 구당서의 기록을 보면, ‘근위대장이 양귀비의 시녀를 죽여서, 양귀비가 죽은 것처럼 위장한 후, 양귀비는 빼돌렸다고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또한 같은 구당서의 기록에 양귀비는 배를 타고 일본으로 갔으며, 일본에서 여생을 살다가 일본땅에서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실제로는 양귀비가 죽지않고 일본으로 망명해서, 일본에서 살다가 죽었다는 것이다. 이런 기록은 중국의 야사가 아닌 정사인 구당서에 기록되어 있는 것이므로, 신뢰성이 높다고 하겠다.

 

, 양귀비는 실제로는 자살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시녀를 대신 죽게해서, 마치 자신이 자살한 척 위장을 했던 것이고, 자신은 비밀리에 궁을 빠져나와, 일본으로 망명해서 일본땅에서 살았다는 것이다.

 

 

그당시 양귀비의 나이가 37세의 젊은 나이라서, 아직 그대로 죽기가 억울하다고 생각한 양귀비는, 자살을 집행하던 근위대장을 그동안 모아놨던 금은보화를 주고 구워삶아서, 시녀을 대신 죽게하고 자신은 몰래 동해안으로 도망쳐서 배를 타고 일본으로 망명했던 것이다.

 

양귀비는 황제를 구워삶았을 만큼 미모 뿐만아니라 처세술도 아주 뛰어난 여성이었는데, 위급한 시기에 근위대장을 잘 포섭해서 탈출에 성공했던 것이다.

 

중국에도 양귀비의 묘가 있지만, 실제로 일본에도 양귀비의 묘가 있다고 한다. 양귀비의 묘는 일본의 야마구찌현의 오오쯔군 유야정 츠마에 있다고 한다.

 

 

일본 유야정 츠마에는 양귀비마을도 있으며, 이곳에는 양귀비사당도 있고 양귀비무덤도 있다고 한다.

츠마에는 오륜탑이 있는데, 이 오륜탑은 양귀비묘 위에 지어진 다섯 개의 석탑이라고 한다. 일본여성들은 양귀비묘를 참배하길 좋아한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양귀비묘를 참배하면, 예쁜 자식을 낳을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라고 한다.

 

경국지색(傾國之色)’이라는 말은 바로 양귀비 때문에 생겨난 고사성어라고 한다. ‘한 나라가 기울어지고 망할 정도로 아주 빼어난 미인이라는 의미의 경국지색의 미인인

양귀비는,

실제로도 현종의 마음을 사로잡아 정사를 멀리하게 만들었고, 결국 반란이 일어나 나라를 위태롭게 만들었던 후궁이었다.

 

미모도 출중했지만, 처세술도 뛰어났던 양귀비는 위급한 시기에도 근위대장을 금은보화로 매수해서, 탈출하는 데에 성공했고, 결국 배를 타고 일본으로 망명하여 자신의 후손까지 남겼다고 한다.

 

 

아이돌가수 야마구치 모모에가 중국에까지 가서, 자신이 양귀비의 직계후손이라고 밝힐 정도라면 그녀의 말에 신빙성이 높아 보인다.

일본국적의 아이돌가수가 뭐하러 남의 나라인 중국에까지 가서, 자신이 중국인의 후손이라고 거짓말을 하겠는가? 일본인과 중국인은 서로 상극이 아닌가?

 

경국지색의 미인이라고 불리워지는 양귀비는 일본으로 망명한 후에도, 그 빼어난 미모가 일본땅에도 널리 알려져서, 지금은 수많은 일본여성들이 양귀비처럼 예쁜 자식을 얻기 위해서 참배하러 온다고 한다.

 

한나라의 왕이 너무 예쁜 후궁에 빠지면, 나라가 위태로와진다고 하는데, 중국의 양귀비와 우리조선의 장희빈이 그 대표적인 예에 해당한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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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여진 모친 정씨, 기보배 욕설과 비난 인스타그램, 보신탕 논란

 

배우 최여진의 모친이 SNS상에서 양궁선수 기보배를 비난하는 글을 올려서 엄청난 화제가 되고 있다.

현재 리우올림픽에 출전해서, 맹활약을 펼치고 있는 우리나라의 양궁얼짱 기보배선수는 우리나라 양궁의 에이스로 금메달이 가장 기대가 되는 양궁기대주이다.

 

그런데 최여진의 모친 정씨는 87일 난데없이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기보배선수에 대한 글을 올렸는데, 정씨 무식해보이지만, 욕 좀 할께요’ ‘X이 미쳤구나!’라고 욕설을 하면서, 기보배선수에게 원색적인 비난을 했다고 한다.


최여진의 모친 정씨는 2010년도에 기보배선수가 보신탕을 좋아한다는 기보배선수의 아버지의 인터뷰내용을 인용하면서보신탕을 즐긴다는 기보배선수에 대해 험한 욕설과 비난을 퍼부었다고 한다.


 

최여진과 모친 정씨

  

기보배선수의 부친이 6년전에 지나가는 말로 한번 한 말을 갖고, 이제와서 최여진의 모친이 생트집을 잡으면서, 기보배선수에게 온갖 원색적인 비난을 해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보신탕을 좋아한다는 말은 기보배선수가 직접 한 말도 아니고, 기보배의 부친이 6년전에 한말을 갖고 이제와서, 리우올림픽에서 대한민국의 국가위상을 높이기 위해서, 열심히 경기를 치르는 선수에 대해, 저렇게 원색적인 비난을 퍼붓다니,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는 상황이다.

