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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6.08.04 ‘어메이징스토리’ 악녀 장희빈과 인현왕후, 최숙빈 죽음이유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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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현왕후 폐위와 장희빈 저주의 진실, 장옥정 초상화

 

어메이징스토리에서 조선시대 숙종때의 두연적이었던 장희빈과 인현왕후 사이에 일어났던 이야기를 다루어서,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조선시대 후궁중에서 희대의 악녀로 알려진 장희빈, 그녀는 우리가 알고있는 것처럼 정말 희대의 악녀이자 요부였을까?

 

그리고 조선숙종 때에 숙종을 사이에 두고, 장희빈과 연적관계에 있었던 인현왕후는 드라마에 나온 것처럼, 정말 인자하고 덕망높은 고결한 마음씨를 지닌 왕비였을까?

  

우리가 여태까지 패악한 요부라고 알고있던 장희빈은 드라마나 인현왕후전같은 소설에서 요부이자 악녀로 묘사되고 있지만, 실제로는 악녀가 아닐 수 있으며, 시대가 낳은 정치적 희생양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과연 장희빈이 희대의 악녀인지,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중심으로 해서, 진정한 장희빈의 모습을 살펴보도록 하자!

 

1701년 인현왕후가 35세의 젊은 나이로 갑자기 병으로 사망한다. 그리고 인현왕후가 사망한지 2개월 뒤에, 장희빈이 인현왕후를 저주했다는 죄목으로 사약을 받고 사망하게 된다.

장희빈은 세자(훗날 경종)의 모후였음에도 불구하고, 숙종의 명에 의해서 인현왕후를 저주했다는 죄목으로, 사약을 먹고 파란만장했던 삶을 마감하고 말았다.

 

  서양화가가 그렸다고 알려진 장희빈 초상화

 

과연 장희빈은 사약을 받을 만큼 큰죄를 졌단 말인가? 또한 장희빈이 인현왕후를 저주했다는 것이 사실일까?

 

어쩌면 장희빈은 인현왕후를 저주했기 때문에 아니라, 당쟁이 극심했던 정치적 대혼란기에 불행하게도 누명을 쓰고, 정치적으로 희생된 것이 아닌지 면일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소설 인현왕후전에서 보면, 1701년 장희빈은 인현왕후를 저주했다는 죄목을 숙종앞에 끌려나왔으며, 인현왕후를 저주해 죽게한 죄목으로, 숙종으로부터 사약을 받으라는 명을 받게된다.

 

그런데 장희빈은 자신은 죄가 없다고 강하게 항변하면서, 세자(훗날 경종)의 모후인 자신에게 사약을 내리는 일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하며, 사약받기를 끝끝내 거부한다. 이당시 장희빈은 사약을 세 번이나 거부하면서 안먹으려고 온갖 발악을 다했다고 한다.

결국 장희빈은 나인들에 의해 강제로 입을 벌리게 한 끝에, 사약을 강제로 먹여서 사사되었다고 전해진다.

 

 

그런데 장희빈은 이과정에서 자신을 구명하기 위해서, 달려온 세자(경종)에게 몹쓸 짓을 했다고 하는데, 혼자 죽는 것이 억울했던지, 장희빈은 곁에 있던 세자의 고추를 잡아댕겨서, 세자(경종)을 성불구자로 만드는 폐악을 저질렀다고 한다.

 

인현왕후를 저주해서 죽게했던 장희빈이, 또다시 죽는 순간에서까지 자신의 친자식인 세자의 고추를 잡아당겨서, 성불구자로 만드는 못된 폐악을 저질렀다고 한다.

 

장희빈은 자신에게 사약을 내린 이씨왕조에 대한 보복으로, 세자의 고추를 잡아당겨 성불구자로 만들었다고 한다. 실제로 훗날 왕이된 장희빈의 아들 경종은 후사를 갖지못했으며, 왕위를 배다른 동생인 영조에게 물려주었다고 한다.

