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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6.07.29 한국최고의 주먹 김두한의 싸움실력과 기술, 신마적과의 대결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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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최고의 주먹, 김두한과 구마적, 신마적 엄동욱의 대결,

 

일제시대 종로 우미관의 뒷골목에는 대단한 주먹이 나타나, 종로뒷골목을 주먹하나로 평정해나가고 있었다.

 

날카로운 눈매와 단단하고 다부진 체격을 가진 이 배짱좋은 사나이는 1930년대 중반 종로 뒷골목에 혜성처럼 나타나더니, 뒷골목의 이름난 깡패들과 주먹들을 하나둘씩 제압해나갔고, 급기야는 우미관 최고의 두목 구마적에게 당당하게 도전장을 내밀었다.

 

1930년대 중반 17세의 나이로 당시 종로의 뒷골목에서 최고의 오야붕으로 행세를 하던 구마적에게 도전장을 던졌고, 종로 최고의 주먹자리를 놓고 한판승부를 벌인 사람은 바로 김두한이다.

 

일제강점기 때, 우리나라 최고의 싸움꾼으로 이름을 날리던 두명의 주먹들이 있었는데, 한사람은 경성의 종로를 무대를 탄탄한 주먹왕국을 이룩해나갔던 김두한이고,

또 한사람은 북한 신의주를 무대로 눈부신 싸움실력을 선보이면서 북한은 물론 중국에까지 진출해 큰 명성을 날렸던 시라소니 이성순이다.


 

김두한과 시라소니, 이 두명의 싸움꾼들은 일제시대와 해방 이후 낭만파주먹의 대표주자들로서, 각각 남과 북을 대표하는 최고의 싸움꾼으로 명성을 날리면서 수많은 싸움신화를 만들어간다.

 

시라소니 이성순이 북한지역에서 최고의 싸움꾼으로 막 등극할 무렵인, 1930년대 중반 남한지역에서는, 약관 10대의 나이로 또한명의 걸출한 인물이 나타나, 싸움깨나 한다는 주먹들을 닥치는 데로 쓰러뜨리고, 종로의 뒷골목을 평정해나가고 있었다. 그가 바로 잇뽕 김두한이다.

 

김두한이 경성(서울)을 대표하는 우미관의 최고의 주먹으로 올라설 수 있었던 계기는 바로 종로의 큰오야붕이자 주먹계의 터주대감인 구마적과 신마적을 제압했기 때문이다.

 

그당시 서울 종로를 장악하는 주먹이 서울을 대표하는 가장 큰 주먹으로 행세할 수 있었고, 서울의 대표주먹이 우리나라 전체를 대표하는 가장 큰 주먹이자, 오야붕으로 인정받게 된다고 한다.

 

 

또한 1930년대 당시, 경성(서울)에서 가장 상권이 발달한 지역은 바로 우미관이었기 때문에, 우미관을 장악하는 오야붕은 자동적으로 경성 최고의 오야붕자리를 얻게 됨을 의미한다.

일제시대 당시 종로의 우미관골목은 크고 작은 술집들이 즐비해있고, 대형 우미관극장이 자리잡고 있어서, 서울지역에서 최고의 금싸라기땅에 속하는 지역이었다.

 

이 우미관골목의 헤게모니를 장악하는 주먹은 결국 전국을 대표하는 최고의 오야붕의 귄위를 인정받을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싸움도 잘하지만 상황판단이 무척 빠르고, 머리가 잘 돌아가는 김두한은 바로 이러한 지정학적 이유로 해서, 종로로 넘어온 뒤부터 호시탐탐 우미관골목의 최고의 오야붕으로 군림하던 구마적과 신마적을 노리고 있었다.

   

김두한의 싸움실력

 

김두한은 다들 알다시피 김좌진장군의 아들이다. 독립운동을 가열차게 벌여나갔던 김좌진장군을 아버지로 둔 이유 때문에, 김두한의 어머니는 수없이 일경에게 끌려가 탄압을 받고 감옥에 수감되는 신세가 되었으며,

어려서부터 아버지와 어머니의 보호를 제대로 받지못했던 김두한은 길거리를 떠돌다가 한때는 수표교다리 밑에서 들어가 거짓생활로 유년생활을 보냈다.

