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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6.08.17 (어메이징스토리) 정조와 홍국영의 몰락과 최후, 여동생 원빈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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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 이산과 홍국영의 관계, 홍국영과 효의왕후, 세도정치와 반란

 

1762년 영조의 아들이자 세자였던 사도세자가 죽음을 당하고, 그의 아들인 정조가 영조의 뒤를 이어서 조선의 제22대 임금으로 등극했다.

 

정조는 영조의 뒤를 이어 임금이 되고 난 후에, 특별히 홍국영을 신뢰했고, 그에게 높은 관직을 하사해서 자신의 주변에 두었다고 한다.

 

정조는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죽음으로 인해서, 죄인의 아들이라는 멍에를 쓰게 되었고, 새손 시절부터 제대로 세손대접을 받지 못했는데, 홍국영은 이런 정조에게 보호막이 되어주고, 여러가지로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정조는 자신이 세손으로 있던 시절에 정치적 입지가 약했는데, 자신을 물신양면으로 돕던 홍국영에게 많이 의지를 했다고 한다.

 

홍국영 초상화

 

세손이던 시절 이산(정조)은 한밤중에 자객이 침투하여, 죽을 뻔한 위기에 처했다고 한다. 이산의 아버지인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고갔던 반대세력인 정후겸과 홍인한의 무리들이 돈으로 매수한 자객을 보내서, 이산의 암살을 기도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조선왕조실록의 영조실록에도 정후겸, 홍인한의 무리들이 돈으로 매수한 자객을 들여보냈다는 기록이 있다. 세손 이산을 옆에서 보좌하던 홍국영은 이산(정조)을 죽이기 위해 침입한 자객을 체포해서, 이산을 구해주었다고 한다.

 

 

이때부터 이산(정조)는 홍국영을 무척 신임하게 되었고, 나중에 왕이 되고난 후에도 홍국영에게 높은 벼슬을 주어서, 자신의 주변에 두고 의지했다고 한다. 

여러 사서에는 정조가 세손시절부터, 홍국영이 이산(정조)의 오른팔 또는 오른날개였다고 기록되어 있을 정도로, 이산(정조)와 홍국영은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고 한다.

 

 

결국 정조는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1776년 영조가 사망하자 조선의 제22국왕으로 등극할 수 있었다.

정조는 왕이 되자 마자, 두가지 일을 먼저 처리하는데, 하나는 자신의 즉위를 방해했던 반대세력을 척결하는 것이었고, 또하나는 세손시절부터 자신을 물신양면으로 도왔던 홍국영에게 벼슬을 내리는 것이었다.

 

정조는 임금으로 즉위한 후, 자신의 아버지를 죽게 만든 신하들과 자신의 즉위를 방해했던 반대세력들을 차례차례 숙청해나갔다.

왕이된 정조는 정적이었던 홍인한, 점후겸일당을 숙청하였고, 또한 정조는 자신의 즉위를 도왔던 홍국영을 1등공신을 책봉해서, 그에게 많은 벼슬을 하사했다고 한다.

 

정조는 도승지, 대사헌, 이조참판, 금위대장 등 홍국영에게 막강한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여러개의 벼슬을 내렸는데, 정조의 든든한 후광을 등에 업은 홍국영은 젊은 나이에 조선의 최고의 실세로 떠오르게 된다.

 

 

조선왕조실록의 정조실록의 기록을 보면, 홍국영은 군사권을 손에 쥐고, 정조를 호위하며 많은 것을 결정했으며, 모든 관리들이 그가 시키는 데로 했다고 한다.

정조의 신임이 두터워지면서, 자연스레 홍국영은 최고의 실세로 우뚝 솟아올랐고, 이른바 홍국영의 세도정치가 전개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홍국영이 최고의 실세가 되어, 거침없이 권력을 펼쳐나갈 즈음에, 새로운 갈등요인이 발생하게 된다.

 

정조의 즉위 이후, 권력이 막강해진 홍국영은 자신의 누이동생인 홍씨를 정조의 원빈으로 만드는데 성공했는데, 이것은 그당시 홍국영의 권세가 얼마나 컸었는지를 가늠해줄 수 있는 바로미터나 다름없다.

 

홍국영은 자신의 누이동생을 왕의 후궁으로 만들어, 왕과 인척관계를 형성하면서, 그의 권력을 더욱 강력해지고 공고화된다.