 

이같은 내용 때문에, 숙종의 후궁이자 경종의 모후인 장희빈은 희대의 악녀라는 역사상 씻을 수 없는 낙인이 찍히게 된 것이다.

 

정말로 장희빈은 인현왕후를 저주해서 죽게 했으며, 자신의 아들인 경종을 성불구자로 만들었던 못된 악녀였을까? 이 점에 대해서 의문을 품는 사람들이 많이 존재한다.

어떻게 어머니가 아무리 억울한 상황에 처했기로서니, 자신의 친아들을 성불자로 만들 수가 있단 말인가?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잘 알지못하는 중요한 사실이 하나 있다. 위에서 언급된 장희빈의 못된 악행들은 소설 인현왕후전에 나오는 내용들이다. 그리고 드라마에서 나오는 내용들이다.

 

그렇다면 소설에서는 장희빈이 이렇게 악녀로 나오는데, 정사에서의 장희빈의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 놀라운 것은 정사의 기록에서는, 이처럼 장희빈이 악행을 저질렀다는 기록이 전혀 없다고 하는 사실이다.

 

오히려 정사인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에서 보면, 야사나 소설의 기록과는 정반대의 모습을 한 정희빈의 성실하고 반듯한 모습을 볼 수 있다고 한다.

 

조선왕조실록의 숙종편에서 보면, 숙종은 장희빈에게 자결하라는 명을 내렸다고 하는데, 이에 장희빈은 세자의 장래를 위해서, 기꺼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다.

장희빈은 실제로는 전혀 사약을 거부하거나, 발악을 하지도 않았으며, 더욱이 세자에게 못된 짓을 하지도 않았다고 한다.

 

오히려 인현왕후를 저주했다는 누명을 쓴 장희빈은 매우 억울한 누명을 쓴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세자의 장래를 위해서 자결하는 것이 좋다는 숙종의 요구에 순순히 사약을 받아마셨다고 한다.

 

 

숙종은 스스로 자진을 택한 장희빈을 가상히 여겨서, 왕후의 예로 성대한 장례식을 치러주었다고 한다.

또한 장희빈의 장례식장에 세자부부가 함께 참관하도록 조치했다고 하며, 장희빈의 묘자리도 아주 좋은 묘자리로 손꼽히는 광주 진해촌을 잡아줬다고 한다.

 

숙종이 만일 장희빈이 진짜 왕후를 저주해서 죽게만들고, 세자를 병신으로 만든 죄인이라면, 이렇게까지 후한 예우를 할 수가 있겠는가? 

 

 

그동안 우리가 알고있던 장희빈의 표독스럽고도 요사스러운 악녀의 모습은, 야사나 인현왕후전같은 소설에만 나오는 내용들이며, 조선왕조실록 같은 정사에는 장희빈이 이런 악행을 했다는 기록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조선시대의 후궁중에서 가장 표독스러운 악녀이자 요부라고 손까락질 받았던 장희빈에 대해서, 잘못 알려진 내용들이 많이 있으며, 그동안 우리가 몰랐던 장희빈에 관한 진짜모습들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원래 장옥정(장희빈)은 어린 나이에 궁녀로 궁궐로 입궁했으며, 인조의 계비인 자의대비전에서 일하고던 궁녀였는데, 인물이 워낙 빼어난 절색의 미색을 지니고 있어서, 대비전을 드나들던 숙종에 눈에 띄게 되었고,

종의 성은을 입게 되어, 1686년 숙종의 명에 의해서 장옥정(장희빈)은 단번에 숙원의 품계를 받았다고 한다.

 

그후 장옥정은 숙종의 뜨거운 총애를 한몸에 받으면서, 숙종의 아들을 낳아 왕실의 후사를 잇게 해주는 수훈을 세우며, 희빈으로 품계가 상승하게 되며, 숙종의 장희빈에 대한 총애는 더욱 깊어지게 된다.

반면 인현왕후는 아이를 낳지 못하면서, 점점 숙종의 마음으로부터 멀어지고 만다.