 

그리고 나이가 어렸을 때에, 종로에서 설렁탕집을 운영하던 원노인을 만나게 되고, 김두한이 김좌진장군의 아들임을 알고있는 원노인의 배려와 보호를 받으면서 생활하게 되는데, 원노인은 김두한에게 매일같이 설렁탕국을 끓여주었고, 저녁에는 당수도장에서 운동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

 

김두한은 이당시 원노인이 챙겨준 영양식을 먹으면서, 기골이 장대한 사나이로 성장하게 되었고, 당수도장에서 정권치기와 발차기를 혹독하게 연마해서, 그의 뛰어난 싸움기술의 기틀이 이때에 만들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17세가 된 김두한은 1930년대 중반 종로 우미관골목에서 탄탄한 주먹집단을 보유하고 있던 김기환의 수하로 들어감으로써, 본격적으로 주먹세계에 발을 들여놓게 된다.

 

옛우미관 극장 터

 

김두한이 우미관 뒷골목에서 깽판을 자주 벌이던 주먹들과 건달들을 혼자서 싸워 쓰러뜨리는 것을 본 두목 김기환은 김두한의 뛰어난 싸움실력과 인물됨을 미리 간파하고, 그를 자신의 휘하로 불러들여 부하로 삼았던 것이다.

 

김두한은 본래 야망이 매우 큰 사람이다. 김두한은 원래 남의 밑에서 부하로 지내는 것 자체를 용납할 수 없을 만큼 야심이 큰 사람이다.

형식적으로는 우미관 뒷골목의 오야붕인 김기환의 부하로 들어가서 적을 두고 있었지만, 원채 야심이 컸던 김두한은 자신의 별동부대를 따로 두어서, 자신이 직접 관리하며 두목으로 행세하고 있었다고 한다.

 

우미관 뒷골목에서 자신의 주먹조직을 서서히 키워나가면서, 언제가 주먹황제의 자리에 오를 야심을 품고있던 17세의 청년 김두한은 자신이 종로 최고의 주먹황제로 등극할 수 있는 기회만을 엿보고 있었다.

 

1930년대 중반이던 이 당시의 종로 뒷골목에는 여러개의 주먹조직들이 혼재해있었다고 한다. 어느 한 개의 주먹조직이 종로 전체를 장악한 것이 아니라, 10여개의 군소 주먹조직들이 혼재한 상태에서 각각 저마다의 세력을 과시했던 춘추전국시대였다고 한다.

 

 

따라서 이당시의 종로뒷골목에는 오야붕도 십여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10여명의 오야붕 중에서 경력이나 파워면에서 가장 세다고 알려진 큰 오야붕이 두명 있었는데, 그당시 큰 오야붕으로 떠받들어졌던 인물은 바로 구마적과 신마적이었다고 한다.

 

주먹도 가장 쎄고, 경력이나 스펙이 가장 뛰어났던 구마적과 신마적이 종로 뒷골목에서 가장 영향력 있고 강한 오야붕으로 많은 주먹들의 신망을 받고 있었다고 한다.

 

구마적과 신마적이 종로 뒷골목을 모두 통제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곳의 주먹이나 건달들은 조직을 초월해서 이 두 마적형님들을 큰 오야붕으로 인정했고, 최고의 강자로서 대접을 해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두 마적 다음으로 김두한이 속해있던 주먹조직의 두목 김기환이 종로에서 한 세력 하고 있었다.

김기환은 체육관을 직접 운영하며 복서로도 활동할 만큼 운동과 주먹에 일가견이 있던 인물로 서대문지역에서 활동하더니, 나중에는 종로로 넘어와서 자기만의 주먹조직을 확보해나가고 있었다.

 

 

이렇게 1930년대 중반의 종로바닥은 십여개의 군소 주먹조직들이 할거했지만, 가장 큰 세력은 YMCA의 신마적, 우미관패의 구마적, 그리고 관철동의 김기환이렇게 3대 조직이 종로를 대표하고 있었다.

   

이처럼 1930년대 중후반 우미관을 비롯한 종로뒷골목에서 구마적과 신마적이 가장 센 오야붕으로 행세하고 있었다는데, 그 이유는 두마적의 주먹이 실제로도 가장 쎘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다른 주먹 김기환은 30년대 후반 종로술집에서 일본형사를 두드려패는 사고를 쳐서,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6년 이상 철장신세를 지게됨으로써, 그는 종로의 3대주먹 자리에서 낙오될 수밖에 없었으며, 종로는 구마적과 신마적을 중심하는 2대 주먹세력이 종로뒷골목의 헤게모니를 장악하게 된다.

 

신마적과 구마적은 스스로 실력행사를 통해서, 종로지역의 큰오야붕의 지위를 획득하게 된 것이다.

신마적은 원래 본명이 엄동욱으로, 보성전문(현 고려대학교의 전신)2년 중퇴하고 일본유학까지 갔다온 인테리형 주먹이다.

