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의 업적과 실정, 반정 죽음, 인목대비 폐위와 영창대군 살해
조선왕조 역사상 가장 엇갈린 평가를 받고있는 임금은 바로 광해군이다. 광해군은 사학자나 일반대중들로부터 두가지 상반된 평가를 받고 있다.
광해군은 동생을 죽이고 대비를 폐위시킨 포악한 폐륜군주라는 평가가 하나고, 또한 광해군은 격변하는 동아시아의 정세속에서 유효적절하게 중립외교를 발휘하고, 개혁정치를 실시했던 개혁군주라는 평가가 두 번째다.
과연 광해군은 단지 포악한 폭군에 지나지 않을까, 아니면 국제질서의 변화속에서 현명하게 처신했던 개혁군주였을까?
광해군은 두가지 양면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는 임금으로서, 현군과 폭군의 정반대의 이미지를 함께 지니고 있었던 조선왕조 역사상 매우 판단하기 힘든 군주라고 할 수 있다.
‘어메이징스토리’에서 170회에서는 광해군과 인목대비의 질긴 악연과 갈등상황을 매우 리얼하게 묘사해서, 많은 시청자들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선조의 뒤를 이어 제15대 왕으로 등극한 광해군은 선조의 계비인 인목대비와 오랫동안 반목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그 이유는 인목대비가 낳은 영창대군 때문인데, 후궁의 자식으로 평생 서자라는 태생적 한계를 지니고 있었던 광해군은 자신이 세자로 책봉된 후에도,
뒤늦게 선조의 정비가 된 인목대비가 아들 영창대군을 낮는 바람에, 자신의 왕위후계자자리를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콤플렉스 속에서 살아가야만 했다.
즉, 광해군은 세자시절부터 왕위 계승문제를 놓고, 정실의 자식인 영창대군의 존재감으로 인해, 첩실의 자식인 자신의 콤플렉스와 열등감 때문에, 영창대군과 그 모후인 인목대비를 경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상 광해군에게는 인목대비와 영창대군은 자신의 후계자자리와 왕위를 가장 크게 위협할 수 있는 최대의 정적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후궁 공빈의 소생인 광해군은 선조의 정비였던 의인왕후가 아들을 낳지못하자, 임진왜란이 일어나는 위급한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세자로 옹립되었기 때문에, 항상 언제 세자자리에서 쫒겨날지 모른다는 불안감속에서 살아가야만 했다.
자신이 후궁의 자식이라는 콤플렉스가 강했던 광해군은 의인왕후가 죽고 난 후, 새롭게 왕후의 자리에 오른 인목대비가 적장자나 다름없는 영창대군을 낳자,
선조다음의 후계자자리를 놓고, 정적인 인목대비와의 왕위계승을 서로 차지하기 위한 갈등상황이 발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전개된다.
이렇게 서자출신라는 콤플렉스로 인해 항상 불안한 세자 자리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던 광해군에게는, 자신의 세자자리를 유지하는 데에 인목대비와 그 아들 영창대군이 가장 큰 위협세력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왜냐하면 영창대군은 선조의 정비인 인목왕후의 아들로서 정실의 자식이기 때문이며, 선조는 평소에 서자인 광해군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1605년 인목대비를 왕후로 들인 선조가 54세의 나이에 인목왕후의 아들을 보게 된 것이다. 나이 많은 선조로 인해, 모두들 인목왕후가 자식을 낳지못할 것으로 예상했었지만, 인목왕후는 많은 사람들을 비웃듯이 떡뚝거비 같은 아들을 낳아서 모두를 놀라게 했는데, 그 아들이 바로 영창대군인 것이다.