 

  인현왕후 초상화

 

그러던 1689년도에 숙종은 장희빈이 낳은 아들 윤(훗날 경종)을 원자로 삼으려는 문제로 인해서, 송시열등 서인출신의 대신들로부터, 심한 반대에 부딪히게 되며, 이로인해서 엄청난 피바람이 몰아치게 된다.

숙종은 한 살도 안된 장희빈의 아들 윤을 원자로 삼기 위한 원자정호를 명하였는데, 원자의 정호를 정하면 결국 그원자는 왕의 후계자로 확정되고 만다.

 

그렇지만 아직 인현왕후가 젊은 나이라서, 얼마든지 나중에 아들을 낳을 수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인현왕후와 인척관계에 있던 송시열등 서인출신의 대신들은 숙종에게 원자의 정호를 연기할 것을 상소하면서, 숙종과 크게 대립하게 된다.

 

당시 인현왕후의 나이가 23살의 젊은 나이이기 때문에, 나중에 만일 인현왕후가 아들을 낳는다면, 왕비의 아들이기 때문에 그 아들은 당연히 원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 정상인데, 이미 후궁인 장희빈의 아들이 원자로 올라서있어서

조선왕실에는 두명의 원자가 존재하는 엄청난 모순에 빠지게 된다. 바로 이점 때문에 서인세력들은 후궁인 장희빈 아들의 원자정호를 극렬하게 반대했던 것이다.

 

또한 인현왕후와 정치적 소속이 같았던 서인세력들은 남인소속이었던 장희빈의 아들이 왕의 후계자로 확정되는 상황에 반발했던 것이며,

결국 숙종은 원자정호에 반대하는 서인세력들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을 감행하게 되고, 송시열을 필두로 김수항, 김수흥 등 수많은 서인출신 대신들이 죽임을 당하는 기사환국이 일어나게 된다.

 

 

이렇게 장희빈의 아들의 원자정호문제로 인해서, 당시 정권을 잡고있었던 서인세력들은 모두 축출되어 권력을 잃게 되었고, 대신 장희빈과 정치적소속이 같았던 남인세력들이 권력의 중심세력으로 등장하게 된다.

 

1689년 기사환국 사태로 인해서, 인현왕후의 후견세력이었던 서인세력들이 권력에서 축출당하게 되자, 인현왕후도 결국 왕비자리를 박탈당하고 폐서인되어서 궁궐밖의 사가로 유폐되고 말았다.

 

서인세력에서 남인세력으로 조정의 권력이 이동해가면서, 인현왕후는 퇴출당하고 장희빈의 위세가 상승하는 결과를 가져왔던 것이다.

 

이당시 인현왕후가 퇴출된 것은, 당시 권력의 중심세력이었던 서인세력이 권력에서 밀려났던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데, 숙종은 서인세력의 힘이 너무 커지는 것을 우려해서, 그들의 권력을 약화시키려고 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 서인정권의 중심이자, 상징과도 같았던 인현왕후도 서인세력의 몰락과 운명을 함께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인현왕후의 폐비사태는, 정치적 영향을 많이 받았던 것으로 알려졌지만, 그 이면에는 또다른 사연이 있다고 한다. 조선왕조실록의 숙종실록을 보면, 숙종이 인현왕후를 폐서인하면서, 그이유를 비망기에 기록했다고 한다.

 

숙종이 내린 비망기에는 인현왕후의 못된 행실에 대한 숙종의 비난이 대단했었다고

한다. 인현왕후가 툭하면 장희빈을 투기하고 질투를 일삼았다고 하며, 심지어 인현왕후는 숙종에게 장희빈이 전생에 짐승이었다고 말하는 등 심한 비난을 일삼았다고 한다.

 

우리가 그동안 덕망이 높고, 고매한 인품을 지녔다고 존경해 마지않던 인현왕후가 장희빈에 대해서 심한 투기와 질투를 일삼았다고 하니!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 수가 없다.

 

자애롭고도 인자하기 그지없는, 훌륭한 성품을 지녔다는 인현왕후가 실제로는 숙종이 보는 앞에서, 심하게 장희빈을 투기하고 비방을 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숙종실록의 비망기에 기록되어 있는 정사의 기록이기 때문에, 부정하기가 힘든 사실이다.