 

신마적은 종로2가에 있는 YMCA에 혈혈 단신으로 들어가서, 해학기 같은 권투부학생들과 유도부 학생등 그곳을 장악하고 있던 학생주먹들을 모두 쓰러뜨리고, 당당히 YMCA 학생부의 보스로 올라섰던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또한 신마적은 종로뒷골목에 술을 마시러왔던 경성제국대학의 일본유도부학생 10여명과 싸워 혁혁한 전과를 올림으로써, 종로의 큰오야붕으로 등극할 수 있었다고 한다.

 

구마적의 본명이 고희경으로 종로의 가장 큰 이권이었던 우미관극장과 조선극장의 기도주임(경호부장?)으로 있으면서, 공짜영화를 보러오는 건달들과 주먹들을 닥치는 데로 흠씬 두들겨패는 등 실력행사를 통해서, 스스로 종로뒷골목의 큰오야붕으로 부상할 수 있었다고 한다.

 

구마적 고희경 사진

 

또한 구마적은 힘과 완력이 무척 쎈 장사라고 한다. 구마적은 한 때 종로3가에 있는 자동차수리공장에서 일했는데, 목격자의 말에 의하면,

고장난 자동차바퀴를 교체하기 위해서, 구마적은 자동차의 앞부분을 혼자서 번쩍 들어올렸다고 하며, 다른 인부가 앞바퀴를 다 교체할 때까지, 구마적은 흔들림없이 자동차의 앞차체를 계속 들어있었다고 한다. 한마디로 말해서, 구마적은 힘이 천하장사였다고 한다.

 

이렇게 구마적과 신마적은 스스로의 힘과 주먹을 바탕으로 해서, 괄목할만한 실력을 보여줌으로써, 종로뒷골목의 건달들로부터 큰형님으로 대접받는 큰오야붕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김두한과 구마적의 싸움

 

이렇게 엄청난 관록을 자랑하는 두마적 형님들에게, 이제 겨우 17세가 된 하이틴주먹 김두한이 감히 도전장을 던지고야 말았다.

남의 밑에 있는 것을 결코 용납하지 않고 항상 최고가 되기를 바라고있었던 야심만만한 김두한이 감히 큰 오야붕에게 도전장을 던졌던 것이다.

 

김두한은 주먹치고는 머리가 잘 돌아가고 상황판단이 빠른 사람이다. 김두한은 자신이 종로의 가장 큰주먹인 구마적과 신마적을 제압하지 못한다면, 자신이 추구하는 주먹황제에의 길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잘 알고있었다.

 

우미관골목에서 소규모의 주먹조직을 만들어 거느리고 있던 17세의 김두한은 1934년도에 당당히 구마적 엄동욱에게 도전했으며, 우미관극장 앞에서 벌어진 두사람간의 싸움에서, 김두한은 발차기 단 두방을 구마적의 턱에 꽂아넣고, 깨끗하게 KO시켜버렸다고 한다.

 

힘이 천하장사였던 구마적이었지만, 기습적으로 날아온 김두한의 공중 발차기를 턱에 얻어맞고 쓰러진 구마적은 다시 일어났지만, 연이어 날아온 김두한의 두번째 발차기를 다시 턱에 맞고, 그대로 고꾸라지고는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고 한다.

 

 

김두한의 특유의 위력적인 발차기기술로 천하장사였던 구마적을 눈깜짝할 사이에 KO시켜버린 것이다.

17세의 김두한의 자신보다 12살 정도 많은 종로의 큰오야붕 구마적을 완벽하게 KO시켜버리고, 종로뒷골목의 새로운 신흥강자로 우뚝 솟아오르게 되었다.

 

김두한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튼튼한 체력과 기골이 장대한 덩치를 갖고있었다. 김두한의 키는 176cm1930년대 당시로는 상당히 큰 키에 해당하며, 다리가 특히 길어서 발차기에 능했다고 한다. 참고로 시라소니의 키는 175cm.

 

일부에서는 김두한 키를 183cm이라고 소개하고 있는데, 이것은 잘못된 정보로, 김두한이 친한친구인 김동회와 같이 찍은 사진을 보면 김두한의 키를 간접적으로 측정할 수 있다.

 

김동회의 키는 184cm인데, 김동회와 같이 찍은 사진에서 김두한은 김동회보다 한참 작게 나왔는데, 7~8cm 정도 김동회보다 작아보였다. 그러므로 김두한의 키는 176cm 전후가 확실히 맞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놓치고 있는 부분은 김두한은 단지 힘만 쎄고, 주먹만 강한 싸움꾼쯤으로 알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지만 김두한은 스피드가 무척 빠른 싸움꾼이며, 특히 김두한의 발차기기술은 거의 신기에 가깝다고 한다.

