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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6.08.17 어메이징스토리’ 양귀비의 미모와 겨드랑이 암내, 초상화 일본망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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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최고의 미인 양귀비 죽음의 비밀, 당현종, 자살 일본망명설

 

양귀비 (719~ 756년)

 

당나라시절 최고의 미인이라고 일컬어지던 양귀비는 중국의 대표적인 미인으로 손꼽히는 여인이다. 왕의 마음까지 온통 사로잡아서, 나라까지 위태롭게 만들 정도로 그 미색이 뛰어나다고 해서,

양귀비를 경국지색의 미인이라는 평가가 있을 정도인데, 양귀비는 서시, 초선, 왕소군과 함께 중국의 4대 미인이라고 부르고 있다.

 

양귀비는 당나라 6대황제인 현종의 눈에 들어서, 단번에 후궁중 최고의 서열인 귀비에 책봉되었고, 오랫동안 당현종의 아낌없는 총애를 받았다고 한다.

 

오죽하면 당나라황제인 현종이 정사를 제대로 돌보지 않고, 온종일 양귀비의 치마폭에 빠져있었을 정도로, 절색의 미모를 간직하고 있는 양귀비는 현종의 마음을 완전 사로잡아버리고 만다.

 

양귀비 초상화

 

그런데 당 현종의 총애를 한몸에 받았던 양귀비가 원래는 현종의 아들의 비 즉, 며느리였다고 해서 큰 놀라움을 주고 있다.

 

당현종이 절색의 미인이라는 소문이 자자한 자신의 18번째 아들(소왕)의 부인 양옥환(양귀비)의 미모를 보고, 첫눈에 홀딱 반해서 그만 상사병에 걸릴 정도로 그녀를 마음속으로 좋아했다고 한다.

 

미색을 엄청 밝혔던 현종이 자신의 18번째 며느리(양귀비) 때문에, 마음속으로 가슴앓이를 했다는 웃지못할 사연이 전해지고 있다.

 

 

이미 마음속으로 홀딱 반했으니, 그녀(양귀비)를 어떻게든 자신의 여인으로 만들어겠는데, 불행히도 그 여인(양귀비)이 자신의 18번째 아들의 비였다는 것이다.

 

양옥환(양귀비)를 끝내 마음속에서 지우지못하고 있던 현종은 양귀비를 차지하기 위한 음모를 꾸민다. 양옥환(양귀비)에게 말도 안되는 불경의 죄를 뒤집어씌워서, 그녀를 비구니로 만들어서 절에다 유폐시켜버렸다고 한다.

 

현종은 양옥환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아들(소왕)과 양옥환(양귀비)를 떼어놓는 것이 순서라고 생각하고, 죄도 없는 양옥환(양귀비)을 거짓죄의 누명을 씌워서 비구니로 만들고, 절에다 유폐시켜놓고서, 아들과 떼어놓는 데에 성공했다.

 

양옥환(양귀비)은 현종의 모략에 휘말려서, 죄도 없이 소왕의 비에서 폐위된 후, 비구니가 되어서 절에서 살아가게 되었는데, 몇 년 후 세상이 잠잠해지고 난후 현종은 그녀를 몰래 궁궐로 데려와서, 자신의 귀비로 삼았다고 한다.

 

 

중국의 사서 신당서에는 당나라 현종이 자신의 아들 소왕의 아내 양옥환(양귀비)을 빼앗았고, 수왕에게는 다른 여인인 위씨를 소개시켜 줬다고 명문으로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27세의 나이에 당현종의 귀비로 책봉된 양귀비는, 도대체 얼마나 그 미색이 뛰어나길래, 자신의 시아버지인 현종의 마음을 완전 사로잡아버렸던 것일까?

 

중국의 정사에는 양귀비의 미모를 자질풍염(資質豊艷)’이라고 표현했는데, 양귀비는 얼굴이 동글동글하면서 통통하게 생긴 풍만한 미인이라는 의미이다. , 양귀비는 지금처럼 날씬하고 갸름한 미인이 아니라, 통통하고 풍만한 몸매의 미인이었다는 것이다.

 

지금의 시점에서 볼 때에 양귀비는 미인소리를 듣기가 힘들 수도 있지만, 당시 동아시아에서 최고의 절대귄력을 행사하던 황제의 마음을 사로잡을 정도였으니, 양귀비는 통통한 스타일의 8세기형 미인이었다고 보여진다.

 

 

양귀비는 745년에 현종의 귀비로 책봉되어서, 현종의 총애를 받으면서 온갖 호사를 다 누리고 지냈다고 한다. 그런데 그렇게 절색의 빼어난 미모를 타고난 양귀비에게도, 남에게 말못할 부끄러운 비밀이 하나 있었다고 한다.

 

경국지색의 미인에게도 치명적인 약점이 하나 있었다고 하는데, 그것은 놀랍게도 양귀비의 겨드랑이에서 나는 암내였다고 한다.