 

 

또한 숙종이 장희빈에 대한 총애가 더욱 깊어지자, 인현왕후는 대전의 내관에게 금품을 주고 매수해서, 종종 숙종이 장희빈의 처소에 들지못하도록 음모를 꾸미기도 했다고 한다.

 

그리고 인현왕후는 장희빈이 임신했을 때에, 장희빈이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소문이 돌자, 장희빈을 직접 불러서 거짓된 소문을 퍼뜨린다는 이유로 장희빈에게 회초리까지 때렸다고 한다.

 

 

숙종실록’ 17권의 기록을 보면, 숙종 121210일날, 인현왕후는 내전에 명하여, 장희빈을 불러서 종아리를 때리게 하였다고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다.

 

장희빈이 숙종의 사랑을 독차지할 정도로 왕의 총애를 받고, 임신까지 하게되자. 인현왕후는 장희빈에게 심한 질투심을 느꼈던 것이며, 눈에 가시같은 장희빈을 불러내어, 엉뚱한 구실을 붙여서 회초리로 때렸던 것이다.

 

 

또한 인현왕후는 숙종에게 장희빈을 모략하는 말도 했다고 한다.

인현왕후는 숙종에게 간밤에 꿈속에 선왕이 나타나셔서 말씀하시기를, 장희빈은 팔자에 아들을 갖지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고 장희빈을 모략하는 꿈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이렇게 인현왕후는 장희빈을 거짓된 말로 비방하고는, 숙종에게 장희빈을 멀리하고, 다른 후궁들을 만나라고 권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실제로 숙종실록 17을 보면 인현왕후는 장희빈의 팔자에는 본래 아들이 없다고 숙종에게 거짓을 고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장희빈에게 왕의 사랑을 빼앗겼다고 생각해서 분개했던 인현왕후가 장희빈을 질투했다고 해서, 인현왕후를 비난할 수만은 없다. 남편이 밖에서 바람을 피워서 배다른 자식이 태어나면, 돌부처도 돌아앉는다는 속담이 있다.

 

인현왕후가 아무리 가문좋은 집안에서 태어난 성품이 좋은 왕후라고 하더라도, 그녀는 왕비이기에 앞서서, 어쩔 수 없는 여자인 것이다. 아무리 고매한 성품을 지닌 인물이라도, 인간이기 때문에 질투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다.

 

 

자신의 남편이 다른 여자를 더 좋아하고 더 총애하는 데, 이세상에 가만 있을 여자가 어디 있겠는가?

 

그렇지만 단순한 질투를 넘어서서, 죄없는 사람을 중상모략했다고 하면, 이것은 얘기가 달라지게 된다.

정사인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보면, 인현왕후는 분명히 장희빈을 투기하는 것을 넘어서서, 그녀를 중상모략까지 했던 것을 알 수가 있다.

 

덕망이 높기로 소문난 인현왕후가 장희빈을 투기했을 뿐만 아니라, 중상모략까지 했다고 하는 전혀 새로운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이것은 그동안 우리가 몰랐던 인현왕후의 새로운 모습이다.

소설 인현왕후전이나 장희빈드라마를 통해서, 그동안 우리가 알고있던 인현왕후와 장희빈의 모습과는 다른 전혀 새로운 사실이 밝혀져서, 놀랍고도 충격적이기까지 하다.

 

 

인현왕후가 이렇게까지 장희빈을 투기하고 비방까지 한 것은, 숙종의 사랑이 너무도 장희빈 한사람에게 편중되었기 때문이라고 보여지며,

숙종의 장희빈에 대한 편파적인 사랑 때문에, 위기의식을 느낀 인현왕후가 본능적으로 이런 과도한 행동이 나온 것이 아닌가 하고 판단된다.

 

인현왕후의 바램과는 달리, 장희빈은 1689년에 아들을 낳았고 숙종의 후사를 이어주는 수훈을 세우게된다.