 

김두한의 싸움의 대부분은, 김두한이 자신의 신기에 가까운 발차기기술을 활용해서 강자들를 쓰러뜨렸다고 한다.

김두한을 싸움을 할 때에, 순간적으로 앞으로 치고나가면서, 그 탄력을 이용해 공중으로 도약하면서, 발차기로 상대방의 안면에 적중시켜서, 쓰러뜨린다고 한다.

 

남들보다 한박자 더 빠른 스피드와 공중으로 도약하면서 차는 발차기기술에 한번 걸리면, 왠만한 주먹들도 견디지 못하고, 그대로 쓰러지고 만다는 것이다.

김두한이 중년에 접어들었을 때에는 살이 많이 쪄서 몸무게가 90kg에 육박했지만, 20대 전후의 김두한은 매우 날씬하고 균형잡힌 몸매를 갖고 있었다고 한다.

 

김두한과 부하들

 

젊었을 때의 김두한은 무척 빠르고 날렵했으며, 싸움에서 자신의 빠른 스피드를 최대한으로 활용했는데, 싸움이 벌어지면 김두한은 눈깜짝할 사이에 상대방의 이마를 발로 걷어차서 순식간에 상대방을 KO시켜버리곤 했다고 한다.

 

전성기때의 김두한은 힘도 셌지만, 스피드도 매우 뛰어났으며, 일대일 싸움에서는 자신의 발차기기술을 사용해서, 몇초만에 싸움을 끝내버렸다고 한다. 구마적, 신마적, 마루오카 등 당대의 강자들을 김두한은 자신의 빠른 스피드와 신기에 가까운 발차기기술을 사용해서 10초 이내에 KO시켰다고 한다.

 

, 김두한은 파워와 스피드와 싸움기술의 세박자를 모두 갖추고 있는 완벽한 싸움꾼이었던 것이다.

 

구마적은 자신이 기도주임으로 있던 우미관극장에서 공짜영화를 보기위해 들어온 나이 어린 주먹들을 무참히 두들겨팼고, 밤에 몰래 들어와 극장바닥에서 잠을 자는 거지들을 두들겨패서 쫒아버리곤 했다.

이러한 일은 우미관의 기도부장으로 있던 구마적의 업무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구마적에게 흠씬 두들겨맞았던 어린 주먹들과 거지들 대부분이 김두한의 조직에 속해있던 동생들이었던 것이다.

 

김두한은 동생들을 종종 두들겨팼던 구마적을 상대로 싸움을 걸어서, 그를 쓰러뜨림으로써 동생들의 신망을 더욱 두텁게 얻고, 동시에 자신은 최고의 오야붕을 쓰러뜨린 성과를 등에 업고, 종로최고의 주먹에 한결 더 다가갈 수 있는 12조의 효과를 노렸던 것이다.

 

김두한은 당당히 태산같은 구마적 고희경을 쓰러뜨림으로써, 종로황제에의 길에 한발짝 더 다가갈 수 있게 되었다.

   

김두한과 신마적의 대결

 

그런데 그가 제압할 상대는 한사람 더 남아있었다. 그것은 구마적과 함께 종로뒷골목에서 최고주먹의 쌍두체제를 이루고있던 신마적을 극복하는 일이었다.

 

신마적 엄동욱은 YMCA 학생패의 큰형님으로써, 종종 동생들을 데리고 종로뒷골목에서 맥주를 마시곤 하였는데, 술집에서 시비를 걸어오는 건달들을 닥치는 데로 쓰러뜨리면서, 종로의 싸움꾼으로 이름을 크게 떨쳤던 인물이다.

 

신마적 엄동욱 사진

 

신마적은 일본유학시절에 배운 유도가 수준급 이상이었고, 원체 힘이 좋고 완력이 쎄서 신마적에게 한번 붙잡힌 상대는 손한번 써보지 못하고, 그대로 신마적으로부터 들어올려져 패대기쳐져, 혼절하고 만다는 것이다.

 

기본 유도를 베이스로 한 신마적의 싸움기술을 상대를 낙아채서 엄청난 완력으로 집어던지는 기술이며, 던져서 떨어지는 상대방에게 또한번의 발차기공격으로 이중의 충격을 주어서 완전 침몰시킨다고 한다. 신마적과 싸움에서는 그에게 붙잡히는 날에는 갈비뼈가 부러지거나, 완전 아작이 난다는 것이다.

