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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와 몽고의 침입전쟁, 김윤후의 처인성 충주산성 전투와 살리타이 살해

 

 13세기초 고려에서는 최씨무신정권이 정권을 장악한 후, 최충헌, 최우, 최항, 최의등 최씨 4대가 40여년간 권력을 이어오고 있는 중이었는데

몽골에서는 칭기스칸이라고 하는 위대한 지도자가 출현해서, 몽골을 통일하고 몽골대제국을 세웠다.

 

칭기스칸은 몽골제국을 세운 후에, 동서남북으로 영토확장정책을 추진했는데, 13세기 초 동북아의 패권자였던 금나라를 공격해서 금나라를 마침내 멸망시켰으며,

동북아의 새로운 강자로 급부상한 몽골제국(원나라)는 그 다음상대로 남중국에 있는 송나라(남송)와의 전쟁을 벌여, 중원대륙을 집어삼킬 계획을 갖고있었다.

 

이처럼 동북아의 국제정세가 몽골제국을 중심으로하는 새로운 역학관계로 급변해가고 있는 상황에서, 몽골군에게 쫒긴 거란족군사들이 고려의 국경을 넘어 고려로 들어오는 사건이 발생했고,

뒤따라온 몽골군과 고려군은 강동성에 은거하는 거란족을 합동작전을 펼쳐서, 마침내 소탕하게 되었다.

 

 

이렇게 우연찮게도 거란족 때문에 고려군과 몽골군이 처음으로 서로 협력하는 관계가 되었고, 거란족소탕을 빌미로 몽골과 고려는 협약을 맺고 서로 교류하는 관계가 되었

는데,

문제는 몽골의 고려에 대해 과중한 세공요구와 오만불손한 몽골사신의 횡포로 두나라 사이에 불협화음이 발생하게 된다.

 

몽골과 고려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감도는 상황에서 마침내 고려국경지역에서 몽골사신 저고여가 의문의 피살되는 사건이 발생하었고, 몽골은 저고여피살을 빌미로 고려애 대한 침략을 개시하면서, 마침내 고려와 몽골의 기나긴 여몽전쟁이 시작되게 된다.

 

이때부터 몽골은 고려를 상대로 40년 동안 총 6차례나 침략해 들어왔으며, 고려 또한 국가의 자존심을 걸고 격렬하게 항전하였다.

세계 최강의 군사력을 지닌 몽골의 대군을 상대로 고려는 굴복하지 않고 40년간을 항전을 계속해나갔지만,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으로 고려는 점점 전국토가 황폐화되면서, 백성들은 도탄에 빠지게 된다.

 

 

그런데 몽골과의 전쟁에서 몽골군의 적장을 살해하는 등 몽골군을 두 번씩이나 무찌른 여몽항쟁의 대영웅이 탄생하게 되는데, 그가 바로 승려 김윤후이다.

 

김윤후는 정규군의 사령관도 아니고, 국가의 녹을 먹는 관리도 아닌 평범한 중의 신분이었는데, 일개의 승려가 백성들을 규합하고 리더쉽을 발휘해서, 몽골의 대군과 맞서서, 막강한 몽골군을 격퇴하는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고 한다.

 

승려 김윤후는 누구이며, 그는 어떤 전략으로 세계최강의 몽골군을 격퇴할 수 있었을가?

 

1231년에 몽골의 1차침입이 시작되고 자주와 구주에서 고려군은 몽골군과 싸워서 승리했지만, 몽골은 날랜 기병들을 앞세워서 고려의 수도 개경으로 직접 진격해들어가서, 수도 개경을 포위하고 고려를 압박했다.

 

고려는 하는 수 없이 임시적으로 몽골군과 강화를 맺었고 몽골군은 철수하였는데, 몽골이 강화의 조건으로 내걸은 사항은 막대한 양의 조공을 몽고에 바치는 것과 다루가치라고 하는 감독관을 고려에 파견하는 것이었다.

 

 

당시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무신정권의 수장 최우는 몽골군이 돌아가자 마자, 몽골과의 화친의 약속을 저버리고, 수도를 강화도로 천도하여 몽골군의 침입에 항전하겠다는 결의를 다졌다고 한다.

 

최우정권의 강화천도는 몽골에 대한 결사적인 항전의지를 대내외에 표방한 것으로, 몽골과의 화친을 모두 무효화하는 것이어서, 몽골은 그 이듬해인 1232년도에 살리타이장군의 통솔하에 2차침입을 단행했다고 한다.