또한 홍국영은 왕의 경호를 책임지는 금위대장이 되어서, 궁궐내 숙위소에 머물면서, 인사, 행정, 군사 등 모든 정사를 독단적으로 처리함으로써, 여러 가지 불협화음이 발생하게 된다

 

 

이제 나이 30밖에 안된 젊은이가 왕의 경호실잘과 비서실장을 겸직하는 직무를 맡았지만, 실제로 홍국영은 영의정급 이상의 권력을 휘둘렀으니, 다른 대신들의 반발과 정적들을 양산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할 수밖에 없었다.

 

홍국영 1인에게로 쏠리는 지나친 권력집중과 권력남용은 결국 정조와 효의왕후에게도 갈등을 안겨다주는 요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홍국영의 권력이 비대해지자, 정조의 정비인 효의왕후가 홍국영의 지나친 권력남용을 견제하였고, 이로써 홍국영과 효의왕후 사이에 갈등과 반목이 발생하게 된다.

더욱이 홍국영이 자신의 누이동생 홍씨를 정조의 원빈으로 만드는데 성공하자, 홍국영과 효의왕후 사이의 반목은 더욱 커지게 된다.

 

 

홍국영은 자신의 누이동생을 이용해서, 자신이 획득한 권력을 더욱 공고히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런데 홍국영의 이런 바램과는 달리, 원빈 홍씨는 원빈으로 책봉된 지 1년 만에 병으로 사망하고 만다.

 

자신의 여동생 원빈 홍씨가 1년 만에 사망하자, 홍국영은 여동생이 독살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고, 자신의 여동생을 효의왕후가 죽였다고 오해를 하게된다.

그렇지 않아도 평소에 반목하고 있었던 홍국영과 효의왕후는, 원빈 홍씨의 죽음 때문에 더욱 갈등이 심해지게 되고, 결국 홍국영은 효의왕후를 죽이려는 계략을 꾸미게 된다.

 

 

홍국영은 효의왕후(정종의 비)가 자신의 여동생을 독살했을 것으로 의심하고, 효의왕후의 음식에 독약을 넣어서 효의왕후를 독살하려고 시도했으나, 결국 실패로 끝났다고

한다.

정조실록의 기록에도 홍국영이 중전(효의왕후)을 죽이려고, 역모하였다고 분명히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홍국영에 대한 정조의 신임이 얼마나 컸던지, 정조는 홍국영의 중전독살 음모를 반대세력이 꾸며낸 정치적 모함으로 생각하였고, 홍국영을 전혀 치죄하거나 국문하지도 않았다고 한다.

그만큼 당시 정조의 홍국영에 대한 신뢰가 엄청나게 컷다는 것을 알 수가 있는 대목이다.

 

또한 홍국영은 정조의 재가를 받아서, 은언군 아들 완풍군을 죽은 원빈의 양자로 입적시켰는데, 완풍군을 죽은 원빈의 양자로 삼은 것은, 완풍군이라는 왕족을 자신의 조카로 만들어서 자신의 권력을 더욱 강화시켜나갈 의도라고 풀이된다.

 

홍국영은 죽은 원빈의 양자를 왕자로 만들어서, 자신의 권력을 영원히 유지해나가려고 의도했던 것이다.

 

 

1979년 어느날 홍국영은 일생일대의 치명적인 실수를 했으며, 그것으로 인해서 정조의 신뢰를 완전 잃어버리게 된다.

홍국영은 기생을 끼고 술은 마시던 술자리에서, 느닷없이 정조를 토끼로 비하하는 망언을 일삼았다고 한다.

 

홍국영은 술자리에서 자신이 어린 토끼 한마리를 키웠는데, 그 토끼는 자신의 말을 너무도 잘 듣는다고 말하고는, 자신이 언제가 이 토기를 제거하고 새로운 토끼를 세워서, 자신이 천하를 호령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홍국영은 놀랍게도 정조를 언젠가는 제거해야할 토끼로 바하하는 발언을 했으며, 이말은 곧바로 정조의 귀에 들어가게 된다. 이것으로 인해서, 오랫동안 홍국영을 굳게 신임해왔던 정조는 드디어 홍국영에 대한 믿음을 거둬들이게 된다.

 

홍국영은 정조가 자신에게 무한한 신뢰를 갖고 총애해주었는데도 불구하고, 왕의 신뢰를 고맙게 생각했던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정조를 최대한 이용해먹을 생각만 하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정조의 신임이 커지면 커질수록, 홍국영의 야망은 더욱 커져만 갔고, 정조의 후광이 커지면서 홍국영은 점점 안하무인격으로 되어버려,

권력을 독단하고 전횡을 일삼았으며, 너무 기고만장해진 홍국영은 결코 넘어서는 안될 선까지 넘게된 것이다.

