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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6.07.18 ‘어메이징스토리‘ 당나라여황제 측천무후의 남성편력, 남총 초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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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 고종의 황비 희대의 악녀측천무후 무조의 악행과 비밀, 무자비

   

중국역사상 가장 뛰어난 여성정치인이자,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던 유일한 여성황제가 바로 측천무후다.

 

측천무후는 중국역사 속에서 가장 정치경륜이 뛰어난 걸출한 여성정치인이라는 평가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던 잔인무도한 독재군주로서의 악명도 함께 지니고 있는 여군주이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측천무후는 중국역사 속에서 최초의 여자황제라고 하는 사실과, 중국역사상 최고로 성공했던 여걸이라는 사실은 결코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당나라 고종의 황후출신으로서자신의 아들의 황권을 빼앗아서 자신이 여황제로 등극해 엄청난 절대권력을 손아귀에 넣고천하를 좌지우지했던 측천무후는 그녀의 탐욕스러운 권력욕과 남성편력 때문에,

음탕하고 간악한 요부라고도 평가를 받기도 하는데또한편으로는 민생을 잘 보살펴서 백성을 편안하게 했던 현군이라는 평가도 함께 갖고있는 여군주다.

  

 

측천무후의 원래 이름은 무조인데, 그녀는 아버지 무사확이 죽고 가세가 기울자, 당나라 태종 때에 황궁에 입궁해서 14살 때부터 궁녀생활을 시작했다고 한다.

 

당나라 태종은 말타기를 매우 즐겼다고 하는데, 당태종이 좋아하는 애마는 성질이 포악해서 거칠어서 태종은 말을 타다가 종종 낙마를 했다고 한다.

태종이 자신의 애마를 길들이지 못하는 시종들을 꾸짖자, 궁궐 한쪽켠에서 이를 엿듣던 한 궁녀가 나타나서 말을 길들일 수 있는 좋은 비책을 알고있다고 태종에게 아뢰었다고 한다.

 

  측천무후의 초상화

 

무조(측천무후)는 당돌하게도 태종에게 말을 길들일 수 있는 비책을 얘기해주었다고 하는데, 그녀는 쇠채찍, 쇠망치, 비수 이 세가지만 있으면 얼마든지 말을 길들일 수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무조(측천무후)는 말이 말을 안들을 경우에는 쇠채찍으로 때려서 말을 듣게 하고, 그래도 말을 안들으면 쇠망치로 머리를 때리고, 그래도 말을 듣지않으면 더 이상 쓸모없는 말이니, 비수로 찔러 죽이면 된다고 말했다고 한다.

 

무조(측천무후)의 당돌한 말을 듣던 태종은 그녀의 당돌함과 기개를 높이 사서, 그녀를 눈여겨 보게 되었고, 그녀를 서가를 관리하는 직책을 주고 자신의 주변에서 시중드는 일을 함께 맡겼다고 한다.

 

이렇게 당태종 때부터, 궁궐의 잡일을 돌보던 낮은 신분의 궁녀였던 무조(측천무후)가 어떻게 나중에 황제의 자리까지 올라갈 수 있었을까? 그것은 그녀의 뛰어난 정치적 수완과 절대권력을 향한 그녀의 억누를 수 없는 탐욕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의 용모는 매우 출중하고 빼어난 미모를 지니고 있었다고 하며, 그녀는 어려서부터 총명했다고 한다.

그런데 측천무후가 아름답고 총명하다는 얘기를 들어 알고있던 태종은 이상하게도 무조(측천무후)를 품지 않았다고 한다.

 

자신의 정실황후 장손씨를 잃고난후 어린 소녀들을 즐겨 탐닉했던 당태종이 측천무후를 끝내 품지않았던 이유는, 장차 무씨가 나라를 어지럽히고 이씨 후손들로부터 황권을 찬탈한다는 당대의 예언 때문이라고 보여진다. 측천무후의 이름은 무조이며, 그녀의 성씨가 바로 무씨이다.


