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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룡의 사망원인과 영화, 실전무술 동영상, 부인과 애인 베티 팅페이

 

아시아에서 무술영화가 크게 붐이 일어났던 시대는 1970년대로 이당시 무술영화의 히로인으로, 동양을 넘어 세계적으로 큰 명성을 떨친 인물이 바로 이소룡이다.

 

아시아에서 크게 붐을 일으키면서 높은 인기를 끌었던 권격무술영화는 70년대 이소룡이라고 하는 걸출한 스타를 만들어냈다.

엄격히 말하면 권격무술영화는 이소룡에 의해서 시작되고, 이소룡에 의해서 끝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만큼 이소룡이 주연으로 출연한 무술영화는 무술액션이 완벽했고, 영화구성의 품질이 매우 높았으며, 특히 이소룡의 놀라울만큼 빠르고 절도있는 발차기기술은, 하나의 예술작품을 보는 듯 완벽한 아름다움을 창조하면서, 영화의 품질을 한층 더 높여놓았다.

 

 

1970년대 전반, 다른 무술배우들이 결코 따라올 수 없는 이소룡만의 화려하고 절도있는 무술액션영화가 만들어져 상영되면서, 아시아를 넘어 전세계인들을 열광시키면서, 이소룡은 세계적인 무술스타로 우뚝 솟아오르게 된다.

 

이소룡은 71년도부터 당산대형’ ‘정무문’ ‘맹룡과강’ ‘용쟁호투등 품질높고 완성도 높은 무술영화들을 선보이면서, 단번에 세계적인 무술스타로 급부상하면서 세계의 수많은 젊은이들을 무술영화의 세계로 푹 빠져들게 만들었고, 권격무술영화의 붐이 아시아를 넘어 전세계로 확산되는 계기를 마려하게 된다.

 

이소룡은 특유의 박진감 넘치는 세련된 무술연기를 선보여서, 전세계의 수많은 관객들의 갈증을 속시원하게 해소시켜주었고, 그 이전까지 무미건조하기만 했던 무술권격영화를 예술적 경지로까지 끌어올린 무술영화계의 전설이었다.

 

 

이소룡이 홍콩으로 건너가서 골든하베스트사와 손을 잡고 1971년도부터 출연한 당산대형’ ‘정무문’ ‘맹룡과강’ ‘용쟁호투4편의 영화들은 아시아와 세계에서 엄청난 흥행대박을 터뜨리면서, 이소룡이라는 유일무이한 무술스타의 화려한 출현을 세상에 알렸다.

 

이렇게 이소룡은 2년동안 홍콩에서 4편의 무술영화에 출연해서, 무술스타로 큰 명성을 떨치며 한창 인기스타로 급부상하던 상황에서, 갑작스럽게도 만 32살의 젊은 나이에 사망하고 만다.

이제막 그의 영화들이 세계에 알려지면서, 큰 찬사와 호평이 이어지면서 이소룡에 대한 세계적인 관심이 크게 증폭되던 시기에, 이소룡은 허무하게도 32살의 젊은나이에 이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하늘은 영웅이나 천재를 시기한다고 했던가? 이소룡이 너무 천재적인 재능으로 세계적인 인기를 싹쓸이해가자, 이소룡의 뛰어난 재능을 시기한 신이 이소룡에게 저주를 내린 것은 아니었을까?

 

 

이소룡이 이제 겨우 4편의 영화들에 출연했을 뿐인데, 4편의 영화들이 모두 세계적인 흥행성공을 거두는 와중에서, 그렇게 강건했던 이소룡이 32살의 젊은나이에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그의 사망에 관련한 의혹들이 불거져나오게 된다.

 

그렇게 젊고 강했던 이소룡의 사망이유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이소룡의 공식적인 사망원인은 이소룡은 평소에 뇌종양을 앓고있었는데, 갑작스럽게 뇌부종이 발생하여, 뇌출혈을 일으켜 사망했다고 한다.

이소룡의 공식적인 사망시기는 1973720일로서 이소룡은 자신의 애인인 정패(베티 팅페이)의 아파트에서 사망했다고 한다.