 

신마적은 1930년대 중반 종로 2가 뒷골목의 맥주집에 놀러왔던 경성제국대학 출신의 일본유도부 학생패거리 10여명과 시비가 붙었다고 한다.

신마적이 종로 뒷골목의 맥주집에서 맥주를 마시고 있었을 때에, 일본유도부학생패들 10명이 그 맥주집으로 들어와서 조선여자를 농락하면서, 행패를 부렸다고 한다.

 

일본유도부 학생패들의 행패가 점점 도가 심해지자, 맥주를 마시던 신마적이 일본학생들에게 행패를 더이상 부리지말 것을 요구하면서, 시비가 붙었다고 한다.

 

일본유도부 학생패들은 자신들을 저지하는 신마적에게 욕을 퍼부으면서 시비를 걸어오자, 신마적이 이들을 맥주집 밖으로 나가자고 유인을 했으며, 맥주집밖으로 나오는 일본학생들을 차례로 집어던져서, 땅바닥에 내다 꽂았다고 한다.

 

먼저 맥주집밖으로 나간 신마적은 특유의 엄청난 괴력으로, 밖으로 나오는 일본학생들을 한사람씩 차례로 낚아채서 그대로 집어던져 내다꽂았다고 하며, 오직 혼자서만 10명의 일본학생들을 모조리 쓰러뜨렸다고 한다.

 

자주 종로뒷골목에 와서 행패를 부리곤 했던 악명놓은 일본유도부 학생들은 신마적에게 된통으로 혼나고 난 다음부터는 다시는 종로뒷골목으로 찾아오지 않았다고 한다.

 

경성제국대학의 일본유도부학생들이 신마적의 유도기술에 걸려서, 모두가 아작이 나고말았던 것이다.

이렇게 신마적이 혼자서 악명놓은 일본유도부학생 10여명을 모조리 쓰러뜨리는 것을 그곳에 있는 많은 상인들과 주먹들이 목격했다고 한다. 그후부터 신마적은 종로뒷골목의 큰오야붕으로 급부상하게 되었다고 한다.

 

종로에서 오랫동안 터주대감 노릇을 해왔던 구마적 고희경도 신마적의 실력을 인정했다고 하며, 신마적이 1909년생이고 구마적은 신마적보다 3살 많은 나이라서 두사람은 서로 자연스럽게 호형호제하면서 친하게 지냈다고 한다.

 

, 구마적과 신마적은 서로가 강자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서로가 서로의 권위를 인정해주면서, 경쟁보다는 서로 손을 잡으면서 협력관계를 맺었던 것이다.

 

구마적 고희경은 그는 종로에서 최고의 파워과 실력을 선보임으로써 마적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는데, 당시 마적은 만주지역에 사는 사람들에는 공포의 대상이었다고 한다.

 

마적(馬賊)은 쉽게 말하면, 말을 타고 다니는 도적패라는 뜻의 한자어이다. 1930년대~1940년대 당시 중국 만주지방에는 마적때가 들끓었으며, 한번 마적때가 마을을 휩쓸고 지나가면, 사람이고 짐승이고 남아나는 것이 없었다고 할 정도로 공포의 대상이었다고 한다.

 

  만주의 마적단

 

만주에서 자주 출몰했던 마적떼는 말을 타고다녀 기동력이 무척 뛰어났으며, 말을 타고 다니면서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면서, 수많은 마을과 도시들을 휩쓸고 다녔던 악명높은 도적집단들이라고 한다.

마적패들은 작게는 30명에서 많게는 수백명까지, 그 규모가 천차만별이라고 하며, 또한 마적패들은 대부분 총과 무기를 소지하고 다녔기 때문에, 더욱더 무서운 존재감이었다.

 

쉽게 이야기하면 마적은 단순한 도적패가 아니라, 무기로 중무장한 하나의 군대라고 보면 정답이다. 사실은 마적패는 원래 청나라때의 지방군벌들이라고 한다. 그러니 마적패들은 총이나 대포 같은 무기들로 중무장하고 다니는 것이다.

 

마적패는 만주지역에 주둔하고 있던 지방군벌들이었는데, 청나라가 망하고 난후 지방군벌들이 중앙정권으로부터 독립해나갔고, 이렇게 중앙정부의 통제에서 벗어난 지방군벌은 또다시 여러 소규모부대로 쪼개지게 됐다.