광해군은 인목대비가 아들을 낳자, 겉으로는 산후처리에 좋다는 귤을 선사하는 등 인목왕후의 왕자출산을 축하해주었지만, 광해군의 속은 까맣게 타들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여태까지 선조에게는 정실의 자식이 없었기에, 서자인 자신이 세자로 군림해올 수 있었는데, 이제 나이 많은 선조가 20대의 젊은 인목왕후를 계비로 맞아들여 50대 중반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왕자를 낳았으며,
그 왕자는 정비의 자식이어서, 얼마든지 왕의 후계자가 될 수 있는 자격을 갖추고 있었고, 서자출신인 광해군은 언제든지 세자 자리에서 쫒겨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더욱이 늦은 나이에 손주같은 아들을 얻은 선조는 영창대군을 끔찍하게 총애하였고, 왕자를 낳은 인목왕후는 왕위계승을 놓고 경쟁관계에 있던 광해군을 견제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인목왕후(훗날 인목대비)는 아들을 낳은 이후, 선조에게 부탁을 해서, 400여명에 이르는 궁녀들을 자신의 처소에서 시중을 드는 궁녀로 만들었는데, 이 궁녀들 중에는 광해군처소에 있는 궁녀 100명이나 포함되어 있었다고 한다.
즉, 광해군처소에서 시중들던 궁녀 100명을 인목왕후(인목대비)가 고의적으로 자신의 처소로 이동배치시킨 것인데,
이것은 세자의 자격을 갖춘 영창대군을 낳은 인목왕후(인목대비)가 장차 왕위계승을 놓고 치열한 암투를 벌이게될 경쟁자인 광해군을 견제하기 위한 의도된 포석이나 다름 없었다.
이렇게 그동안 평안했던 궁궐에서 인목왕후가 아들을 낳은 후부터, 쌀쌀한 냉기류가 흐르기 시작했으며, 선조의 후계자계승를 놓고,
광해군과 인목왕후(인목대비)간에 눈에 보이지않는 치열한 물밑싸움과 갈등이 전개되어 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특히 인목왕후(인목대비)는 왕자 영창대군을 낳자마자, 선조에게 자신이 낳은 왕자를 세자로 부를 것인지, 아니면 대군으로 부를 것인지, 어떻게 부르는 것이 좋은지 물어보았다고 한다.
광해군이라는 세자가 엄연히 존재하고 있는 상황에서, 인목왕후(인목대비)의 이같은 문의는 자신의 아들 영창대군이 세자가 될 수 있는지를 염두에 두고, 선조에게 물어보는 것이나 다름 없었다.
이같은 소식을 접한 광해군은 눈에 불이 번쩍 났을 것이다. 자신보다 9살이나 어린 인목왕후(인목대비)가 자신이 보유하고 있는 세자 자리를 노리고있다는 것을 느꼈을 것이고, 젊고 예쁜 인목왕후(인목대비)가 침실에서 선조에게 베겟속송사를 벌여서 자신이 갖고있는 세자자리를 빼앗아갈지 모른다는 불안감과 초조감에 오랫동안 시달렸을 것이다.
그런데 선조가 인목왕후(인목대비)를 왕비로 맞아 혼인을 올린지 3년이 지난 1608년 선조는 갑자기 뇌경색(중풍)에 걸려서, 병석에 눕고만다.
자신의 유일한 보호자였던 선조가 갑자기 앓아눕자, 3살난 영창대군을 둔 인목왕후(인목대비)로서는 큰 위기감에 사로잡히게 된다.
선조가 만약 죽는다면, 자신과 자신의 아들을 원수처럼 여기는 광해군의 횡포와 보복이 날아들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인목왕후(인목대비)는 중풍에 걸려 앓아누운 선조를 완쾌시키기 위해, 온갖 정성을 다하였고, 선조는 잠시 일어날 수 있을 정도로 쾌차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잠시 쾌차하였던 선조는 다시 쓰러져서 혼수상태에 빠졌고, 이내 선조는 병석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1608년 인목대비와 3살베기 영창대군을 남겨놓고 57세의 나이에 운명하고 말았다.
선조가 죽고난 후, 선조의 뒤를 이을 왕위자리는 광해군에게 돌아갔으며, 광해군은 선조의 뒤를 이어서 조선의 제15대왕으로 등극할 수 있었다.
과연 광해군이 순조롭게 선조의 왕위를 계승한 것일까? 선조는 죽기직전에 광해군에게 왕위를 계승시킨다는 교서를 내렸다고 한다.
그렇지만 일설에는 이 교서는 사후에 만들어진 가짜교서라고 하며, 선조가 총애하는 영창대군을 왕위계승자로 삼았는데, 인목대비는 아직 3살밖에 안된 어린 영창대군을 왕위에 올려놓는 것은,
오히려 광해군의 역습을 받을 후환이 있다고 판단하고, 광해군에게 왕위계승권을 양보했다고 한다.