 

이소룡이 사망당시에 그를 집도했던 퀸 엘리자베스병원에서 밝힌 공식적인 이소룡의 사망원인은 뇌부종으로 인한 뇌출혈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러한 이소룡의 사망원인 발표에 대해, 수많은 의혹들이 제기되었으며, 이소룡의 죽음에 관해서, 숨겨진 음모가 있다는 주장들이 팽배하게 제기되었다.

이소룡이 사망하기 전까지만 해도, 용쟁호투 영화촬영을 왕성하게 펼쳐왔으며, 또한 이소룡은 차기작품인 사망유희촬영을 곧 재개할 상황에서, 너무나도 허무하게 사망했다는 것을 홍콩의 많은 대중들은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던 상황이었다.

 

이소룡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대한 충격과 슬픔과 맞물려 많은 대중들은 이소룡의 죽음에 모종의 음모가 자리잡고 있다는 음모론들이 급속도로 퍼져나오게 되었다.

   

이소룡의 사망에 관련된 가설과 루머들

 

1. 이소룡의 소속사와 경쟁관계에 있던 홍콩의 쇼브라더스사가 고용한 살인청부업자에 의해서 암살되었다고 하는 설.

 

 

2. 이소룡이 평소에 뇌종양에 걸려서 심한 두통증세가 있었는데, 두통으로 인해 이소룡의 히스테리현상이 매우 심해지자, 이소룡을 감당하는 데에 한계를 느낀 이소룡소속사 골든하베스트사의 사장 추문회(레이몬드 쵸우)가 사주한 암살범에 의해서 암살되었다는 설.

 

3. 애인 정패(베티 팅페이)가 또다른 남성과 교제하고 있었는데, 삼각관계를 청산하기 위해서, 이소룡이 먹는 약에 독약을 넣어 독살했다고 하는 설.

 

4. 이소룡 할아버지의 묘자리를 다른 곳으로 이장했었는데, 그 이장한 묘자리의 원래 주인인 신동혼령의 저주를 받아서 사망했다는 설.

 

5. 이소룡이 미국에서 절권도장을 운영할 당시에, 이소룡에 반감과 원한을 갖고있던 무도가들에 의해서 집단린치를 당해서, 이소룡은 머리를 크게 다쳐 뇌종양에 걸렸는데, 그 뇌종양이 악화되어 사망하게 되었다는 설.

 

이렇게 이소룡의 사망과 관련해서 나돌았던 루머는 다섯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이렇게 수많은 루머를 양산시켰던 이소룡의 진정한 사망이유는 무엇일까?

 

 

이소룡의 사망과 관련된 루머들을 하나씩 살펴보면서 그 진위를 가려볼 필요가 있다.

 

첫째 쇼브라더스사가 살인청부업자를 고용해서 이소룡을 암살하도록 사주했다는 설이 이소룡 사망 당시부터 흘러나왔다.

이소룡의 소속사는 골든하베스트사로 이소룡을 스카웃해서 이소룡의 첫 번째영화인 당산대형71년도에 촬영했는데, 그 당시의 골든하베스트사는 자본력이 매우 열악했던 신생영화사였다.

 

반면 쇼브더스사는 동양최대의 자본력을 지닌 홍콩에서 가장 거대한 영화사로서, 한해 40편이 넘는 무협영화들을 제작하면서 홍콩영화계를 주도해나가는 영화사였다.

 

그런데 음모론자들의 주장에 의하면, 쇼브라더스사가 자신들과 라이벌관계에 있는 골든하베스트사에 소속된 이소룡이 엄청난 흥행돌풍을 일으키자, 이소룡을 회유해서 자신의 영화사로 스카웃하려 했다는 것인데, 이소룡이 거절하자 앙심을 품고 암살자를 시켜서 이소룡을 암살했다는 것이다. 

 

 

동양에서 가장 자본력이 뛰어났던 쇼브라더스사는 외팔이검객‘14인의 여걸’ ‘스잔나등을 크게 히트시키면서, 아시아 영화시장을 거의 장악해나갔던 영화사였는데, 굳이 암살이라는 무리수를 두면서까지 이소룡을 죽이려고 했을까?

