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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6.08.14 가수 이수미 자해사건의 진실, 피습사건, ‘여고시절’ 듣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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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대 인기여가수) ‘아궁이여가수 이수미의 피습사건의 진실, 고백 나이

 

리얼다큐방송 아궁이’ 174회에서 우리연예계에서 흑막에 가려져왔던 여가수의 피습사건을 다루어서, 많은 사람들의 큰 주목을 받았다.

 

우리가요계의 전성시절이라고 할 수 있는 70년대에, 신데렐라처럼 톱스타의 반열에 올라 큰 인기를 누렸던 여가수 이수미는 1973년도에 갑자기 터진 피습사건으로 인해서, 전국민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안겨다 주었고, 이수미 자신은 가수로서 심한 이미지 타격을 받게된다.

 

1970년대 초반 여고시절이라는 노래 하나로 일약 국민여가수로 급부상하면서, 절정의 인기를 누렸던 여가수 이수미는 그당시 가장 잘 나가는 톱스타였다.

 

 

70년대 시절의 분위기에 가장 잘 맞는 청순가련형의 미모와 특유의 애절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여고시절을 불러서, 대중적으로 폭팔적인 인기를 끌면서, 70년대를 대표하는 여가수로 이름을 크게 떨쳤던 이수미는 왜 갑자기 피습사건에 휘말렸던 것일까?

 

73년도에 터진 이수미 피습사건으로 인해서,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올랐던 그녀의 이미지는 큰 타격을 받게 되고, 그녀의 인기 또한 내리막길을 걷게 되었다고 한다.

 

1973년도에 터진 이수미 피습사건의 진실을 무엇일까?

 

이수미는 kbs가 주최했던 목포노래경연대회에서 무려 5번이나 우승했던 노래를 잘했던 고등학생이었는데, 너무도 노래를 잘해서 작곡가선생이 그녀를 서울로 불러서, 가요계에 데뷔시키게 된다.

 

 

이수미는 단아한 미모와 부드럽고 여성적인 보이스로 그당시 큰 주목을 받았으며, 1971년도에 때늦은 후회지만으로 데뷔하게 되는데, 1972년 발표한 여고시절로 그해 방송사의 가수상을 휩쓸면서, 최고의 여가수로 우뚝 솟게 된다.

 

이수미의 최고의 히트곡인 여고시절은 이수미의 부드럽고 애절한 보이스와 슬프면서도 감미로운 멜로디로 수많은 대중들의 가슴을 사로잡으면서, 폭팔적인 인기를 끌게 되었고, 이수미를 한국 최고인기 여가수의 반열에 올려놓게 된다.

 

우리가요계에 데뷔한 지, 1년밖에 안된 이수미는 여고시절이라는 노래 하나로 대한민국 대표여가수로 자리메김하게 되는데, 지금의 아이유 정도로 큰 인기를 끌었다고 보면 정답이다.

 

그 당시 이수미의 인기를 꺾을 만한 국내여가수는 거의 없었다고 보는 게 정답이다. 이렇게 단번에 여고시절이란 노래 하나로 최고의 스타덤에 올랐던 이수미는 정말 그당시의 정서로는 영원히 최고의 정점에서 내려오지 않을 것만 같은 시절이었는다.

 

이수미는 그당시 매우 청순가련형의 외모를 갖추고 있었는데, 지금의 미인의 기준과 그당시의 미인의 기준이 많이 달라서, 현재의 젊은세대들의 시각으로는 다른 견해를 가질 수 있지만, 그당시의 기준으로는 이수미는 청순한 미인으로 남자들의 높은 인기를 끌었었다.

 

 

지금의 미인의 개념은 눈이 크고 이목구비가 뚜렷하게 준서구적으로 생긴 여성이 미인으로 평가받지만, 1970년대 초반에는 지금처럼 성형수술이 없던 시기여서,

이수미처럼 부드럽고 동양적인 이미지, 그리고 여성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여성이 미인으로 평가받던 시절이었다.

 

그당시 이수미는 청량음료처럼 맑고 청순한 이미지로, 수많은 남성들의 가슴을 사로잡으면서, 그녀의 인기는 더욱 고공행진을 거듭하고 있었다.

또한 여가수 이수미는 tv에서 노래하는 모습 자체가 대중들에게는 몽환적이고 신비로운 모습으로 다가왔는데, 이것은 다른 여가수에게서는 볼 수 없는 이수미만의 청순하고 독특한 매력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당시 이수미와 견줄 수 있는 여가수로 방주연이 있는데, 방주연도 1973년도에 자주색가방등을 발표하면서, 대중적으로 큰 인기를 끌던 여가수다.