그런데 선조의 죽음도 의문점이 많이 남아있다고 한다. 오랫동안 누워있었던 선조가 다시 일어나서 활동할 정도였다고 하는데, 이렇게 쾌차했던 선조가 또다시 갑자기 쓰러져서 사망한 것이다.
선조가 사망하기 직전에 약밥을 먹었다고 하는데, 이 약밥은 광해군이 올린 것이라고 한다. 즉, 선조는 쾌차했다가 광해군이 올린 약밥을 먹고 급채해서 죽었다는 것이다. 뭔가 꺼림찍한 냄새가 나지않는가?
선조가 약밥을 먹고 급채했고 그 충격으로 사망했다고 하는데, 사실상 선조가 죽을 당시의 상태는 독약을 먹고난 후의 상태와 매우 흡사한 모습이었다고 한다.
실제로 조선왕조실록 ‘광해군일기’의 기록에 따르면 ‘선조는 미시에 올린 찹쌀밥을 먹고 갑자기 위급한 상태가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또한 연려실기술에는 ‘쓰러진 선조의 몸이 이상하게도 검푸른빛을 띠고 있었으며, 장안에는 임금이 독살당했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두기록을 보면, 약밥(찹쌀밥)을 먹고 쓰러진 선조의 몸이 이상하게도 검푸른빛을 띠고 있었으며, 이것은 독살당했을 때의 몸의 상태와 비슷한 상태라고 한다. 이렇게 선조는 찹쌀밥을 먹고 갑자기 숨을 거두었는데, 사초의 기록에는 그냥 선조가 급채해서 사망한 것처럼 기록되어 있지만,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고 하지 않던가!
선조가 찹쌀밥을 먹고 쓰러져서 죽었을 당시의 상태를 보면, 독살당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할 수 있으며, 선조가 진짜로 독살당했다면, 그당시 선조를 죽일 수 있는 가능성이 높은 사람은 당연히 광해군일 것이다.
왜냐하면 인목왕후(인목대비)를 끔찍이 총애했던 선조가 그 아들인 영창대군을 내심 자신의 후계자로 삼기를 원했기 때문이며, 세자로 일찍이 책봉되었던 광해군을 선조가 서자출신이라고 매우 못마땅하게 생각하며 냉대했다고 한다.
그런 상황에서 선조가 더 오래 살았다면, 장성한 영창대군을 자신의 후계자로 바꿔치기할 가능성이 높은 상황인 만큼, 영창대군이 어렸을 시기인 그때에 - 영창대군 나이 3살 - 선조를 죽게함으로써, 자신의 왕위계승을 더 빨리 실현시킬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당시의 상황을 살펴보면, 영창대군에게 세자의 자리나 왕위계승자의 자리를 빼앗길 우려가 컸던 광해군이 선조를 독살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아 보인다.
1608년 선조가 갑자기 사망함으로써 인목대비는 이제 고작 25살의 어린 나이에 청상과부의 신세가 되고 만 것이다.
그리고 유일한 보호막인 선조를 잃은 인목대비는 겨우 3살난 영창대군을 혼자의 힘으로 지켜주어야 했는데, 자신들과 왕위계승자 경쟁을 치열하게 벌여왔던 광해군은 인목대비와 영창대군을 눈에 가싯처럼 생각하고 있었고, 그들에게 마수의 손을 펼치려하고 있었다.
1613년 드디어 광해군은 눈에 가시 같은 인목대비와 영창대군을 치기위해서, 칼을 뽑아들었다.
1613년 계축옥사가 발생하였는데, 인목대비의 친정아버지 김제남이 역모를 꾀한 일이 들통나서, 친국을 당하는 일이 발생했다.
인목대비의 친정아버지 김제남이 서얼출신의 낭인들을 모으고 사주해서, 영창대군을 왕으로 등극시키려는 반역을 모의했다고 한다.