 

더욱이 이소룡은 70년도에 홍콩으로 건너가서 영화배우가 되기 위해서, 쇼브라더스사에 문을 두드린 적이 있었는데,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쇼브라더스사에서 이소룡을 거부한 적이 있었다.

 

나이가 많고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이미 거부한 적이 있었던 이소룡을 쇼브라더스사에서 다시 스카웃하려 했다는 것도 앞뒤가 맞지 않는다.

더욱이 60년대부터 쇼브라더스사는 계속해서 많은 무협영화들을 제작하면서, 흥행에 계속 성공해나가는 시기였기 때문에, ‘암살이라는 위험한 무리수를 둘 필요가 전혀 없던 시기였다.

 

 

둘째 이소룡은 70년대 전반 골든하베스트사에 들어가 영화촬영을 해나가던 시기에, 평소에 앓고있던 뇌종양으로 인해서 두통증세로 자주 있었다고 한다. 이소룡은 이 두통증세가 점점 심해져가자, 두통으로 인한 발작성 히스테리를 부렸다고 한다.

이소룡이 한창 활동하던 1972년부터 73년도까지 골든하베스트사 본사건물과 영화촬영소에서 직원이나 스텝들에게 화를 내거나, 히스테리를 부렸다는 것은 사실이다.

 

이소룡이 골든하베스트사의 선전요원에게 폭력을 휘둘렀다거나, 방송에 출연해서 진행자에게 화를 냈다는 것도 실제 있었던 사건이다.

또한 이소룡은 자신의 홍콩진출 첫작품인 영화 당산대형의 로웨이감독에게도 화를 내고 히스테리를 부려서, 경찰까지 충돌했던 적도 있었다.

 

이렇게 이소룡이 뜻하지 않게 주변에 있는 스텝직원들에게 화를 내고, 손찌검을 했던 일이 있었는데, 이것은 이소룡이 평소에 뇌종양을 앓고 있었기 때문에, 뇌종양으로 인한 두통증세가 점점 심해졌기 때문에, 자신도 모르게 히스테리증상이 발생했던 것이다.

 

이처럼 이소룡의 뇌속이 심하게 부어오르면서, 자신도 스스로를 통제할 수 없는 히스테리증상이 수반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소룡이 이렇게 히스테리와 손찌검을 했던 경우는 매우 드문 경우에 해당하며, 평소에 이소룡은 매우 온화하고 부드럽게 주변사람들에게 대우해주었다고 한다.

 

정무문을 촬영하면서, 그당시 엑스트라로 출연했던 성룡에게 이소룡은 발차기연기를 하다가, 성룡의 턱을 실제로 가격하는 실수를 벌였는데, 이 후 이소룡은 성룡에게 세 번씩이나 사과를 했다고 하며,

영화촬영이 끝난 후에는 같이 볼링장에 가서 함께 볼링을 치는 등, 당시 엑스타라에 지나지 않았던 성룡을 위로해주기 위해서, 성심을 다할 정도로 주변스텝들에게 매우 온화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이소룡의 히스테리현상은 어쩌다가 한번 일어나는 일시적인 해프닝에 지나지 않았으며, 이런 이소룡의 히스테리 때문에 신생영화사인 골든하베스트사에 엄청난 돈벼락을 안겨줬던 세계적인 스타 이소룡을 추문회회장이 암살할 이유는 전혀 없다고 판단된다.

 

당시 자본력이 열악했던 골든하베스트사는 이소룡이 출연한 영화들이 엄청난 대박을 터뜨리면서 돈방석에 올라앉게 되었는데, 이렇게 골든하베스트사에 엄청난 돈과 명예를 안겨다준 이소룡을 몇건의 히스테리행동 때문에, 죽이도록 사주했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않는다고 본다. 

 

 

셋째 이소룡의 애인 정패(베티 팅페이)가 이소룡 외에도 다른 남자를 사귀고 있었기 때문에, 삼각관계를 청산하기 위해서 이소룡을 독살했다는 루머는 전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 병원발표에서 밝혀졌다.

  이소룡이 사망했던 그 당시의 상황으로 되돌아가보도록 하자!