그런데 이렇게 숙종의 아들까지 낳으면서 숙종의 큰 총애를 받았던 장희빈이 1701년에 돌연 대죄인으로 전락하여 사약까지 받게된다. 무슨 사연일까?

 

정말 끝을 모를 정도로, 숙종의 사랑을 독차지했던 장희빈이 사약을 받게되는 대반전이 일어났던 것이다. 세자까지 낳아 왕비의 자리에까지 올랐던 기세등등한 장희빈이 갑자기 사약을 받게된 데에는, 최숙빈의 역할이 크게 작용했다.

 

최숙빈은 바로 조선의 21대 임금인 영조를 낳은 영조의 어머니이자, 사극드라마 동이주인공이기도 하다.

 

최숙빈은 원래 중전의 처소에서 물을 길어나르는 험한 일을 하던 무수리였다.

일개의 무수리에 지나지 않았던 최씨가, 나중에 숙종의 후궁인 숙빈의 자리에까지 오르게되는데, 거기에는 그만한 사연이 있다고 한다.

 

최숙빈은 원래 인현왕후의 처소에서 인현왕후를 모시던 궁녀였는데, 기사환국 사태가 발생하고 인현왕후가 페비되어서 궁궐밖으로 유폐되어나가자, 쫒겨난 인현왕후를 잊지못하고, 옛주인을 안타까워하면서, 그리워했다고 한다.

 

최씨는 인현왕후가 폐서인되어 궁궐밖으로 쫒겨난 뒤에도 그녀의 생일이 되면, 생일상을 차려놓고 인현왕후의 생일을 기렸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날, 숙종이 궁궐안으로 시찰하고 있을 때에, 어디선가 한여인의 곡소리가 들려왔다고 한다. 숙종은 그여인의 곡소리를 따라서 가다보니, 한 궁녀의 처소에 다다르게 되었다.

숙종이 그 궁녀의 문을 열자, 그 방안에서는 한 궁녀가 생일상을 차려놓고, 누군가에게 절을 올리며, 곡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상히 여긴 숙종이 그녀에게 연유를 물으니, 그녀는 자신의 옛주인의 생일날이 되어서, 엣주인에게 예를 갖추고 있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녀가 생일상을 차려준 옛주인은 바로 인현왕후였다. 곡을 하던 그녀는 바로 최무수리(최숙빈)였는데, 최씨는 인현왕후가 폐비되어 궁궐밖으로 쫒겨난 지 몇 년이 지났음에도,

자신의 상전이었던 인현왕후를 잊지못하고 그녀의 생일상을 차려놓고 예를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이 광경을 직접 목격한 숙종은 자신의 옛주인을 끝까지 섬기는 최씨의 가상한 마음에 크게 감복하였으며, 그녀의 갸륵한 성심을 크게 칭찬하면서 흐믓해했는데,

바로 이일이 계기가 되어서, 최씨는 숙종에게 성은을 입게 되었고, 결국 최숙원에 봉해지고, 나중에는 다시 최숙빈으로까지 승진하게 된다.

 

 

나중에 태어날 영조의 어머니이기도 한 최숙빈은, 7세 때 궁궐로 들어와서 물을 길어나르는 무수리로 힘든 나날을 보낸 후에, 이렇게 숙종의 성은을 입고, 후궁 최고의 품계인 숙빈의 품계로까지 오르게 된다.

 

그런데 숙종의 후궁이 된 최숙빈은 세자의 모후였던 장희빈과 새로운 연적관계가 되어 서로 경쟁하게 된다.

원래 최숙빈은 인현왕후를 모시던 궁녀시절부터 장희빈과는 앙숙관계에 있었다고 한다.

최숙빈이 궁녀로 있던 시절, 장희빈이 아들을 임신했을 때에, 장희빈을 인현왕후에게 고자질해서 회초리를 맞게 했던 장본인이 바로 최숙빈이었다.