 

천문을 보고 길흉화복을 첨치는 태사령은 하늘에 태백성(금성)이라는 별이 자꾸 떠오르는 것을 보고 미래를 예측했다고 하는데, 장차 무씨 성을 가진 여인이 나타나서 권력을 찬탈하게 되는데,

이씨 왕조가 3대를 이어간 후에, 바로 무씨 성의 여인이 나타나 황권을 빼앗아간다는 예언을 했다고 한다.

 

이같은 예언을 듣고 크게 놀란 당 태종은 자신에게 저녁수발을 들러온 무조(측천무후)를 품지않고 그냥 돌려보냈다고 한다.

그 이후에 당태종은 무조(측천무후)를 끝끝내 침소에 들지못하게 했다고 하며, 황후의 꿈을 꾸고 궁으로 들어온 무조는 당태종 재위기간 내내 독수공방하는 신세로 전락했다고 한다.

   

그런데 당태종이 고구려정벌에 나섰다가 크게 패퇴하여, 다시 돌아온 후부터 큰병을 얻어서 자리에 눕는 신세가 되고말았는데, 이때에 공교롭게도 무조(측천무후)가 태종의 병간호를 맡았다고 한다.

 

그리고 태종의 병간호를 하던 무조(측천무후)는 병문안을 왔던 태종의 아들 이치(훗날의 고종)의 눈에 띄었다고 하며, 이치(고종)는 무조의 빼어난 미색을 보고 그녀에게 반해버렸다고 한다.

그리고 얼마 있다가 당태종은 병석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50세의 나이로 사망하고 말았다.

 

 

당시 나라의 법도는 황제가 사망하게 되면, 그 황제를 모시던 애를 낳지않은 후궁이나 궁녀들은 모두 출가해서, 비구니가 되는 것이 법도였다고 한다.

 

황제의 성은을 한번도 입지못하고, 졸지에 젊은나이에 비구니가 될 처지에 몰린 불쌍한 무조(측천무후)였지만, 역시 진주는 진흙탕 속에서도 빛나는 법이라고 할까, 평소에 그녀의 미색을 잊지못하고 있던 이치가 태종의 뒤를 이어 새로운 황제(고종)로 즉위하고 난후, 곧바로 절로 쫒겨나 있던 무조를 불러들였다고 한다.

 

평생 절에서 비구니로 살아갈 뻔했던 무조(측천무후)는 그 빼어난 미색 때문에 졸지에 고종의 후궁으로 발탁되는 행운을 얻게된 것이다.

 

그런데 무조(측천무후)가 고종의 후궁의 자리에 오른 것은 무조 자신에게는 엄청난 영광을 가져다주었지만, 이씨 황실에게는 엄청난 불행의 시작이 되고 말았다.

 

중국 최고의 미녀여배우 판빙빙이 주연으로 출연한 영화 '측천무후(무측천)'가 2015년 성황리에 개봉되었다

 

무조(측천무후)가 후궁에 쉽게 오를 수 있었던 데에는 고종 뿐만아니라, 고종의 정비인 황후의 도움도 컸다고 한다.

애를 낳지 못했던 황후는 자신의 콤플렉스 때문에 궁궐에서 많은 후궁들에게 밀리는 상황이었는데, 황후는 무조(측천무후)를 후원해서 자기사람으로 만들고, 다른 후궁들을 견제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러한 황후의 선택은 나중에 자신에게 비수가 되어 돌아오게 된다.

 

전격적으로 고종의 후궁자리에 오른 무조(측천무후)는 후궁이 되자마자, 황실여성의 최고의 자리인 황후자리를 넘보게 되는데, 이를 위해 한가지 끔찍한 묘책을 만들어낸다. 평소에 야심만만하고 권력욕심이 컸던 무조는 고종의 후궁이 된 후, 매우 간특하면서도 끔찍한 묘책을 하나 짜내게 된다.