 

이소룡은 1973720일경, 애인 정패(베티 팅페이)가 살고있던 구룡반도의 한 맨션에서 정패와 함께 있었다고 한다.

 

애인 정패(베티 팅페이)의 맨션에서, 이소룡은 갑자기 심한 두통을 호소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소룡은 두통증세 때문에 평소에 복용해왔던 진통제 에콰제를 달라고 정패(베티 팅페이)에게 요구했고, 정패는 이소룡에게 에콰제를 갖다주었다고 한다.

 

당시 정패가 갔다주었던 에콰제는 이소룡이 갖고다니던 진통제(아스피린의 일종)로서, 이소룡의 옷주머니에 들어있는 에콰제를 단지 심부름만 해주었다고 한다. 그런데 침실에서 에콰제를 먹었던 이소룡은 곧바로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고 한다.

 

이소룡애인 정패(베티 팅페이) 사진

 

1973720일 밤 10시경, 이소룡은 정패가 갖다주었던 에콰제를 먹고 쓰러진 후, 엠블런스에 실려서 퀸 엘리자베스 병원으로 이송되었지만, 이미 숨을 거둔 후였다고 한다.

 

퀸 엘리자베스병원과 홍콩의학계에서 이소룡의 시신을 정밀부검한 결과, 이소룡의 사망원인은 평소에 앓고있던 뇌종양에 에콰제 자극이 가해져서, 뇌부종이 발생하였고, 뇌부종에 의한 뇌출혈로 인해서 사망했다고 공식 발표하였다.

이소룡의 사망원인은 뇌부종에 의한 뇌출혈때문이라고 한다. 이것은 그당시 홍콩의하계의 공식적인 발표라고 한다.

 

 

뇌부종이라는 것은 뇌가 심하게 부어오르는 것을 말하는데, 뇌가 점점 더 크게 부어오르면서 급기야 뇌뼈와 부닥치게 되고, 그 충격으로 인해서 뇌출혈이 발생한다고 한다. 뇌부종으로 인해 뇌출혈현상이 발생하게 되면, 사람은 십중팔구 죽게된다고 한다.

 

이소룡의 애인 정패(베티 팅페이)는 이소룡이 자신의 아파트에서 사망하는 바람에, 수많은 이소룡팬들에게 공공의 적이 되어버렸고, 자신은 이소룡에게 두통약 심부름만 했을 뿐인데도, 이소룡을 독살했다는 억울한 누명을 썼던 것이다.

 

정패는 이소룡을 죽음에 이르게한 범인으로 오해받아서, ‘마녀사냥의 희생물로 전락해서, 오랜기간 결혼도 하지못한 채, 매우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가야만 했다.

정패는 이소룡 사망에 대한 오해가 전혀 풀리지 않자, 산속에 있는 절로 들어가서 10년 이상 동안 칩거하면서, 고통스럽고도 외로운 삶을 살아갔다고 한다.

 

 

90년대 초반에 정패는 혼자서 절에 들어가서, 결혼도 하지않은 채, 절에서 10년간 은둔생활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2003년도에 이소룡 사망 30주년 행사 때에, 절에서 내려와 행사에 참석한 정패(베티 팅페이)는 매우 초취해진 모습으로 나타나서, 주변의 많은 사람들을 안타깝게 했다고 한다.

 

네 번째 가설로 이소룡의 할아버지의 묘자리를 이장했는데, 그 이장한 자리가 바로 풍수신동이라는 아이의 묘자리였다고 한다.

 

머리가 비상하고 신통력이 뛰어난 풍수신동이라는 천재 어린아이가 있었는데, 이 아이가 자신의 묘자리 주변에는 그 어떤 묘자리도 만들지말 것을 경고하고 12살의 나이에 죽었다고 한다.

 

풍수신동은 만일 자신의 경고를 무시하고, 자신의 묘자리 옆에 다른 사람의 묘자리를 만들게 되면, 자신의 저주를 받아서, 그 사람의 3대까지 젊은 나이에 비명횡사하게 만들겠다고 예언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신동이라는 아이의 묘자리 주변은 풍수지리상으로 최고로 명당자리였다고 한다. 그래서 이소룡집안에서는 최고의 명당자리로 소문난 풍수신동의 묘자리옆에다, 이소룡 할아버지의 묘자리를 만들었다고 한다.