 

1232년 살리타이가 이끄는 몽골군은 서경과 개경을 거쳐서, 경기도 광주를 지나 처인성에 이르렀는데, 이 처인성에서 몽골군은 아주 대단한 고려의 장수를 만나서, 더 이상 진격을 멈추고 후퇴해야만 하는 기막힌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고려에 쳐들어와 파죽지세로 서경과 개경을 짓밟고 남쪽 처인성까지 내려왔던 용맹한 몽고군의 진격을 멈추게 한 처인성의 장수는 누구였을까?

 

 

  당시 살리타이의 몽골군과 맞서 항전을 펼쳤던 처인성은 오늘날의 용인에 있는 자그마한 토성이었다. 야트막한 언덕베기에 흙으로 대충대충 쌓아서지은 둘레 400m밖에 안되는 작은 토성이었고, 이곳에 사는 백성은 천민들인 부곡민들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곳 처인성에는 백현원의 승려 김윤후라는 중이 있었는데, 승려 김윤후는 처인성의 부곡민들을 모으고 승병들을 규합해서, 몽골의 대군과 맞서 싸우기 위해 사전에 치밀한 준비를 했다고 한다.

 

김윤후는 몽골군들이 북쪽에서 쳐들어오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승병들까지 동원해서 돌멩이와 죽창, 화살 등 싸울 수 있는 모든 무기가 될만한 것들을 다 모으고, 전략을 수립해서 몽골군과의 전투에 대비했다고 한다.

 

마침내 살리타이가 진두지휘하는 몽골군이 처인성을 포위하면서, 김윤후의 민병대와 몽골군간의 치열한 공방전이 개시되었다고 한다.

 

 

몽골군이 노도와 같은 맹렬한 기세로 처인성을 기어오르면서, 처인성에 대한 공격을 펼쳤으며, 처인성안의 민병대는 악착같이 성을 사수하면서, 아슬아슬한 공방전이 연일 이어졌다고 한다.

 

그런데 이렇게 맹렬한 기세로 처인성으로 밀고들어왔던 몽골군이 갑자기 기세가 꺾이고, 철수하는 일이 발생했다고 한다. 어떻게 된 일일까?

 

몽골의 최고지휘관인 살리타이가 전투중에 사살당하고 만 것이다. 몽골의 최고사령관 살리타이는 처인성을 향해서 부하들과 함께 말을 타고 달려오고 있었는데,

성위 망루에 있던 고려민병대의 지도자 김윤후가 곧바로 화살을 쏴서, 적장 살리타이의 머리를 관통시켜 사살해버렸다고 한다.

 

몽골군의 최고사령관이 처참하게 죽어버리자, 기세등등했던 몽골군은 크게 사기가 꺾이게 되었고, 결국 몽골군은 처인성공략을 포기하고 철수해버렸다고 한다.

 

 

원래 몽골군은 최고지도자가 죽으면 몽골군 스스로 후퇴하는 것이 관행이라고 한다.

정규군대도 아니고, 고작 천민신분이었던 처인성의 부곡민들이 정규군들도 해내기 힘든 천하제일의 몽골의 대군을 물리치는 대업을 이룬 것이다.

또한 처인성의 승리를 이끈 최고의 공로자는 바로 승려 김윤후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몽골 2차침입군의 최고사령관 살리타이를 죽임으로써 손쉽게 몽골군을 물리칠 수 있었기에, 몽골군과의 전투의 최고의 공로자는 승려 김윤후인 것이다.

 

그런데 살리타이를 사살한 주인공에 대한 논란이 일어나고 있다고 한다.

 

고려사 열전 김윤후에는 몽골원수 살리타이가 와서 처인성을 공격하자, 김윤후가 그를 활로 쏴서 죽였다고 기록되어 있으므로, 몽골원수 사르탁(살리타이)를 죽인 사람은 승려 김윤후가 맞는 것이다.

그리고 고려사의 기록을 살펴보면, ‘사르탁(살리타이)이 처인성을 공격하자, 성안으로 피난와있던 승려가 그를 활로 쏘아서 죽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앞의 기록에서는 직접 김윤후가 살리타이를 죽였다고 기록했고, 다른 기록에는 승려가 살리타이를 죽였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여기서는 앞뒤 문맥상 살리타이를 죽인 인물은 김윤후임을 암시해주고 있는 것이다.

 

 

김윤후가 몽골군을 격퇴하는 데에 큰 공을 세우자, 고려조정에서는 처인성의 승리를 크게 기뻐하면서, 처인성승리의 일등공신인 김윤후에게 큰벼슬과 후한 상을 내렸다고 한다.