 

  최여진의 모친 정씨의 인스타그램 기보배 비난글

 

최여진의 모친 정씨는 자신의 인스타그램에서 기보배선수에게 욕설을 퍼부은 다음에, ‘한국을 미개한 나라라고 선전하는 것이냐? 잘 맞으면 니XXXX(부모)도 쳐드시지, 왜 사람고기가 좋다는 말은 못 들었냐, 대가리에 똥X고 입에도 담기 힘든 원색적인 비난과 험한 욕설을 계속 해댔다고 한다.

 

기보배선수가 한때 보신탕을 즐긴다는 소문을 듣고서, 최여진의 모친 정씨는 기보배선수에게 심한 욕설을 퍼부은 것도 모자라, 이에 그치지 않고 기보배선수의 부모에게까지도 막말을 해댄 것이다.

 

최여진의 모친 정씨의 기보배선수 욕설과 비난은 너무 심했다고 보여진다.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는 SNS상에서,

국가를 위해서 리우올림픽에 출전해서 열심히 뛰고있는 국가대표선수에게 격려는 못해줄 망정, 이렇게까지 심한 욕설과 원색적인 비난을 할 수가 있다니, 정말 이 최여진의 모친의 정신상태가 궁금해질 따름이다.

 

왜 하필, 지금 기보배선수가 리우올림픽에서 양궁 결승전경기를 치르고 있는 마당에, 이렇게 험한 욕설을 해대는 지 이해가 가질 않는다.

사람이 보신탕을 좋아하든, 싫어하든 그것은 어디까지나 개인의 사사로운 취향과 식성이기 때문에, 3자가 관여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이번 리우올림픽 양궁단체전에서 금메달을 따낸 기보배선수

 

더욱이 지금 리우올릭픽에서 국가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서 경기에 임하고 있는 기보배선수에게 이렇게 원색적인 비난과 입에 담기에 끔직찍한 욕설을 해대는 것은 사람의 도리가 아니라고 본다.

더군다가 기보배선수의 부모님까지 거론하면서 비난한 것은, 누가 보더라도 잘못된 일인 것이다.

 

최여진의 모친 자신도 누군가의 어머니인데, 딸과 자식이 있는 나이도 많이 먹은 어머니라는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까지 원색적인 비난과 입에 담기에도 끔찍한 욕설을 해댈 수가 있는지,

최여진 모친의 뇌구조에 어떤 이상이 있는 것이 아닌가 의구심이 들 정도다.

 

최여진의 모친은 자신의 기보배선수 욕설과 비난으로 인해서, 언론에서 큰 논란이 일어나자, 그 다음날인 8일날 사과문을 게제하고 해당글을 삭제했다고 한다.

최여진의 모친 정씨는 기보배선수에게 지나친 발언을 한 것을 사과한다는 내용의 사과문을 자신의 SNS에 올려서 사과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미 최여진 모친의 글은 인터넷과 SMS상에 널리 펴져있는 상태라서, 엎질러진 물을 도로 담기에는 너무 늦은 감이 있다.

한편 최여진도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글을 올려서, 자신의 모친이 기보배선수를 비난한 것에 대해서 사과한다고 밝혔다고 한다.

 

  최여진(좌), 기보배(우)

 

최여진의 모친은 캐나다의 토론토에 산다고 하며, 그녀는 재혼해서 자신보다 8세 연하의 남성과 함께 산다고 한다.

 

최여진의 모친이 기보배선수에게 욕설을 퍼붓는 동안, 우리의 자랑스러운 기보배선수는 리우올핌픽에 양궁단체전 결승전에 출전해서, 당당히 금메달을 획득했다고 한다.

 

88일 브라질의 리우 슴보드로모경기장에서 열린 여자양궁 단체전경기에서 기보배와 장혜진, 최미진 선수는 러시아와의 결승전경기에서, 러시아를 5-1로 꺾고 당당히 금메달을 획득했다고 한다.

 

7일 남자양궁 대표팀이 단체전결승전에서 승리해서, 금메달을 따낸 데이어, 여자 양궁대표선수들도 또다시 금메달을 따내는 엄청난 수훈을 세운 것이다. 우리의 자랑스러운 여자와 남자 양궁대표팀에게 무한한 박수갈채를 보내고 싶다.

 

최여진의 모친은 기보배선수에게 입에 담기도 힘든 험한 욕설을 퍼붓는 동안, 기보배선수는 외국에 나가서, 뛰어난 활약을 펼쳐서 금메달을 따내는 수훈을 세웠으니, 정말 아이러니가 아닐 수가 없다.

 

2012년 런던올림픽에서 여자양궁 금메달 2관왕에 올랐던 기보배선수

 

기보배선수는 2012년 런던올림픽때에도 여자양궁 단체전과 개인전의 2관왕에 올랐다고 하는데, 이번에도 또다시 금메달을 따내는 수훈을 세웠으니, 그녀가 너무 예쁘고 자랑스럽다.

 

이세상에는 두부류의 사람이 존재한다.

최여진의 모친처럼 죄없는 사람에게 괜히 쌍욕을 해대는 무식하고 개념없는 여자와 남들의 중상모략에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해서 큰 공을 세우는 그런 개념있는 여자 말이다.

 

최여진 모친이 해댄 욕설이 머리에서 떠나질 않는다. ‘대가리에 똥X

인격을 가진 사람이 어떻게 이런 험한 욕을 할 수가 있는가? 최여진의 모친이란 사람, 정말 슬프고 안타깝기만 하다.

 

 

 

 

 

 

Posted by 프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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