 

무조(측천무후)는 잔인하게도 자신의 친딸인 어린 옹주를 몰래 죽이고서, 옹주를 죽인 것은 황후라고 황후에게 거짓된 누명을 씌워버렸으며,

그녀의 이같은 모략은 성공을 거두었고, 고종은 옹주를 살해한 혐의로 황후를 잡아다가 옥에 가두고, 황후에 대한 처벌권을 무조(측천무후)에게 넘겨주었다고 한다.

 

 

평소에 자식이 없어 옹주를 귀여워했던 황후가 옹주를 보러 왔다가 돌아가고 난후에, 무조(측천무후)는 그 타이밍을 노렸는데, 곧바로 자신이 옹주의 목을 졸라죽이고서, 자신이 죽인 옹주를 황후가 죽였다고 시녀를 시켜서 고종에게 일러바쳤던 것이다.

처벌권을 넘겨받은 무조(측천무후)는 자신의 후원자였던 황후를 곤장 100대를 쳐서 숨지게 했다고 한다.

 

   

아무리 권력욕심이 크기로서니, 자신의 친자식을 죽이는 방법을 써서, 황후자리에 오를 수 있다니, 정말 충격적이고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다.

이것은 당나라의 역사서인 자치통감에 명백하게 기록된 내용으로서, 중국역사상 가장 끔찍한 사건중 하나로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그런데 무조(측천무후)의 탐욕과 만행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고 한다. 황후자리에도 만족하지 못한 무조(측천무후)는 최고의 권력을 얻기위해서, 나중에 자신의 친아들을 두명이나 더 희생시키는 천륜을 저버리는 짓을 또다시 저지르게 된다.

 

 

몇 년 후에 고종이 병석에 누워서 시름시름 앓게 되자, 고종은 자신의 아들로 하여금 자신의 뒤를 이을 황태자로 삼기 위해 태자책봉식을 명하게 된다.

태자책봉식의 명이 내려진 후에, 고종과 측천무후의 큰아들은 갑자기 독살당하고 만다. 또한 둘째아들마저도 태자책봉식을 며칠 앞두고, 갑자기 목을 메어 자살하고 만다.

 

 

이처럼 고종 다음황제 자리를 정하는 황태자책봉식 직전에, 측천무후의 두아들이 뚜렷한 이유도 없이 갑자기 숨을 거두게 되는데, 두아들이 죽음 뒤에는 측천무후의 계략이 숨어있었다고 한다.

최고의 권력을 원했던 측천무후가 자신이 직접 황제에 오리기 위해서, 두아들을 희생시켰던 것이다.

 

그리고 683년 고종이 죽은 후에 임시로 자신의 막내아들로 하여금, 황제의 대통을 잇게 했지만, 이미 나라의 모든 실권이 측천무후에게 집중된 상태에서 막내아들은 단지 이름뿐만인 허수아비 황제에 불과했다.

690년도에 결국 황권에 대한 본색을 드러낸 측천무후는 막내아들을 황제자리에서 쫒아내고, 67세의 나이에 스스로 여황제의 자리에 올랐다고 한다.

 

딸과 두아들을 희생시키고 당나라 최고의 권력인 황제의 자리에 오른 측천무후는 중국역사상 가장 탐욕스럽고 잔악한 인물로 기록되고 있다.

중국의 3대 악녀로 서태후와 여태후, 그리고 측천무후가 그 불명예스러운 이름을 올리고 있는 중이다.

 

 

여황제에 오른 후, 천추태후는 자신의 권력을 한층 더 강화시키기 위해서 자신에게 걸림돌이 되는 왕족과 친족들, 그리고 대신들을 모두 숙청해버리고, 절대적인 권력을 구축해서 독재정치를 이어나갔다고 한다.

 

또한 측천무후는 황제가 되자마자, 전국에서 젊고 튼튼한 미소년들을 모집해서 궁안으로 불러들였다고 한다.