 

그렇게 중앙정부와 상위군벌로부터 자유로워진 소규모 지방부대원들은 더이상 중앙정부로부터 군량지원이나 급료를 받지못하게 되자, 스스로 먹고살 길을 찾아 나섰는데, 그게 바로 도적질하는 것이었다.

그렇게해서 청나라때의 지방군벌들이 청나라가 망한 후에 중무장한 도적패, 즉 마적이 된 것이다.

 

그러니까 청나라가 망하면서, 이합집산으로 흩어진 지방군벌이 중앙의 군량지원마저 끊기자 도적패로 둔갑해버린 것이다.

그러니 마적패들은 원래 군대였으니, 각종 무기들로 중무장한 상태였기 때문에, 일선의 경찰들도 이들의 상대가 되질않았다고 한다.

 

만주에서는 중무장한 마적때가 쳐들어오면 경찰이 제일 먼저 도망간다고 한다.

그리고 그마을은 완전 쑥대밭이 된다고 한다. 이렇게 중앙정부의 통제를 받지않게된 지방군벌의 일부가 마적패로 돌변해서 백성들을 괴롭혔던 것이다.

 

종로에서 무시무시한 포스를 과시했던 고희경이 자연스럽게 마적의 호칭을 얻게 되었고, 나중에 종로바닥으로 들어온 엄동욱이 고희경 몾지않은 혁혁한 전과를 올리자,

그도 마적의 호칭을 부여받게 되었는데, 사람들은 먼저 마적이 된 고희경을 구()마적, 나중에 마적의 호칭을 얻은 엄동욱을 신()마적이라고 부르게된 것이다.

 

 

이렇게 구마적과 함께 종로뒷골목에서, 큰오야붕으로 패권을 잡고있던 신마적 엄동욱에게는 구마적이 김두한에게 무너졌다는 사실은 큰 충격이었을 것이다.

 

시퍼렇게 젊은 김두한이 큰오야붕 구마적을 쓰러뜨렸다는 것은 그다음 상대는 바로 신마적 자신일 수 있기 때문이다. 신마적은 1909년생으로 그당시 17세였던 김두한보다 9살이 나 더많은 엄연한 형님뻘이다.

 

그런데 막둥이같은 김두한이 위계질서를 완전 무너뜨리고 큰형님뻘되는 구마적을 무지막지하게 패서 쓰러뜨렸으니, 김두한에게 단단히 가르침을 주어야 하는 게 신마적의 체면상 맞는 일이라고 본다.

그런데 신마적은 왠일인지 자신과 친했던 구마적을 쓰러뜨린 김두한에게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구마적이 쓰러진 지, 2년 후인 1936년도에 김두한은 마지막 남은 큰오야붕 신마적에게 당당히 도전장을 내밀었다. 

 

1936년도의 추운 겨울날 여느때처럼 신마적은 동생들을 데리고 종로뒷골목에 있는 비너스맥주집에서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신마적이 맥주집에 들어와서 동생들과 함께 맥주를 몇잔 들이키고 있을 때, 느닷없이 김두한이 문을 박차고 들어와서, 신마적 앞에 우뚝 버티고 서버렸다고 한다. 그리고 뒤따라 들어온 김두한의 동생들이 신마적일행을 빙둘러 포위해버렸다고 한다,

 

 

김두한이 신마적에게 시비를 걸고있는 것이다. 김두한은 자신보다 9살이나 더 많은 신마적에게 형님, 형님이 제 동생들을 손좀 보셨다고요, 오늘은 이 동생이 형님을 좀 때리려고 합니다!’고 당돌하게 말을 건넸다고 한다.

 

김두한이 종로의 큰오아붕 신마적에게 감히 정식 도전장을 내민 것이다. 이 말을 들은 신마적은 탁자를 뒤짚어 버리면서 노발대발했다고 한다.

 

종로의 최고의 주먹황제 자리를 꿈꾸었던 야심만만 김두한은 그동안 종로의 난다긴다하는 주먹들을 하나둘씩 재압해왔고, 2년 전에는 종로의 양대산맥 중 하나인 구마적에게 도전해 완벽한 승리를 거두었다.

 

그리고나서 자신의 주먹조직을 더욱 크게 확장해왔던 김두한은 마지막 남은 큰오야붕 신마적을 쓰러뜨리기 위해서,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런데 며칠 전 종로뒷골목에서 신마적이 자신의 동생 2명을 두들겨팼다는 소식이 들어왔으며 김두한은 드디어 기회가 왔구나 하고 회심의 미소를 지었던 것이다.