 

그당시 방주연과 이수미는 라이벌구도를 형성하면서, 우리 대중가요계의 인기를 양분해갔는데, 남자가수로 남진과 나훈아가 인기를 서로 양분하면서 멋진 라이벌구도를 형성해간 것처럼,

이수미와 방주연도 대중적인 인기를 서로 양분하면서, 멋진 라이벌구도가 형성되어 더욱 인기에 탄력이 붙었다고 한다.

 

그런데 73년도에 갑자기 터진 어떤 사건으로 인해서, 최고의 인기를 끌었던 이수미는 이미지에 심각한 타격을 입고, 급전직하 그녀의 인기는 크게 추락하고 만다.

 

 

최고의 여가수로 승승장구하던 이수미의 인기를, 단번에 추락시켰던 그 사건은 이수미에게는 치명타를 안겼으며, 이 사건으로 인해서 이수미의 인기를 서서히 하락하고 만다.

 

이수미는 1073년도에 괴한으로 피습을 받아서 출혈을 입고, 병원에 입원하고야 만다.

이수미가 대천해수욕장에 놀러가서,

해변가에 있다가 갑자기 나타난 어떤 괴한으로부터 습격을 받았는데, 그가 휘두른 흉기에 복부에 큰 상처를 입고서 병원에 입원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이수미는 20대 중반의 괴한이 휘두른 흉기에 찔려서 엄청난 상처를 입고 병원에 입원했는데, 무려 16cm나 되는 큰 상처였다고 한다.

 

그런데 며칠 후에 이수미는 이사건 내용을 번복했다고 하는데, 이수미는 괴한에게 피습당한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자해했다고 발표한 것이다.

 

이수미의 번복내용은 이렇다고 한다. 이수미는 대천해수욕장에 방송차 왔는데, 이곳에서 그동안 사귀어왔던 남자 이씨와 만나게 되었는데, 이씨가 갑자기 자신에게 관계를 청산하자고 요구해왔다는 것이다. 이수미가 사귀었던 이씨는 처자식이 있는 유부남이었다고 한다.

 

이수미씨는 하늘 같이 믿고 따랐던 이씨로부터 청천벽력과도 같은 이별통보를 받고, 크게 마음의 상처를 받은 나머지, 스스로 면도칼을 꺼내서 자해를 했다고 한다.

 

, 이수미가 처자식이 있는 유부남과 밀접한 관계를 맺어왔는데, 그 유부남이 일방적으로 이별을 통보했다는 것이며, 이에 크게 상처를 받은 이수미가 스스로 자해를 했다고 한다.

 

 

 

이 소식이 신문과 뉴스를 통해서, 전국으로 방송되어 나가면서 대중들은 엄청난 충격을 받았고, 최고의 인기가수였던 이수미의 이미지는 엄청나게 실추되어버리고 만다.

 

그동안 청순가련한 미모와 순수한 이미지로 대중들로부터 사랑을 많이 받아왔던 이수미의 추잡스러운 치부가 백일하에 드러나고 말았기 때문에, 대중들의 실망이 엄청나게 컸던 것이다.

그당시 보수적인 사회분위기가 강했던 시대이기 때문에, 21살의 이수미가 유부남을 사귀었다는 것 자체가 결코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다.

 

 

이수미의 자해주장에 대한 의문점

 

처음에는 분명 여가수 이수미가 괴한으로부터 피습을 당했다고 보도했다가, 다시 이수미의 번복으로 스스로 자해를 했다는 내용으로 바뀌어서, 대중들은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어떤 것이 진실일까?

 

그 당시의 상황을 보도한 신문내용을 살펴보면 이렇다.

이수미가 여고시절로 데뷔할 당시에 그녀를 뒷바라지해주었던 조씨가 그당시에는 실직상태로 지내었는데, 조씨가 이수미를 찾아와서 50만원을 빌려달라고 했다가 거절당한 적이 있다고 한다.

 

또한 이수미가 교제를 해오던 이씨가 대천해수욕장에 실제로 왔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당시 이수미의 인기가 크게 상승하고 있던 시기라는 점이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경찰은 비록 이수미가 자해했다는 진술을 받았지만, 이들 중 누군가가 고의적으로 이수미를 습격한 것으로 추정하고, 수사를 벌였다고 한다. 

, 그당시의 경찰도 이수미가 자해했을 가능성은 낮다고 보고있으며, 이수미의 주변사람 누군가에 의해서, 고의적으로 습격을 받았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 것이다.

 

이수미는 유부남으로부터 실연을 당해서, 스스로 자살을 하기위해서 자해를 했다고 진술했지만, 그당시의 상황이나 이수미의 평소 성격과는 너무도 안맞는 점이 많다고 한다.