 

그리고 몇 년 후에, 다시 조정의 권력에 큰 변동이 생기게 된다. 서인을 몰아내고 남인계열의 대신들로 조정을 꾸몄던 숙종은, 이제 남인세력의 권력이 너무 강해지자,

위기의식을 느낀 나머지, 너무 비대해진 남인세력의 권력을 약화시키고자, 정국의 변화를 추구하게 된다.

 

숙종은 1694년 남인세력을 견제하기 위해서, 다시 서인계열의 대신들을 대거 등용하게 된다. 이렇게 조정에 다시 서인세력이 권력의 중심세력으로 등장하게 되자, 폐비되었던 인현왕후도 다시 왕비의 자리로 복귀하게 된다.

 

 

인현왕후는 다시 왕비의 자리로 복귀하였지만, 궁궐밖 사가에서 유폐되었던 5년 동안에 너무 고생을 많이 한 나머지, 큰 병을 얻어서 앓아눕고 만다.

인현왕후가 복위되어서,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가고 왕실의 안정을 찾았지만, 복위된 인현왕후가 중병에 걸려서 병석에 눕게되는 불행이 닥쳐온 것이다.

 

1701년 복위된 인현왕후가 병석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끝내 사망하고 만다. 인현왕후가 죽자 마자, 또다시 왕실에는 대반전이 일어난다.

 

인현왕후가 사망한 후, 최숙빈은 화살이 꽂힌 인형을 가져와 숙종에게 보여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최숙빈은 숙종에게 이 인형은 저주의 인형으로, 장희빈의 처소에서 발견했다고 일러바쳤다고 한다.

 

인현왕후가 다시 왕비로 복귀한 후에, 왕비자리를 다시 인현왕후에 빼앗긴 장희빈이 취선당에 신당을 지어놓고, 매일밤마다 저주인형을 통해서, 인현왕후를 저주했다고 최숙빈은 숙종에게 고해바쳤던 것이다.

 

 

최숙빈의 고변은, 장희빈이 자신의 별당에다가 신당을 차려놓고서, 매일같이 인현왕후를 저주하는 굿을 벌여왔기 때문에, 인현왕후가 억울한 죽음을 당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현왕후를 죽게 만든 장본인은 바로 장희빈이라는 것이며, 장희빈의 신당에서 가져온 저주의 인형이 그 증거라는 것이다.

이러한 최숙빈의 고변은 숙종의 마음을 크게 흔들었으며, 결국 인현왕후의 죽음으로 크게 상심해있던 숙종은, 취선당을 찾아가 실제로 신당이 차려져있는 것을 보고, 장희빈이 인현왕후를 저주했다는 혐의를 사실로 믿게되었다고 한다.

 

결국 숙종은 인현왕후를 저주했다는 죄목으로 장희빈에게 자결을 명했으며, 장희빈은 스스로 사약을 받았다고 한다.

 

실제로 숙종실록 35권의 기록에는, 최숙빈이 장희빈의 행위를 숙종에게 몰래 고하였다고 기록이 되어있다, 여기서 장희빈의 행위는 장희빈이 인현왕후를 저주하는 굿을 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그런데, 장희빈이 인현왕후를 실제로 저주했다는 기록은 어떤 정사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다고 하는 점이다.

 

최숙빈의 밀고대로 장희빈이 인현왕후를 진짜로 저주했는지는, 그 증거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단 장희빈이 취선당에 사당을 지은 것은 사실이라고 한다. 일각에서는 장희빈은 그 사당에서, 몸이 아픈 세자의 병을 낫게 해달라고 비는 의식을 치렀다고 한다.

 

원래 몸이 약해 병에 자주 걸렸던 세자의 건강을 빌기 위해서, 장희빈이 지어서 의식을 치렀던 사당 때문에, 장희빈은 자신의 연적인 최숙빈에게 좋은 모함거리를 제공한 꼴이 되고 말았다.

 

 

장희빈은 최숙빈의 계략에 의해서 목숨을 잃게 되었다. 반대로 최숙빈은 최대의 연적을 제거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나중에 최숙빈의 아들 연잉군(영조)은 당당하게 조선의 21대 국왕으로 등극하게 된다.