물론 이같은 김제남 역모사건은 당시 정권을 잡았던 광해군과 대북파들의 꾸며낸 가짜역모사건으로, 도적질을 일삼던 서얼낭인으로 하여금 가짜로 고변을 하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당시 정권담당자였던 광해군과 대북파는 장차 광해군의 왕권유지에 방해가 될 수 있는 인목대비와 적장자인 영창대군을 제거하기 위해서, 가짜로 꾸며낸 역모사건이었던 것
이다.
계축옥사로 인해서, 인목대비는 폐위당해서 서궁에 유폐되었고, 그 아들 영창대군은 강화도로 유배를 떠나게 되었다.
이것이 끝이 아니라, 인목대비의 친정집은 완전 쑥대밭이 되고 말았다. 인목대비의 아버지는 역모죄의 죄를 뒤집어쓰고 참살되었으며, 인목대비의 친정남매 3형제가 모두 살해를 당하고 말았다.
장차 화근의 씨앗이 될 영창대군의 주변사람들이 모조리 도륙이 나고 만 것이다.
또한 광해군은 자신의 친형인 임해군마저 역모의 죄를 뒤집어쒸워서 살해하고 만다.
왕위에 오른 광해군은 너무나도 다른 모습을 보여줬던 것이다. 왕위에 오르기 전에 서자출신이라고 괄시와 상처를 많이 받았던 광해군은 왕위에 오른 이후에 마치 자신이 과거에 받었던 모멸감에 대한 복수라도 하듯이,
친형과 동생들에게 거짓 반역죄를 씌워서 살해했을 뿐만 아니라, 주변의 여러 대신들도 모반죄를 뒤짚어씌워서 죽이거나 대대적인 숙청을 단행했다.
왕이 된 광해군은 자신의 권력강화를 위해서, 점점 폭군의 모습을 변해가고 있었고, 패륜군주가 바뀌고 있었다.
그렇지만 광해군이 왕이된 후에, 모든 것을 잘못했던 것은 아니다.
광해군은 외교적으로 실리외교를 표방했는데, 동아시아의 신흥강대국으로 급부상한 청나라와 명나라 사이에 중립외교를 시도해서, 국제정치적으로 안정을 도모했다.
또한 광해군은 1608년 경기도땅에 대동법을 실시해서 민생안정에 크게 힘썼다. 대동법은 국가에 각지역의 특산물을 바치는 공납제도인데, 말도 안되는 과도한 특산물을 책정해 바치게 함으로써
백성들을 매우 괴롭혔던 제도인데, 특산물 대신에 일정량의 쌀로 대신 바치게 함으로써, 백성들의 고통분담을 많이 덜어주었던 것이다. 또한 땅을 소유한 땅주인에게만 대동미를 거두게 함으로써, 땅을 갖지못한 소작인들의 공납을 없애줬던 것이다.
그리고 광해군은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던 창덕궁, 경희궁, 창경궁등 궁궐유곽을 대부분 재건하는 데에 힘을 기울이는 등, 전쟁으로 피폐해진 전후의 조선을 다시 중흥시키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리고 중계무역을 크게 활성화하였고, 해상무역을 활발하게 추진했고 교육사업 출간사업에도 관심을 기울여나갔다.
광해군이 실시했던 중립외교 실리정책과 대동법등에 있어서는 현명하게 처신했다고 찬사를 받기도 한다.
그리고 광해군은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에도 전쟁터를 누비면서 의병을 모집하고, 군량미확보를 위해 발벗고 나서는 등 세자로서 매우 용기있고 모범적인 행동을 보여줌으로써, 왜군들을 물리치는 데에 적지않은 공훈을 세우기도 했다.
이렇게 광해군은 긍정적인 역할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폐륜군주’라는 이미지를 떨칠 수가 없는 이유는 그가 너무도 치명적인 잘못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
‘현명한 개혁군주’이면서 동시에 ‘패륜군주’의 이미지도 함께 갖고있는 광해군은 권력에 대한 집착이 너무나도 커서, 자신의 죄없는 친형과 동생들을 죽였을 뿐만 아니라, 왕실의 가장 큰 어른인 인목대비까지 폐위하는 만행을 저지렀던 것이다.