 

이수미는 평소에 성격이 매우 쾌활하고 낙천적인 성격이라고 하며, 몇 년간 엄청난 고생 끝에 이제막 스타덤에 올랐는데, 스타가 막 되자마자, 처자식이 있는 유부남에게 빠져서, 그의 이별 통보 때문에, 자살을 기도했다고 하는 것이 상황과도 안맞고, 모순점이 많다고 점이다. 

 

아니, 톱스타의 자리에 막 올라선 여가수가 무엇이 아쉬워서 그깟 처자식이 있는 늙은 유부남에 목을 멘다는 말인가? 전혀 말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의 상황이 더 이치에 맞는다고 본다.

 

, 이수미가 어려웠던 시절에 유부남 이씨를 만나 교제해왔는데, 이제 톱스타의 자리에 오르고 난 후에 마음이 변해서, 그 유부남에게 헤어지자고 요구했다고 하는 편이 더욱 이치에 맞는 것이다.

그런데 이수미의 변심에 앙심을 품었던 그 유부남이 이수미를 습격해서 보복을 했다고 하는 편이 더 맞는 말이다.

 

이수미의 자해사건에 대해서 경찰은 처음에는 의문점을 갖고있었지만, 이수미는 진실을 얘기하지 않았고, 끝까지 자신이 자해했다는 주장을 굽히지않자, 경찰도 어쩔 수 없이 이사건을 자해사건으로 수사를 종결시켰다고 한다.

 

 

이수미는 정말로 자해를 한 것인지, 아니면 누군가로부터 습격을 받았던 것인지 여부는 영원히 묻혀버리고 말았으며, 이 사건은 종결되고 만 것이다. 

1973년도에 이렇게 자해사건으로 종결되어 버렸던 이사건에 대해서, 30년이 지난 2003년도에 이수미는 다시 충격적인 고백을 했다고 한다.

 

때늦은 감이 있지만, 30년이나 지난 후에 이수미는, 그 때의 자해사건은 자해가 아니라 피습사건이었다고 고백을 했다고 한다.

 

이수미는 자신의 사건에 대해서, 두번씩이나 번복을 해서 대반전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이수미는 2003년도에 다시 밝혔던 고백은 다음과 같다,

피습사건이 일어났던 그당시에 자신은 경찰에게 짧은 머리의 20대남성이 범인이다라고 진술했는데, 이로 인해서 그당시 대천해수욕장에 놀러왔던 수백명의 죄없는 남성들이 끌려와서, 심문을 받는 등 고초를 겪었다고 한다.

 

 

이수미는 자신의 자백 때문에, 수많은 남성들이 의심을 받고 경찰서에 연행되는 등 그 여파가 너무나도 크게 번져나가자, 사건을 그냥 덮어버리는 편이 더 낫다는 판단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자신이 스스로 자해했다고 자백을 함으로써, 사건이 더욱 크게 번지는 사태를 막고자 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이수미의 고백은 이수미의 또다른 의도를 내포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이수미의 말대로 수백명의 남자들이 경찰서에 끌려와서 심문을 당하는 등, 파급이 너무 커지는 것을 막고자 했던 의도도 있어보이지만, 이수미에게는 또다른 의도는 있었다고 보여진다.

 

,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경찰이 더욱 심도있게 수사를 해나간다면, 이수미의 사생활부분이 더욱 크게 노출될 수 있기 때문에, 당시 최고의 스타였던 이수미는 자신의 사적인 부분을 대중들에게 노출시키지 않기 위해서, 서둘러 사건을 봉합하려 했던 것은 아닐까?

 

이수미가 자해한 것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결론이 났지만, 그당시 이수미는 정말로 누군가 유부남과 교제하고 있었던 것은 사실인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그러니까, 이수미의 자해사건은 이수미가 거짓말을 했던 것이며, ‘피습사건이 맞다고 한다. 그리고 경찰은 이수미를 습격했던 그 범인은 잡지못한 상태로 그 사건은 종결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또다시 놀라운 대반전이 일어난다. 이수미와 친하게 지냈던 후배가수 옥희씨가 이수미에게 피습사건에 대해서 물어보았다고 하며, 이수미는 옥희씨에게 피습사건의 진짜범인에 대해서 얘기해주었다고 한다.

 

 

이수미는 1973년도 대천해수욕장에 있는 언덕위의 나무옆에 서서, 대천해변가를 바라보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갑자기 뒤에서 한 남자가 다가오더니, 그녀의 몸을 흉기로 그어버렸다고 한다.

 

이수미에게 흉기를 휘두른 그남자는 대낮부터 그 대천해변가를 술에 취한 상태에서 돌아다녔던 남자로고 한다. 이수미는 자신을 습격했던 그 남자가, 누구인지 잘 알고있다고 한다.

그러니까 이수미는 사건이 일어났던 1973년 그 당시에 범인을 알고있으면서도, 범인을 모르는 척 시치미를 뚝 떼었던 것이다.