 

중국최고의 미인이라고 일컬어지던 천하의 양귀비에게 암내라고 하는 역한 냄새가 났다고 하니, 정말 믿기가 힘든 상황이 아닐 수가 없다. 양귀비의 암내가 얼마나 심했는가 하면, 양귀비의 목욕을 담당하던 궁녀들이 수시로 교체되었다고 한다.

 

 

양귀비의 겨드랑이에서 나는 암내는 엄청 역한 냄새였다고 하며, 보통 사람이 양귀비의 암내를 맡으면, 헛구역질이 날 정도였다고 한다. 

중국의 야사 기록에 따르면, 양귀비는 암내가 심해서 하루에도 5~6번씩 목욕을 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양귀비는 당대 최고의 미인답게 자신의 약점인 암내가 나는 것을 철저히 숨겼다고 하며, 소문을 내는 궁녀들은 가차없이 죽였다고 한다.

양귀비의 목욕을 담당하는 궁녀가 양귀비의 심한 암내 때문에, 놀라거나, 격한 반응을 보일 경우에도, 양귀비는 그 궁녀들을 죽이거나 교체해버렸다고 한다.

 

그렇다면 한가지 의문점이 생기는데, 궁녀들도 냄새를 맡으면, 헛구역질을 할 정도로 심한 암내를 현종은 어떻게 참았던 것일까?

 

다행스럽게도 현종은 코에 심한 축농증이 있어서 냄새를 잘 맡지못했다고 한다. 축농증 때문에 항상 코가 막혀있었던 현종은, 양귀비의 역겨운 암내를 전혀 맡을 수 없었다고 하니, 두사람은 정말 천생연분이 아닐 수가 없는 것이다.

 

 

 

한쪽은 심한 악취를 풍기고, 다른 상대방은 코가 막혀서 악취를 맡을 수가 없으니, 이보다 더 잘맞는 천생연분이 또 있을까? 양귀비는 자신의 암내를 숨기기 위해서, 항상 몸에 진한 향수를 뿌리고 다녔다고 한다.

 

천하일색 양귀비에게 이런 약점이 있다고 하니, 믿어지지 않지만, 중국 역사서에 기록되어 있으니, 사실로 받아들여야 할 것 같다.

 

양귀비는 귀비로 있는 동안에 현종으로부터 최고의 사랑과 총애를 독차지 했을뿐만아니라, 정사에도 깊이 관여해서 국사를 흐트려 놓았다고 한다. 양귀비를 몹시도 총애하였던 현종은 양귀비의 간청을 받아들여, 양귀비의 오빠 양국충에게 큰 벼슬을 내려서, 국사를 담당하게 했다고 한다.

 

 

양귀비의 6촌오빠인 양국충은 양귀비의 후광을 등에 업고, 감찰어사가 되어서 막강한 권력을 휘둘러서 국정을 문란케 만들었으며, 나중에는 재상의 자리에 올라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

 

현종의 든든한 후광을 등에 업은 양귀비와 양국충의 권력남용과 부패정치로 인해서, 민생은 도탄에 빠지게 되었고 백성들의 원성이 크게 높아지자, 평소에 양국충의 전횡과 횡포에 불만을 품어왔던 안록산이 양국충과 양귀비타도를 기치로 해서 반란을 일으키게 된다.

 

수많은 지방세력들을 규합해서 처들어온 안록산의 기세가 매우 강성해서, 현종은 촉나라 부근까지 피난가게 되었다고 한다.

 

촉나라 부근의 성도까지 피난간 당나라 조정대신들과 장수들은 반란이 일어난 근본적인 원인은, 황제의 총애를 등에 업은 양귀비와 양국충의 부패정치에 있다고 보고, 나라를 어지럽힌 책임을 물어서, 양국충은 살해하고 양귀비는 자살토록 조치하였다.

 

일본과 중국에 있는 양귀비의 묘

 

오랫동안 양귀비와 쾌락에 빠져서, 정사를 돌보지 않았던 현종은 대신과 장수들의 신뢰를 잃어서, 양귀비의 죽음을 막을 만한 힘이 없었고, 결국 근위병들이 주도해서 양귀비의 자살을 촉구했다고 한다.

 

오랫동안 현종의 총애를 한몸에 받고, 엄청난 권세를 누렸던 양귀비는 근위부대의 강요에 의해서, 스스로 자결함으로써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그런데 여기서 잠깐, 오랫동안 양귀비는 스스로 자살한 것으로 알려져왔는데, 중국의 또다른 역사서를 보면, 양귀비는 자살한 것이 아니라, 일본으로 도주했고 일본땅에서 죽었다고 한다.

 

양귀비는 죽는 순간까지도 현종의 총애를 감사하며, 목숨을 구걸하지 않고 당당하게 목을 메어 죽었다고 그동안 알려져 왔었다. 그런데 실제로 양귀비는 자결하지 않았고, 몰래 일본땅으로 도망쳤다고 한다. 