광해군은 자신의 오른팔이자 왼팔인 이이첨과 정인홍으로 하여금 능창군의 역모사건과 영창대군의 역모사건을 일으키게 만들었고, 이들을 모두 살해하였는데, 이러한 역모사건들이 모두 가짜 만들어낸 거짓역모사건이었던 것이다.
광해군은 자신의 왕권강화를 위해서, 거짓된 역모사건을 만들어서, 장차 자신의 왕권유지에 눈에 가시같은 존재들을 모조리 살해했던 것이다.
영창대군은 불과 8살의 어린 나이에 계축옥사에 연류되어, 강화도 교동으로 유배당하였고, 유배당한 지 1년 후인 9살의 나이에 살해당하고 만다.
왕자로 태어났다는 죄아닌 죄 때문에, 아무것도 모르는 철없는 만 8살의 나이에 거짓으로 만들어낸 역모죄를 뒤짚어쓰고 살해당하였다.
여기서 끝이 아니라, 이미 포악해질 데로 포악해진 광해군은 숨진 영창대군의 모후인 인목대비를 폐위시킨 후에, 서궁에다가 유폐시켜 버리는 만행을 저질렀다.
자신의 어머니격이자 왕실의 가장 큰 어른인 인목대비를 그의 아버지와 오빠들을 모두 죽이고 그의 아들마저 죽인 것도 모자라서, 이제는 대비직에서 폐위시켜서, 감옥 같은 서궁속에서 유폐시키는 만행을 저질렀다.
광해군과 대북파들의 이같이 엄청난 폭정과 패륜정치가 계속되자, ‘의리’와 ‘도덕정치’를 숭상하던 사림유학자들과 양반사대부들의 반발이 거세게 일어나게 되며, 광해군조정은 사림유학자들과 백성들의 민심을 잃어버리게 된다.
그리고 그동안 대북파의 횡포 때문에, 정치적으로 소외되었던 서인세력들이 ‘패륜군주’인 광해군의 타도를 외치며, 반정쿠테타를 시도하고 나섰다.
1623년 이귀, 김자점, 김유 등 서인세력들이 2,000명의 군사들을 모아서 광해군을 타도하는 반정을 일으키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인조반정이다.
인조반정을 일으켜서 2천명의 군사들을 이끌고 궁궐로 쳐들어가서, 광해군을 체포하고 왕의 측근들을 척살한 반정세력들은, 능양군(인조)를 왕으로 추대하면서 반정을 성공시켰다.
광해군을 왕위에서 끌어내리는 인조반정을 일으켰던 반정세력들이 내세웠던 광해군의 폐위이유는 다음과 같다.
반정세력들은 광해군을 체포하고, 인목대비 앞에 무릎을 꿇린 후에, 다음과 같은 폐위이유를 밝혔다고 한다.
♣ 광해군이 페위된 이유
첫째, 광해군은 궁궐등의 축조공사를 무리하게 많이 벌여서, 백성들을 도탄에 빠뜨렸다.
둘째, 광해군은 임진왜란 때에, 목숨 걸고 우리나라를 도와준 명나라를 배신하고, 오랑캐인 후금(청나라)와 화친하였다.
셋째, 광해군은 친형인 임해군과 동생 영창대군을 살해했고, 어머니인 인목대비를 폐위시키는 페륜을 저질렀다.
위의 세가지 내용이 반정쿠테타를 일으켜서, 인조를 새로운 왕으로 옹립하고, 광해군을 ‘패륜군주’로 몰아서, 임금의 자리에서 끌어내었던 반정세력이 내세웠던 반정의 이유이자, 광해군 폐위의 이유라고 한다.
이같은 반정쿠테타세력들이 내세운 폐위의 이유가 타당한지를 한번 살펴볼 필요가 있다.
광해군이 궁궐등의 축조공사를 벌인 것은 사실이며, 임진왜란의 전쟁으로 인해서, 불에 타고 부쉬진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등의 누각들을 다시 재건했던 것이다.
임진왜란의 전화로 인해서, 거의 재만 남게 된 궁궐들을 광해군이 다시 재건했던 것인데, 이 궁궐복원사업으로 인해서, 백성들이 다소 고단한 생활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민생이 도탄에 빠질 정도는 아니라고 보며, 언젠가는 반드시 해야할 공사였던 것은 사실이다.