 

그리고 경찰이 범인을 잡기위해서, 죄없는 수많은 남자들을 연행해서 심문을 하는 일이 벌어지자, 죄없는 사람들에게 피해가 가는 상황을 막기위해서, 스스로 자해했다고 거짓자백을 했던 것이다.

 

진실을 어느정도 알고 나니까, 이수미가 참 착한 여자라고 느껴진다. 범인이 아닌 다른 남자들이 경찰서에 끌려가서 심문을 당하는 등 선의의 피해자들이 자꾸 생겨나자, 자기 스스로 자살기도를 했다는 거짓자백을 해서, 사건을 봉합시켜버린 것이다.

 

더 이상 선의의 피해자가 나오지 않게 하기 위해서, 스스로 거짓자백을 해서 사건을 종결시키게끔 했다는 점에서 이수미의 배려심 깊은 선한 마음을 읽을 수가 있다.

 

그런데도 또다시 의문점이 남게된다. 자신이 범인이 누구인지 알고있으면서도, 왜 이수미는 그 범인을 경찰에 알려주지 않았던 것일까?

이것이 가장 큰 의문점이다. 결국 이수미는 경찰에게 끝내 자신이 알고있는 범인을 얘기하지 않음으로써, 범인을 살려주었던 것이다.

 

 

이수미는 독실한 기독교신자라고 하는데, 그녀가 인도주의적인 사랑의 마음으로 범인을 용서하려했던 것일까? 아니면 범인을 얘기하기가 곤란한 그녀만의 사적인 스캔들을 간직하고 있었던 것일까?

   

이수미는 이 피습사건으로 인해서, 이미지에 심대한 타격을 입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사건이 일어나고 1년 후에 이수미는 또다시 내곁에 있어주라는 노래를 발표하며 재기에 성공했다고 한다.

 

이수미가 1974년도에 발표한 내곁에 있어주도 상당히 히트했던 노래이다. 그렇지만 이수미는 다시 재기에 성공하는 듯 보였지만, 1975년도에 터진 대마초사건에 연루되어, 가요생활을 청산하고 만다.

1975년도에 한국의 수많은 인기가수들이 대거 체포되었던 대마초사건때에, 이수미도 대마초를 피웠다는 누명을 쓰고 함께 입건되었고, 방송출연정지를 당해 가수활동을 접게된다.

 

그당시 이수미는 대마초를 피지않았는데도, 대마초를 피는 사람들과 가깝게 지냈다는 이유로 억울한 누명을 썼다고 한다.

 

7년이 지나고 연예계에 다시 복귀했던 1983년도에 이수미는 오랜만에 TV방송무대에 나와 노래를 불렀는데, 너무도 오랜만에 노래를 불러서 그런지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자 대중들 사이에 이수미가 목수술을 해서 원래의 목소리를 잃어버렸다는 루머가 생겨났으며, 또다른 일각에서는 그녀가 실어증에 걸렸다는 루머도 나돌아다녔다고 한다. 이수미는 이같은 루머들 때문에, 마음고생을 많이 했다고 한다.

 

이수미는 73년 피습사건 때에, 복부에 심한 상처가 나는 바람에, 얘를 영영 낳을 수 없는 몸이 되었다고 한다. 어차피 애를 가질 수 없는 이수미는 봉사활동 중에 알게된 아이를 입양해서 키웠다고 한다.

 

애를 낳을 없는 이수미는 애를 입양해서 자신의 애를 낳지못하는 트라우마를 극복해나갔던 것이다. 이수미는 그 후 봉사활동과 간간히 방송에 출연하면서, 건강하고 활력있는 삶을 살아가고 있으며, 결혼까지 해서 행복한 가정을 이루었다고 한다.

 

이수미의 노래가 SBS 시트콤 여고시절에 나오면서, 이수미의 여고시절이 젊은 세대들에게 널리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고, 이수미에 대해서 재조명되면서 이수미의 그동안 잊혀졌던 노래들이 다시 주목받기도 했다.

 

이수미는 1952년생으로 나이가 65세어 접어들었다. 정말 여가수 이수미는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왔다고 생각된다. 이수미는 나름 최선을 다해서 자신의 삶을 살아갔지만, 무슨 운명의 굴레 때문인지 그녀는 예기치않게 안좋은 사건들에 자꾸 말려들게 되어서, 여러번씩 인생에 큰 고비들을 맞게되어 안타까운 마음마저 든다.

 

그렇지만 이수미는 모든 난관과 굴레를 극복해나갔고, 현재는 자신을 끔찍이도 위해주는 좋은 남편을 만나서, 예쁜 딸들과 함께 행복하게 잘 살고있다고 한다.

 

이수미의 히트곡 '여고시절' 노래 동영상

 

 

 

 

 

 

 

 

 

 

Posted by 프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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