 

 

1970년대에 일본국민들의 우상으로서, 일본국민들의 사랑을 많이 받았던 아이돌 여가수 야마구치 모모에가, 자신은 양귀비의 후손이었다고 2001년도에 중국에서 밝혔다고 한다.

 

2001년도에 중국을 방문했던 일본의 아이돌가수 야마구치 모모에는 기자회견장에서 중국기자들의 질문을 받고, 자신의 조상이 바로 중국에서 온 양귀비라고 하며, 자신은 양귀비의 직계자손이라고 밝혔다는 것이다.

 

일본에서 한시대를 인기높은 아이돌여가수로 풍미했던 야마구치 모모에가 중국 당나라의 양귀비의 직계후손이라고 하니, 정말 놀랄만한 일이 아닐 수가 없다.

 

중국의 정사인 구당서의 기록을 보면, ‘근위대장이 양귀비의 시녀를 죽여서, 양귀비가 죽은 것처럼 위장한 후, 양귀비는 빼돌렸다고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또한 같은 구당서의 기록에 양귀비는 배를 타고 일본으로 갔으며, 일본에서 여생을 살다가 일본땅에서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실제로는 양귀비가 죽지않고 일본으로 망명해서, 일본에서 살다가 죽었다는 것이다. 이런 기록은 중국의 야사가 아닌 정사인 구당서에 기록되어 있는 것이므로, 신뢰성이 높다고 하겠다.

 

, 양귀비는 실제로는 자살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시녀를 대신 죽게해서, 마치 자신이 자살한 척 위장을 했던 것이고, 자신은 비밀리에 궁을 빠져나와, 일본으로 망명해서 일본땅에서 살았다는 것이다.

 

 

그당시 양귀비의 나이가 37세의 젊은 나이라서, 아직 그대로 죽기가 억울하다고 생각한 양귀비는, 자살을 집행하던 근위대장을 그동안 모아놨던 금은보화를 주고 구워삶아서, 시녀을 대신 죽게하고 자신은 몰래 동해안으로 도망쳐서 배를 타고 일본으로 망명했던 것이다.

 

양귀비는 황제를 구워삶았을 만큼 미모 뿐만아니라 처세술도 아주 뛰어난 여성이었는데, 위급한 시기에 근위대장을 잘 포섭해서 탈출에 성공했던 것이다.

 

중국에도 양귀비의 묘가 있지만, 실제로 일본에도 양귀비의 묘가 있다고 한다. 양귀비의 묘는 일본의 야마구찌현의 오오쯔군 유야정 츠마에 있다고 한다.

 

 

일본 유야정 츠마에는 양귀비마을도 있으며, 이곳에는 양귀비사당도 있고 양귀비무덤도 있다고 한다.

츠마에는 오륜탑이 있는데, 이 오륜탑은 양귀비묘 위에 지어진 다섯 개의 석탑이라고 한다. 일본여성들은 양귀비묘를 참배하길 좋아한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양귀비묘를 참배하면, 예쁜 자식을 낳을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라고 한다.

 

경국지색(傾國之色)’이라는 말은 바로 양귀비 때문에 생겨난 고사성어라고 한다. ‘한 나라가 기울어지고 망할 정도로 아주 빼어난 미인이라는 의미의 경국지색의 미인인

양귀비는,

실제로도 현종의 마음을 사로잡아 정사를 멀리하게 만들었고, 결국 반란이 일어나 나라를 위태롭게 만들었던 후궁이었다.

 

미모도 출중했지만, 처세술도 뛰어났던 양귀비는 위급한 시기에도 근위대장을 금은보화로 매수해서, 탈출하는 데에 성공했고, 결국 배를 타고 일본으로 망명하여 자신의 후손까지 남겼다고 한다.

 

 

아이돌가수 야마구치 모모에가 중국에까지 가서, 자신이 양귀비의 직계후손이라고 밝힐 정도라면 그녀의 말에 신빙성이 높아 보인다.

일본국적의 아이돌가수가 뭐하러 남의 나라인 중국에까지 가서, 자신이 중국인의 후손이라고 거짓말을 하겠는가? 일본인과 중국인은 서로 상극이 아닌가?

 

경국지색의 미인이라고 불리워지는 양귀비는 일본으로 망명한 후에도, 그 빼어난 미모가 일본땅에도 널리 알려져서, 지금은 수많은 일본여성들이 양귀비처럼 예쁜 자식을 얻기 위해서 참배하러 온다고 한다.

 

한나라의 왕이 너무 예쁜 후궁에 빠지면, 나라가 위태로와진다고 하는데, 중국의 양귀비와 우리조선의 장희빈이 그 대표적인 예에 해당한다고 본다.

 

 

 

 

 

 

Posted by 프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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