전쟁으로 불에타고 소실된 궁궐을 다시 재건한 것을 놓고서, 이것을 폐위의 이유로 삼는 데에는 논란의 소지가 있다고 본다.
둘째, 광해군은 명나라를 배신하고 오랑캐인 후금(청나라)와 화친했다는 것인데, 이것도 광해군 폐위의 한 이유라고 한다.
조선시대를 이끌었던 주도세력인 양반사대부들와 사림유학자들의 최대의 관심은 바로 가장 큰 스승인 ‘공자’ ‘맹자’ ‘주자’를 탄생시킨 명나라를 스승의 나라이자, 조상의 나라로 섬기는 ‘사대주의’라고 할 수 있다.
조선의 양반사대부들의 사상적 기반은 유학과 성리학인데, 이러한 유학과 성리학을 창시하고 발전시킨 큰 스승들을 낳았던 명나라를 스승의 나라 혹은 조상의 나라라고 여기면서, 명나라마저 숭배의 대상으로 삼았던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위대한 스승의 나라이자 조상의 나라인 명나라가 군대를 파병해서, 목숨걸고 조선을 도와주는 큰 은혜를 내렸는데, 이젠 거꾸로 명나라가 오랑캐인 후금(청나라)에게 침략을 당했으니,
그들의 큰 은혜를 입은 우리조선이 목숨을 걸고 명나라를 도와주는 것이 당연한 도리라고 인식했으며, 그것은 스승의 나라의 은혜애 대한 보은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이렇게 명나라에 대한 ‘의리와 보은’을 최고의 가치로 생각했던 양반사대부들의 판단으로는, 광해군이 신훙강대국으로 급부상한 후금(청나라)와 화친을 추구하고, 노쇠한 명나라를 군사적으로 도와주지 않았던 것을, 의리에 대한 배신으로 여기면서 결코 용납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지키지못하고 배신한 광해군은 패덕한 군주로 여겼던 것이며, 이것도 광해군 폐위의 또다른 중요한 이유로 삼았던 것이다.
사실 광해군이 명나라가 누루하치의 후금과 전쟁을 벌일 때에, 도와주지 않은 것을 결코 아니다.
광해군은 후금군과 싸우는 명나라가 군사원조 요청을 하자, 강홍립장군으로 하여금 12,000명의 군대를 주어서 만주로 가서, 명나라를 도와 후금군대와 싸우도록 했다.
그런데 명나라가 후금과의 전투에서 크게 패해서 달아나버렸고, 강홍립의 조선군은 후금과의 교전을 벌이는 상황에서 과반수에 해당하는 병력의 손실을 입으면서, 패전을 하는 불리한 상황에 처하게 되자, 후금에게 항복해버리고 만다.
이것을 놓고서 서인세력들은 광해군이 밀지를 내려서, 강홍립의 조선군이 싸우지도 않고, 후금(청나라)에게 고의적으로 항복한 것이라고 오해를 했던 것이다.
광해군은 강홍립장군에게 요동으로 가서 후금군대와 싸울 것이되, 싸우다가 상황이 불리해지면 전멸을 당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항복해서, 그들과 화친하는 쪽을 택하라고 밀명을 내렸던 것이다.
즉, 강홍립군대는 싸우지도 않고 항복했던 것이 아니라, 군대의 과반수가 죽을 정도로 치열하게 싸우다가,
도저히 승산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어쩔 수 없이 항복했던 것이며, 이것은 매우 현명한 선택이었는데, 이것을 반정세력들이 오해를 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승산도 없는 남의 나라의 싸움에 끼여들어서, 12,000명이 전멸당할 때가지 싸우다 죽으라는 말인가?
셋째 동생인 영창대군을 죽이고, 어머니인 인목대비를 폐위시키는 만행을 저절렀다는 것이고, 그래서 광해군은 ‘패륜군주’로서 폐위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 세 번째 광해군의 패덕한 행위는 반정세력이 광해군을 폐위시킨 이유로서 유일하게 타당성있는 이유라고 본다.