 

 

자신의 경고를 무시하고 묘자리를 옆에 만들었기 때문에, ‘풍수신동의 저주가 이소룡의 집안에 내려졌다고 하며, 이소룡의 아버지도 풍수신동이 예언한 시기에 죽었다고 하며, 이소룡과 이소룡의 아들 또한 풍수신동이 예언한 시기에 모두 사망했다고 한다.

 

풍수신동이라고 하는 혼령의 저주를 받아서, 이소룡의 3대가 모두 신동의 예언대로 사망했는데, 이소룡의 3대가 사망한 시기가 신동의 예언한 시기와 일치하고 있어서, 큰 놀라움을 안겨다주고 있다.

풍수신동의 저주 때문에 이소룡과 그 아들이 젊은 나이에 죽었다는 루머는 신빙성이 매우 높아보인다.

 

이처럼 이소룡의 사망원인에 대해서 수많은 루머들이 난무하게 되자, 이소룡의 부인인 린다 에머리가 93년도에 미국의 한방송에 출연해서, 이소룡의 사인을 직접 밝혔다고 한다.

 

 

린다 에머리는 이소룡이 평소에 뇌종양을 앓고 있었다고 밝혔다고 한다. 이소룡이 사망하기 1년전 경 이소룡이 심한 두통증세를 호소하자, 린다 에머리는 이소룡과 함께 LA에 있는 병원으로 가서, 정밀검사를 받았다고 한다.

 

당시 검사결과 충격적인 진단이 내려졌다고 하는데, 담당의사는 린다 에머리에게 이소룡의 머리에 혹이 자라나는 뇌종양 증세가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고 한다. 또한 담당의사는 이소룡이 앞으로 1년을 넘기지 못할 것이라고 말해주었다고 한다.

 

이것은 이소룡의 부인 린다 에머리가 직접 기자들에게 전해준 내용이어서, 이소룡 죽음과 관련된 가장 확실한 사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뇌종양에 걸린 이소룡이 시한부 삶을 살아가게된 사실을 미리 알게된 린다 에머리는 그 후에 이소룡이 홍콩 미녀여배우 정패를 사귀는 등 외도를 하였지만, 그의 외도를 알면서도, 시한부 삶을 살아가는 이소룡이 너무 불쌍해서 그의 외도를 눈감아주었다고 한다.

 

 

이소룡의 사망은 평소에 앓고있던 뇌종양이 근본원인이었고, 두통약으로 먹은 에콰제가 뇌를 크게 자극하면서 갑자기 뇌부종이 발생하여 뇌출혈이 일어난 것이 직접적인 사망원인이었다고 한다.

 

그러면 이소룡의 사망의 근본원인이 되었던 뇌종양은 왜 생긴 것일까? 이소룡은 19세 때부터 미국으로 건너가서, 쿵푸도장과 절권도도장을 운영하면서 무도가의 삶을 살아갔는데, 자신의 무도를 완성시켜나가는 과정에서 주변에 있는 가라데의 사범, 쿵푸의 고단자등 수많은 무도가들의 도전을 받았고 이들 무술고단자들과 목숨을 건 실제 대결을 많이 벌였다고 한다.

 

 

이소룡은 자신에게 도전하는 가라데사범과 쿵푸 고단자들의 일대일 대결에서 모두 물리치고 승리를 거뒀다고 한다.

그런데 이소룡에게 패배한 무도가들이 이소룡에게 보복하기 위해서, 폭력배들을 고용해서 이소룡에게 기습적으로 집단린치를 가하는 사건이 발생했다고 한다.

 

이소룡이 제임스 코반과 같이 영화구상을 위해서, LA공항에서 대기하고 있을 때에, 10여명의 폭력배들이 몽둥이와 쇠파이프로 두사람에게 집단 린치를 가했으며, 이당시 이소룡은 무방비상태에서 이들 폭력배들에게 당할 수밖에 없었고, 그후 병원에서 8개월 이상 입원치료를 받았다고 한다.