 

그려조정에서는 김윤후에게 상장군의 큰벼슬을 주었다고 하는데, 김윤후는 자신은 몽골군과의 전투에서 활과 화살을 갖고있지 않았는데, 어찌 이렇게 큰 상을 받을 수가 있겠는가 라고 말하면서,

자신에게 내려진 상장군의 벼슬을 거부했다고 한다. 결국 고려조정에서는 김윤후의 거듭된 거부에 상장군보다 훨씬 낮은 섭랑장으로 임명했다고 한다.

 

그리고 천민출신이 살던 처인성지역은 부곡에서 주현으로 승격되었다고 한다.

, 천민이었던 이곳 주민들은 자신의 고장이 주현으로 승격됨으로써, 천민의 신분에서 벗어나서 평민으로 신분상승을 하게 된 것이다.

 

상장군은 고려시대에 군대의 최고사령관직에 해당한다. 고려시대의 군대는 중앙에 2군이 있었는데, 응양군과 용호군이라고 하는 2군의 최고사령관이 바로 상장군이며, 상장군은 정3품의 높은 벼슬에 해당한다.

오늘날로 따지면 행정부의 각부의 차관보급의 높은 벼슬에 해당한다.

 

 

이렇게 김윤후가 자신은 전투에서 활과 화살을 갖고있지 않았다고 조정에 나와서 보고했다고 한다. 이러한 김윤후의 말 때문에 일각에서는 몽골의 원수 살리타이를 죽인 것은 김윤후가 아니라, 처인성의 이름없는 병사였을 것이라고 하는 가설이 제기되고 있다고 한다.

 

그렇지만 김윤후가 고려조정에 와서 이같은 보고를 한 것은, 그가 겸손의 덕을 보여주기 위해서 하는 지극히 의례적인 말일 수도 있다고 본다.

 

평소에는 자신을 낮추고 도를 닦고있는 중의 신분이기 때문에, 자신의 공로를 낮추고 겸양의 미덕을 발휘하기 위해서, 행한 의례적인 말일 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승려 김윤후가 고려사열전의 기록에 나온 데로, 진짜 성밖에서 말에 타고있던 적장 살리타이를 활로 쏴서 죽인 인물이 맞을 수도 있다고 본다.

 

아뭏튼 승려 김윤후와 부곡민, 그리고 승병들이 일치단결해서, 살리타이의 몽골군을 물리치자, 기세등등했던 몽골군은 본국으로 후퇴해버렸다고 한다.

 

이렇게 물러났던 몽골군은 그 후에도 계속헤서 고려로 쳐들어왔으며, 고려와 몽골간의 피말리는 총 6차례 전쟁이 벌어졌다고 한다.

 

 

1932년 몽골군이 또다시 고려에 쳐들어왔는데, 몽골의 3차침입이 또다시 전개되었다고 한다.

몽골군의 3차침입 때부터 몽골군의 규모가 훨씬 더 커져서 대군이 처들어왔다고 하며, 몽골군은 한반도의 남쪽에 있는 전라도와 경상도지방까지 휩쓸고 다니면서, 그야말로 고려땅은 전국토가 초토화되어버리는 상황까지 내몰렸다고 한다.

 

이 몽고의 3차침입 당시에 황룡사9층탑이 불타서 없어져버렸을 정도로 전국토가 황폐화되었고, 백성들은 삶은 매우 피폐지게 되었다.

 

이렇게 전란으로 백성들의 삶이 피페해지고 군사들의 사기가 떨어지자, 고려조정에서는 불심의 힘으로 몽골군을 쳐부술 수 있다는 일념으로, 팔만대장경을 만들게 된다.

몽골군의 거듭된 침입으로 떨어질 데로 떨어진 고려백성과 군사의 사기를 진작시키기 위해서 벌이는 일종의 사기진작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1941년 몽골군의 3차침입을 지시했던 몽골의 우데이칸이 사망함으로써, 고려에 침입했던 몽골군은 다시 철수하게 되고, 유럽에서는 헝가리까지 진출했던 몽골군도 철수하게 되면서, 유럽이 몽골의 수중에 넘어가는 상황을 간신히 모면하게 된다.

 

그리고 몇해가 지나서, 몽골에서는 또다른 황제 구육칸이 즉위하였고 1247년에 몽골군의 제4차 침입이 전게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전쟁을 주도했던 구육칸이 2년 만에 사망함으로써, 다시 몽골군은 철수해버렸다고 한다.

 

 

그리고 1253년에 몽골은 5번째 고려침략을 또다시 시도하였다. 몽골군은 징키스칸의 조카인 예쿠대왕이 대군을 거느리고 고려로 쳐들어왔다고 한다. 몽골은 고려가 다시 개경으로 환도하지 않았다는 것을 구실로 삼아서, 고려로 쳐들어왔다고 한다.