사실 영창대군이 무슨 죄가 있단 말인가? 영창대군은 선조의 계비인 인목대비의 아들로 태어났다는 이유 때문에, 아무 죄도 짖지않았는 데도 만 8살의 어린 나이에 광해군으로부터 살해당하고 말았다.
영창대군을 왕으로 옹립하려 했다는 계축옥사는 모두 이이첨등이 만들어낸 조작극에 불과한 것이다.
권력욕심이 엄청나게 강했던 광해군과 그 측근세력들이 장차 광해군의 왕권유지에 방해가 될지도 모르는 인목대비와 영창대군을 사전에 제거할 명분을 세우기 위해서, 가짜 고변자를 만들어서, 거짓된 역모사건을 만들었던 것이다.
원래 왕이 될 수도 없는 신분인 서자출신이었던 광해군은 서자라고 하는 심한 콤플렉스와 열등감 때문에, 적장자 출신인 영창대군과 인목대비를 철저하게 미워했던 것이며,
이런 극심한 열등감과 콤플렉스 때문에 초조감과 불안감에 사로잡혔던 광해군이 아무 죄도 없는 나이 어린 영창대군을 죽이고도 모자라, 그 모후인 인목대비마저 폐위시키는 만행을 저질렀던 것이다.
광해군의 영창대군 살해와 인목대비 폐위는 ‘폐모살제(廢母殺弟)’라고 불리우는 우리왕조역사상 대표적인 페륜행위이며, 우리 왕조역사상 가장 불행했던 사건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광해군은 임진왜란 전쟁시 의병들의 게릴라전쟁을 지휘하고, 지원하는 등 훌륭한 전과를 올렸고, 대외적으로 중립외교를 펼쳐서 후금과의 전쟁을 막았으며,
대동법 같은 개혁정치를 펼쳐서 민생안정을 추구하는 공훈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폐모살제’를 저지르는 치명적인 실수를 범함으로써, ‘성군’이 되지 못하고, 포악한 ‘페륜군주’라는 낙인이 찍혀서 안타깝기만 한다.
만일 광해군이 서자가 아니었다면, 그리고 ‘페모살제(廢母殺弟)’를 저지르지만 않았다면, 그는 어쩌면 조선중기의 조선을 부흥시킨 ‘현명한 개혁군주’로 남아있었수도 있었다. 그래서 ‘폐모살제’를 할 수밖에 없는 환경에 처할 수밖에 없는 광해군이 더욱 더 안타까운 것이다.
1623년 광해군은 임금의 자리에서 폐위되고 강화도로 유배를 떠나게 되었는데, 광해군이 임금으로 재위한 지 15년만에 인조반정으로 쫒겨나게 된 것이다.
그렇지만 강화도로 유배를 간 광해군은 67세까지 천수를 누렸다고 한다. 반정쿠테타로 정권을 빼앗았던 서인세력들은, 임금을 죽이는 또다른 패륜을 저지르기 싫어했던 것 같다.
인목대비는 1623년도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폐위되면서, 다시 왕실의 가장 큰 어른인 대비의 자리에 복귀하게 된다. 그렇지만 인목대비는 대비에 다시 복귀된 지 10년만인 48세의 나이에 병으로 사망함으로써, 한 많은 생을 마감하고 만다.
인목대비가 인조반정으로 다시 대비로 복귀하였지만, 그녀의 마음속은 새까맣게 타들어갔을 것이며, 이미 만신창이가 되었을 것이다.
자신이 왕후가 되었기 때문에, 자신의 친아버지는 역모죄로 몰려서 살해당했고, 친정오빠들 세명이나 살해를 당해 자신의 집안은 풍비박산이 났으며, 남편인 선조는 자신이 25세 때에 이미 저세상으로 떠났으며,
가장 끔찍이 사랑했던 외아들 영창대군은 불과 9살의 어린 나이에 잃고말았으니, 그녀가 대비에 복위되었다고 하더라도, 삶의 의미를 전혀 찾지못했을 것이다.
어쩌면 인목대비는 자신의 끔찍이 사랑하는 아들 영창대군을 하루빨리 만나기 위해서, 스스로 죽음을 자초했을는지도 모르겠다. 저세상에서 외롭게 살고있는 영창대군을 다시 만나서 모자지간의 회포를 풀기 위해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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