 

아마도 장희빈의 죽음의 배후에는 인현왕후의 후견세력이었던 서인세력의 음모가 작용하지 않았는가 하는 판단이 가능하다.

왜냐하면 장희빈의 아들인 세자가 나중에 왕(경종)이 되고 나면, 장희빈은 다시 남인세력을 등용할 것이고 서인세력에 대한 엄청난 보복행위가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권력을 다시 잡은 서인세력은 자신들과 이해관계가 서로 상통하는 최숙빈과 연대해서 저주인형이라는 음모를 꾸며낸 것은 아닐까?

서인세력과 최숙빈은 어차피 한배를 탄 같은 세력이므로, 장희빈이라는 공동의 적을 두고 있기 때문에, 두세력이 연대해서 장희빈이라는 공동의 적을 제거한 것이 아닌가 하고 판단된다.

 

 

서인세력과 최숙빈은 장희빈을 제거함으로써, 후한도 없애고 인현왕후에 대한 복수도 하고 일거양득의 효과를 거둘 수가 있었던 것이다.

 

나중에 서인세력이 계속 정권을 유지시키고, 최숙빈의 아들 영조가 왕이 되는 등, 나중의 상황들이 서인과 최숙빈이 원하는 대로 이뤄지는 것을 보더라도, 두세력이 연대해서 음모를 꾸몄을 가능성이 농후하다고 본다.

 

최숙빈의 초상화

 

아뭏튼 우리가 알고있던 것처럼 장희빈이 인현왕후를 저주해서 죽게했는지는 현재로서는 알 수가 없다. 장희빈이 인현왕후를 저주했다는 내용은 정사에는 기록이 없고, 오직 소설 인현왕후전에만 있는 내용이다. 

장희빈을 표독스러운 악녀로 묘사한 내용들은 모두 소설 인현왕후전에 나오는 내용이다

 

조선왕조실록 같은 정사에는 없고, 소설 인현왕후전에만 있는 내용을 우리는 진실이라고 믿어왔던 것이다. 그렇지만 조선왕조실록에서 장희빈은 표독스럽다거나, 사악한 모습이나 행동은 전혀 묘사되어 있지 않다.

 

오히려 장희빈은 자신의 아들인 세자의 장래를 위해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길을 선택한 아주 헌신적인 어머니상을 구현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덕망이 높고 인품이 뛰어났다고 알려진 인현왕후는 질투도 잘하고, 종종 장희빈을 모략하기도 했던 질투심 많은 평범한 여자에 불과하다는 사실도 확인할 수 있었다.

 

 

장희빈과 인현왕후 두여성 모두 그시대에 정치적 피해자이자 희생양이었다고 느껴진다. 장희빈과 인현왕후 중 누가 악녀고, 누가 의녀라고 평가할 수 없다고 본다.

인현왕후와 장희빈은 단지 숙종이라는 한 남자를 사랑했던 죄밖에 없으며, 그시대의 잘못된 관습과 전통이 낳은 그시대의 피해자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마지막 승자는 영리한 최숙빈이라고 할 수 있다. 최숙빈은 그시대의 정치적 상황을 잘 이용해서, 최후의 승자가 되었다.

 

인형왕후를 이용해서 숙종의 은총을 얻어냈고, 서인세력과 연대해서 최대의 연적 장희빈을 제거하는 데 성공했으며,

인현왕후와 장희빈은 모두 죽었지만 자신은 후궁최고의 자리인 숙빈에 올랐으며, 아들까지 왕이 되었으니, 이보다 더 큰 여성으로서의 영광이 어디 있겠는가?

 

그동안 악의 화신이자 희대의 요부로 묘사되어왔던 장희빈에 대해서 새로운 해석을 내려야만 할 것이다 

단지 소설책 하나만을 근거로 해서, 표독스러운 악녀라는 멍에를 짊어져야 했던 장희빈은 정사의 기록을 통해서, 새로운 인물로 재해석되어야만 할 것이다.

 

 

 

 

 

 

 

Posted by 프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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