 

여황제가 된 측천무후는 음탕하고 호색한 그녀의 본색이 드러나게 되는데, 궁궐내에 ‘공학부이라는 이름의 은밀한 내실을 짓고, 그곳에 전국에서 뽑아온 잘생기고 튼튼한 젊은남자들을 머물게 했으며, 밤마다 젊은남자들을 바뀌가면서 잠자리의 쾌락을 즐겼다고 한다.

 

 

중국 역사상 가장 화려한 남성편력을 즐긴 여성으로 단연 측천무후를 꼽을 수 있다고 하는데, 구당서의 기록에는 측천무후가 남총으로 뽑았던 미소년들은 무려 3,000명이나 된다고 한다.

 

남총으로 뽑힌 젊은남성들은 낮에는 측천무후의 잡다한 시중을 드는 일을 하였고, 밤에는 남자들을 바뀌가면서, 측천무후의 잠자리상대를 해주었다고 한다.

 

 

남총으로 뽑히기 위해서는 나이, , 용모 이 세가지 조건을 모두 완벽하게 충족시켜야만 했고, 이렇게 뽑힌 측천무후의 남총들 3천명은 밤마다 측천무후의 잠자리상대로 발탁되어서, 번갈아가면서 측천무후의 쾌락을 위해서 사용되었다고 한다.

 

측천무후는 중국역사상 여색을 많이 밝혔던 진시황제보다도 더 많은 (남자)후궁을 둔 셈인데, 70세의 늙은 나이에도 잘생기고 건장한 젊은 남자들을 밤마다 갈아치우면서 쾌락을 즐겼다고 하니, 정말 음탕하기 그지없는 천하의 요부라고 할 만하다.

 

 

측천무후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두가지 평가가 있다고 한다. 한편으로는 중국의 국권을 튼튼히 하고, 민생을 안정시켜 백성을 편안케 했던 군주라는 평가가 있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자신의 친자식까지 희생시킨 음탕하고 잔악스러운 권력의 화신이자, 요부라는 평가가 그것이다.

 

측천무후는 뛰어난 정치적 수완을 발휘하여, 많은 대신들을 쥐락펴락하면서 자신의 권력을 탄탄한 반석위에 올려놓았고, 인재를 고르게 등용하고, 민생안정과 생산력 증대를 이뤄서, 당대에는 태평성대를 이루었다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그녀에 대해 중국의 희대악녀라는 또다른 평가를 내리는 것은 그녀가 최고의 권력을 얻기위해서, 그리고 자신의 독재권력을 강화하기 위해서,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을 희생시켰기 때문일 것이다.

 

측천무후는 황제즉위 15년 만인 82세의 나이로 사망하고 만다. 그런데 측천무후는 죽기 전에 자신의 비석에는 비문을 쓰지말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실제로 측천무후의 비석에는 다른 황제들과 달리 비문이 전혀 없다고 한다.

 

 

측천무후가 죽기 직전에 비문을 넣지말라고 한 것은, 아마도 죽을 때가 돼서야 자신이 생전에 저지른 수많은 악행이 떠올러서 미안한 마음을 가졌기 때문이 아닐까?

  자신이 황제에 오르기 위해서, 피를 흘리게 했던 수많은 사람들의 얼굴이 떠올라서 그 양심의 가책 때문에, 비문을 쓰지 못하게 했던 것은 아닐까 판단된다.

 

한편으로는 뛰어난 정치적 수완과 경륜을 발휘해서, 백성을 편안하게 했던 군주이기도 하지만, 측천무후의 대한 평가는 긍정보다 부정적인 평가가 더 강하다고 한다.

 

측천무후는 황제에 오르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않고 살육행위를 저질렀기 때문에, 그녀가 정치를 안정적으로 잘 운영했다는 좋은 평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측천무후를 희대의 요부’ ‘의대의 악녀라고 부르는 것은 그녀가 최고의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서, 저지른 패륜은 결코 용납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말한다면, 측천무후는 최고의 권력을 탐욕했던 천륜을 위반한 사이코패스일 뿐이다.

 

 

 

 

 

 

 

 

Posted by 프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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