 

고려로 다섯 번째로 쳐들온 이번의 몽골군은 이전의 몽골군과는 다르게 규모면에서나 기술면에서나 막강한 군대였다고 한다.

이번의 몽골군은 이전과 달리 발석차와 운제 등 성을 공격하고 깨부술 수 있는 막강한 공성용무기를 갖고 왔으며, 지금의 수류탄과 비슷한 폭탄무기도 갖고 있다고 한다.

 

중국의 금나라와 전쟁을 치르고 서쪽으로 사마르칸트나 러시아, 동유럽까지 진출해서 오랜 전쟁을 벌여왔던 몽고군은, 현지의 군사기술자를 포섭하고 수많은 군사적 경험과 지식축적이 이루어졌고,

성을 효과적으로 공격할 수 있는 각종 업그레이된 공성무기들을 개발해 내었던 것이다.

 

 

더욱이 몽골군은 자신들이 점령했던 거란족과 여진족의 병사들까지 군대에 포함시켜서, 역대 몽골군 중 가장 규모가 크고 막강한 전투력을 지닌 몽골군을 만들어 또다시 고려땅에 쳐들어온 것이다.

 

고려는 또다시 몽골의 대군을 맞아 일촉즉발의 위기에 휩쌓이게 되었고, 몽골의 대군은 파죽지세로 고려의 남쪽까지 물밑듯이 내려갔다.

 

다섯번째로 고려를 침공한 몽골군은 서경과 개경을 지나서, 충주 앞에 도달했는데, 바로 이곳에 있는 충주성은 고려의 전략적요충지라고 한다.

 

충주성이 몽골군에게 뚫리면, 한반도 남쪽에 있는 전라도와 경상도의 곡창지대가 몽골군의 수중에 들어가게 되고,

그렇게 되면 강화도에 있는 고려조정의 돈줄과 병참물자 지원은 완전 끊어지게 되기 때문에, 돈줄이 끊어지고 물자가 떨어진 고려조정은 강화도에서 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고려조정이 강화도에서 나오면 그것은 항복을 의미하는 것이다.

 

 

고려와 몽골간의 최대의 격전지가 되어버린 충주성에는 바로 2차 몽골전투의 영웅인 김윤후장군이 성주로 있었다고 한다.

김윤후장군은 처인성전투에 이어서 또다시 충주성전투까지, 몽골군과 2번씩이나 전투를 치르는 위급한 상황에 처하게 된 것이다.

 

몽골군은 즉각 충주성을 포위해버리고 각종 공성무기를 총동원해서, 충주성에 맹공을 퍼부었다고 한다.

 

충주성의 성민들은 김윤후장군의 지휘아래 일치단결해서 결사항쟁을 벌였다고 한다. 김윤후장군과 충주성백성들은 몽골군과의 치열한 전투를 벌이면서, 끝도모를 항전을 계속 벌어나가고 있었다.

 

그렇지만 몽고군과의 전투가 70일이나 계속되어가자, 성안에는 점차 식량과 물자가 떨어지고 성민들의 사기도 점차 떨어졌으며, 오랜 전쟁에 지친 백성들이 점차 동요하기 시작했는데, 김윤후는 동요하는 백성들의 마음을 잡기위해서 특단의 조치를 내렸다고 한다.

 

 

김윤후장군은 성안에 있는 백성들을 모아놓고 몽골군을 물리칠 수 있도록 힘을 다해 싸운다면, 노비등 평민이든 그 신분을 가리지 않고, 반드시 모든성민에게 벼슬을 내리게 해주겠다고 말하고는,

성안에 있는 노비문서들을 모두 불태워버렸다고 하며, 몽골군에게 빼앗았던 소와 말등을 모두 성민들에게 골고루 나누어주었다고 한다.

 

그러자 성민들의 사기가 다시 크게 불타올랐다고 하며, 김윤후장군을 중심으로 굳게 뭉친 성민들은 목숨걸고 몽골군과 싸워서, 결국 충주성을 방어하는데 성공했다고 하며, 몽골군대는 더이상의 전투를 포기하고 퇴각해버렸다고 한다.

 

처인성전투의 승리에 이은 김윤후장군의 뛰어난 리더쉽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으며, 충주성의 모든 백성들이 신분의 귀천을 초월해서, 한데 뭉쳐서 싸운 결과, 천하무적인 몽골의 대군을 물리칠 수 있게 된 것이다.

 

김윤후가 이끄는 충주성 성민들이 세계최강의 몽골대군과 싸워서 이길 수 있던 요인은 바로 김윤후의 탁월한 리더쉽 때문이었다고 풀이할 수 있다.