 

 

이렇게 자신을 시기했던 무도가들의 사주를 받은 폭력배들에게 집단린치를 당하고 회복되었지만, 이당시의 충격으로 이소룡의 머릿속에 혹이 생겨서, 뇌종양으로 진행되었을 것으로 린다 에머리는 판단하고 있다고 한다.

 

이소룡이 만 32(실제나이 34)의 젊은 나이에 안타깝게도 사망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이소룡이 자신의 무도를 완성해나가는 과정에서, 겪어야 했던 수많은 무도가들과의 대결 때문이었다고 보여진다.

이소룡의 은막에서는 멋지고 화려한 무술액션스타였지만, 은막 밖에서는 무술의 완성을 이루기 위해서, 온갖 노력을 다하는 무도가의 한사람이었던 것이다.

 

세계적인 무술스타로 급부상했던 이소룡이 너무나도 젊은 나이에 갑작스럽게도 사망해버리자, 이소룡의 죽음을 안타까워했던 수많은 사람들이 이소룡의 죽음을 액면그대로 받아들어지 못하고, 이러한 음모나 루머들을 만들어내었던 것으로 풀이된다.

 

  이소룡 아들 브랜든 리 사진

 

이소룡과 린다 에머리의 아들 브랜든 리는 1993년도에 28세의 젊은나이에 사망하게 되는데, 브랜든 리는 당시 드라마 크로우를 촬영 도중에, 전혀 예기치않은 총기사고로 숨졌다고 한다.

크로우촬영장에서 총에 맞는 장면을 촬영하다가, 상대방이 쏜 총에 실제의 탄환이 들어있었고, 실제 총탄을 맞은 브랜든 리는 곧바로 즉사하고 말았다고 한다.

 

시애틀 레이크뷰 공동묘지에 있는 이소룡의 묘지

 

이소룡의 부인 린다 에머리는 1973년 남편인 이소룡의 시신을 시애틀로 가져와서, 레이크뷰 공동묘지에 이소룡의 묘를 만들어서 그의 시신을 매장했다고 한다. 이소룡의 아들 브랜든 리의 시신도 이 레이크뷰 공동묘지의 이소룡묘 바로 옆에 함께 묻었다고 한다.

 

 

이소룡의 부인 린다 에머리는 이소룡 사후에 시애틀로 이주했는데, 1991년 시애틀의 증권사의 임원인 브루스 캐드웰이라는 남자와 재혼해서 잘 살고 있다고 한다. 

린다 에머리는 비록 다른 남자와 재혼했지만, 자신의 이름에 죽은 이소룡의 성도 함께 넣어서 린다 리 캐드월이라는 이름을 사용할 정도로 아직도 이소룡을 잊지못하고 있다고 한다.

 

린다 에머리는 브루스 캐드웰과 재혼하기 전인 1988년도에 탐 블리커라는 남자와 먼저 재혼했는데, 2년 만에 파경이 났다고 한다. 린다 에머리가 탐 블리커와 파경이 난 이유는 린다 에머리가 이소룡의 흔적에서 전혀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소룡의 부인 린다 에머리 사진

 

린다 에머리는 탐 브리커와의 짧은 결혼생활을 청산하고 다시, 93년도에 브루스 캐드웰이라는 부동산업자와 재혼했는데, 그는 린다 에머리가 이소룡을 기리는 마음을 잘 이해해주는 아량이 많은 남성이라고 한다.

 

린다 에머리는 남편 캐드웰과 함께 현재 미국 아이다호주의 보이즈에서 살고있으며, 이소룡의 고유의 가르침을 보존하고 전수하기 위해서, ‘브루스리재단을 설립해서 운영하고 있다고 한다.

  

 

이소룡의 용쟁호투하이라이트 동영상 보기

 

 

 

 

 

 

 

 

 

 

 

 

이소룡의 실전무술 동영상

 

 

 

 

 

 

 

 

 

 

 

 

 

 

 

 

 

 

 

 

 

 

 

 

 

 

Posted by 프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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