 

왕의 신임을 역이용해서, 왕의 머리꼭대기까지 올라가려고 했던 홍국영은 결국 철퇴를 맞고 한없이 추락하고 만다. 

홍국영의 최후에 관해서, 그의 최후가 얼마나 비참했는지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궁금증을 갖고있다.

 

1779년도에 홍국영은 모든 관직에서 은퇴하는 상소를 올렸다고 하며, 정조는 홍국영의 사퇴를 반려하지않고 곧바로 윤허했다고 한다.

, 정조가 홍국영의 정계은퇴를 곧바로 수용했다는 것은, 홍국영의 은퇴상소가 바로 정조의 뜻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조에게 큰 약점을 잡혔던 홍국영에게, 정조가 관직에서 물러나서 은둔해서 살아가라는 밀명을 내렸다고 볼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절대적으로 신임했던 홍국영의 은퇴상소를, 그렇게 빨리 받아들였을 리가 만무한 것이다.

 

 

한중록정조대왕행장의 기록에도, 홍국영의 은퇴상소는 곧 정조의 뜻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그리고 홍국영이 은퇴한 이후에도, 다른 대신들의 홍국영 탄핵상소가 봇물처럼 올라왔다고 한다.

홍국영이 그동안 권력을 독단하고 전횡을 일삼아서, 많은 폐단을 낳았던 것을 성토하는 탄핵상소들이 계속해서 올라왔다고 하며, 1880년 홍국영은 강원도 강릉으로 유폐되어버리고 만다.

 

그리고 홍국영은 1881년 강릉의 유배지에서, 34살의 젊은나이에 병으로 사망하고 만다.

하늘을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엄청난 세도정치를 일삼았던 홍국영은 유배지로 쫒져가고 난 뒤, 정신적 충격이 얼마나 컸던지, 원인모를 병으로 사망하고 만다. 

 

홍국영의 권세가 얼마나 높았던지, ‘세도정치라는 말이 바로 홍국영 때문에 만들어졌다고 한다.

 

 

그렇지만 홍국영이 실질적으로 권력을 누린 기간은 고작 4년밖에 안되며, 이것은 홍국영의 권력기반이 생각했던 것보다는 훨씬 취약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으며,

그의 지나친 독선이 결국 자신을 신뢰하던 정조와 등을 지게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홍국영의 지나친 독선적인 성격이 결국 자기스스로를 무너뜨렸던 것이다.

 

홍국영은 정조로부터 절대적인 신임을 받았었는데, 자신의 독선을 조금만이라도 누그러뜨렸다면 평생 정조와 동거동락하면서,

이상적인 조선사회의 건설을 함께 추구하고 누려나갈 수도 있었을 텐데, 그의 지나친 독선과 야망 때문에 스스로의 발목을 잡은 꼴이 되고야 말았다.

 

정조와 홍국영의 관계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한사람에게 너무 많은 권력이나 권한이 집중되게 되면, 오히려 그사람의 독선과 야망을 부채질하게 되어서, 종국에는 그 사람을 추락시키는 요인이 된다고 하는 교훈을 얻을 수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예로부터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는 말이 나온 것인데, ‘너무 지나친 것은 오히려 부족함만 못하다라는 뜻인데, 너무 지나쳐서 잔을 넘쳐 흐르는 것보다는, 차라리 약간 모자른 것이 오히려 더 낫다는 그런 의미이다.

 

홍국영이 왕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았더라도, 자신이 스스로 절제하고 자세를 조금만 낮추었더라면, 그렇게 비참한 최후를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 평생 정조의 곁에서 머무르면서, 정조와 함께 이상적인 조선사회를 만들어나갔을 지도 모른다.

 

정조 때가 조선이 근대화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는데, 영특한 임금이었던 정조에게 그의 개혁정치를 뒷받침해줄 만한 신하들이 없었기 때문에, 결국 정조때도 근대화의 기회를 잃어버리게 되고, 종국에는 조선은 부국강병을 이루지 못해서,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해버리고 만 것이다.

 

정조의 개혁정치를 뒷받침해줄 만한 우수한 신하들이 없었다는 것이 너무도 안타까울 따름이다.

 

 

 

 

 

 

 

Posted by 프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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