 

 

김윤후는 고작 정6품의 낭장의 벼슬에 있었지만, 성민들의 사기를 진작시키기 위해서, 노비문서를 없애겠다고 하는 파격적인 제안을 내놓았고,

몽골군에게서 노획한 가축과 물자들을 신분을 초월해서 모든 성민에게 골고루 나누어줌으로써, 성민들의 단결의식을 고취하고 충성심을 이끌어냈던 것이다.

 

다른 수많은 성들의 성주들과 야전지휘관들이 몽골군이 처들어온다고 소식에 도망가는 경우가 허다한데,

김윤후는 충주성에 끝까지 남아서, 백성들의 마음을 잘읽고 그들의 마음을 보다듬고 격려하는 등 진정성있는 리더쉽을 보여줌으로써, 최강의 전투력을 이끌어내어 결국 몽골군을 물리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지휘관 한사람의 역할이 어떤가에 따라서, 전쟁의 승패가 달라지게 되며, 나라를 위기의 순간에서 구출해낼 수가 있는 것이다.

 

이 충주성전투의 승리로 김윤후는 처인성에 이어 두 번째로 몽골군을 물리쳤고, 상장군의 벼슬을 받았으며, 공이 있는 백성들은 노비뿐만 아니라 백정들이나 천민까지도 김윤후장군의 약속대로 상을 받았다고 하며 관노들은 모두 평민으로 승격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충주성은 몽고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포상으로 국원경으로 승격했다고 한다. 김윤후가 싸웠던 두 지역이 모두 승격이 이러졌는데, 처인부곡은 처인현으로, 충주목은 국원경으로 둘 다 승격이 이뤄진 것이다.

 

처인성전투의 승리에 이어 또다시 충주성전투의 승리를 거둔 김윤후는 그 높은 공이 인정받아서 동북면병마사로 승진하였으며, 그후 추밀원부사를 거쳐서 수사공 우복야까지 승진했다고 한다.

수사공 우복야는 정2품의 고위관직으로서 지금의 장관급에 해당하는 최고위직 벼슬이었다.

 

충주성전투에서 패배를 한 몽골군은 자기나라에서 내란까지 일어나자, 결국 본국으로 철수버리고 말았다.

 

김윤후는 평범한 승려의 신분으로 있다가, 갑자기 몽골군의 침략을 당한 위기의 순간에서 탁월한 리더쉽을 발휘해서, 막강한 몽골대군을 두 번이나 물리친 고려의 가장 뛰어난 지휘관이었으며, 대몽항쟁의 대표적인 아이콘이라고 할 수 있다.

 

뛰어난 지휘관 한사람이 백만명의 대군을 물리칠 수 있다는 옛말이 있다. 실제로 고려와 몽골간의 전쟁중에는 많은 야전지휘관들이나 장수들이 몽골군대가 쳐들어오자, 제대로 싸워보지도 않고 도망가거나, 피해버리는 경우가 허다하게 일어났다.

 

 

국가의 녹을 먹는 야전지휘관과 군사들은 자기만 살겠다고 도망가 버리는 상황에서, 전혀 국가의 녹을 먹지않던 승려 한사람이 군인이 아닌 백성과 천민들을 규합해서, 병사보다 더욱 강인하고 용맹한 전투력을 만들어냈다고 하는 것은 정말 놀랍고도 기적같은 일이며, 김윤후의 뛰어난 리더쉽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고 본다.

 

김윤후의 2번의 승리는 정규군이 아닌 평범한 백성이나 천민들을 통해서 이룩한 쾌거라는 점을 되새겨볼 필요가 있는데, 그의 뛰어난 지략과 지도력이 수많은 백성들을 살리고 나라를 위기에서 구해냈던 것이다.

 

세상에는 많이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지만, 승려 김윤후는 위기의 순간에서 살신성인의 정신으로 나라를 위기에서 구하고, 백성들을 살려낸 진정한 고려의 영웅이라고 할 만하다.

 

거란족이 고려에 침입했을 때에는 강감찬이 거란족을 물리친 최고의 영웅이라면, 몽골족이 쳐들어왔을 때에는 바로 김윤후가 몽골대군을 물리친 최고의 영웅이라고 할 수 있다.

 

종래에 우리나라에서는 외적을 물리친 3대영웅으로 을지문덕, 강감찬, 이순신을 꼽고 있지만, 이제는 한사람 더 추가시켜서 외적을 물리친 4대영웅으로 을지문덕·강감찬·이순신에 이어 김윤후의 이름을 올려놓아야 할 것이다.

 

 

 

 

 

 

 

 

Posted by 프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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