이제 자신이 종로 최고의 주먹황제가 되는 데에, 마지막 걸림돌이었던 신마적을 쓰러뜨릴 기회가 왔다고 생각한 김두한은 곧바로 신마적에게 도전장을 내민 것이다.

 

김두한은 다른 싸움꾼처럼 무턱대고 싸우는 그런 무지막지한 싸움꾼은 아니라고 한다.

김두한은 싸우기 전에 철저하게 싸움의 명분을 먼저 판단한다고 한다. , 김두한은 명분없는 싸움은 기피하고, 명분 있는 싸움을 선호한다고 한다.

 

왜냐하면 무턱대고 싸워서 상대를 제압한다면, 현재는 싸움에서 이겨서 승리를 만끽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나중에 그 패자나 그의 부하들로부터 보복을 당할 수도 있기 때문에, 싸움의 명분을 충분히 갖춘 후에 싸움으로써,

승자와 패자가 모두 싸움결과에 승복할 수 있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싸움에도 그럴싸한 명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또한 새카맣게 어린 동생이 나이가 훨씬 많은 큰형님뻘 되는 대선배님을 아무 명분이나 이유없이 때렸다고 한다면, 과연 자신을 동생들이 존경하게 신망을 보낼 수 있을까 하는 부분도 생각을 많이 한 것이다.

 

어쩌면 그래서 김두한은 구마적을 쓰러뜨린 후, 2년을 기다린 끝에 신마적에게 도전하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며칠 전에 김두한의 동생 두명이 우미관 뒷골목을 지나가던 신마적과 눈이 맞추쳤는데도 인사도 하지않게 히죽히죽 웃었다고 한다.

감히 똘마니들이 종로의 큰오야붕인 신마적을 쳐다보고 인사도 없이 웃는다는 것은 한마디로 말해서 신마적을 모욕하는 행동이다.

 

그래서 크게 화가난 신마적이 그 둘을 잡아다가 집어던져버렸다고 한다.

그런데 신마적에게 패대기를 당한 두 똘마니들은 모두 김두한의 동생들이라고 하며, 그들은 곧바로 김두한에게 달려가 고자질했던 것이다.

 

김두한은 신마적에게 동생들을 싸움에 끌어들이지 말고 11 대결을 신청했다고 한다. 또한 평소에 신마적이 호신용으로 칼 두자루를 다리춤에 끼고 다닌다는 것을 알고있는 김두한은 칼을 모두 동생들에게 맡겨놓고, 정정당당하게 맨손으로 겨루자고 제안했다고 한다.

 

실제로 신마적은 다리춤에 숨겨놓았던 단도 두자루를 꺼내서 동생에게 맡겼다고 한다.

  그리고 맥주집 밖으로 나간 김두한과 신마적은 종로의 최고의 오야붕을 가리는 역사적인 대결을 벌였다고 한다.

 

빠르고 민첩하며 싸움기술이 뛰어난 김두한과 엄청난 괴력의 장사인 신마적간의 피할 수 없는 운명적인 싸움이 벌어진 것이다.

 

 

선제공격에 나선 것은 김두한이었다. 김두한은 쏜살같이 앞으로 튀어오르더니 순식간에 오른발킥으로 신마적의 안면을 걷어차버렸다. 그리고 바닥으로 내려온 김두한은 또다시 왼발킥을 신마적의 가슴팍을 차버렸다.

 

순식간에 두 번의 발차기공격을 당한 신마적은 바닥에 쓰러졌다가 곧바로 다시 일어나서 공격자세를 취하고, 김두한의 팔을 잡으려고 다가왔다.

 

그런데 이번에도 먼저 공격한 것은 김두한이었으며, 김두한은 재빠르게 오른발로 신마적의 복부를 찍어버렸다고 한다. 그리고 또다시 이어지는 김두한의 횐발킥은 신마적의 턱을 정확하게 강타하고 지나갔다.

 

김두한의 이 네방의 킥공격으로 치명적이었으며, 천하의 싸움꾼 신마적은 마치 항공모함이 침몰하듯이 바닥으로 고꾸라지고 말았다고 한다.

수년동안 종로 뒷골목의 대표적인 주먹으로 군림해왔던 신마적은 단 한번의 제대로된 공격도 못해본 채, 김두한에게 처참하게 얻어맞고 충격적인 KO패를 당하고 말았다.

 

신마적은 자신의 주특기인 유도기술을 전혀 써보지도 못하고, 김두한의 빠르고 신속한 킥공격에 무너지고 만 것이다 

신마적은 그동안 수없이 많은 싸움을 치렀고, 그때마다 상대를 모두 제압해왔지만, 김두한은 신마적이 상대하기에는 너무도 빠르고 너무도 싸움기술이 뛰어났던 것이다.

 

신마적이 그동안 쓰러뜨렸던 상대들과 김두한은 본질적으로 차원이 달랐던 것이다. 신마적은 그동안 싸울 때마다 자신의 주특기인 잡고 집어던지기가 안통하는 상대가 없었는데, 김두한처럼 이렇게 빠른 상대는 한번도 만나보지 못했던 것이다. 그만큼 김두한은 신출귀몰하게 빨랐으며, 싸움기술이 한수 위였던 것이다.

 

신마적은 김두한에게 얻어맞고 쓰러진 후에 동생들에게 업혀서 근처에 있는 반도병원으로 후송되어 갔다고 한다.

신마적은 갈비뼈 4대가 부러졌다고 하며, 육체적인 상처도 상처지만, 자신보다 한참 어린 막내동생 같은 김두한에게 패했다 것 때문에, 마음의 상처가 더욱 컸다고 한다.

 

종로 뒷골목에서 거의 5년 동안 구마적과 더불어 종로의 주먹세계를 주름잡았던 천하의 신마적이 주먹 한번 써보지도 못하고, 동생들이 보는 앞에서 새파랗게 어린 김두한에게 만신창이가 되도록 엊어맞았으니, 세상에 이런 망신도 없는 것이다.

 

결국 김두한에게 패했다는 엄청난 상실감과 수치심에 사로잡힌 신마적은 병원에서 퇴원한 그 이듬해인 1937년 초에 곧바로 경성(서울)을 떠나버렸다고 한다.

 

김두한에게 패배한 기억을 도저히 떨쳐버릴 수 없었던 신마적 엄동욱은 동생 7명을 데리고, 병원에서 퇴원하자 마자, 곧바로 경성을 떠나서 만주 봉천으로 향했다고 한다.

신마적은 서울에서는 김두한에게 패해 대망신을 당했지만, 그가 새로이 이주했던 만주 봉천에서는 몇 개월 후에 또다른 주먹조직을 만들게 됐고, 봉천에서 제2의 주먹신화를 만들어나가게 된다.

 

   

2년전에는 구마적을 꺾고, 이제 신마적마저 꺾은 김두한은 명실상부한 종로의 최고오야붕으로 등극하게 되었다. 경성 최고의 주먹황제를 꿈꿨던 김두한의 꿈은 두명의 거물급 주먹들을 완벽히 쓰러뜨림으로써, 이제 그 꿈은 현실로 다가온 것이다.

 

김두한은 구마적과 신마적을 꺾은 후에, 자신의 주먹조직을 더욱 크게 확장시켜나가게 된다. 김두한은 우미관일대를 완전 장악한 후에, 이제는 서서히 경성(서울)의 다른 지역들로 진출해나갔으며,

왕십리, 서대문, 영등포, 마포 등의 주먹들을 제압하면서 서울의 대부분의 주요지역들을 자신의 휘하에 두게 되었고, 결국 김두한은 경성을 대표하는 거대한 주먹조직의 오야붕으로 군림하게 된다.

 

김두한은 자신이 꿈꿔왔던 조선 최고의 주먹왕국의 서막을 열게 된 것이다. 김두한은 경성의 모든 주먹조직을 접수하고 난 후에, 지방으로까지 자신의 주먹조직의 세력을 확장시켜나갔다고 한다.

 

서울근교의 수원, 용인을 필두로 대전, 전주, 광주, 대구, 심지어는 부산까지 자신의 부하주먹들을 진출시켜서, 이들 지역을 모두 자신의 휘하에 복속시켰다고 한다.

결국 김두한이 궁극적으로 꿈꿨던 것은 단순한 최고의 주먹이 아니라, 전국을 자신의 주먹조직으로 통할하는 전국구주먹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김두한이 경성의 최고주먹으로 우뚝 솟고, 전국으로 진출해나갈 즈음에, 자칫 신의주의 시라소니와 한판 대결을 펼칠 뻔한 사건이 터졌다고 한다.

바야흐로 남한 최고의 주먹 김두한 대 북한 최고의 주먹 시라소니의 역사적인 대결이 펼쳐질 뻔한 사건이 발생했다고 한다.

 

남한의 주요도시들을 대부분 손아귀에 넣은 김두한은 북한지역으로도 눈을 돌렸는데, 평양에도 동생들을 보내서 복속을 추진해서 성과를 거두었으며, 저멀리 신의주에도 동생들을 보내서 우미관에 복속하기를 독촉했다고 한다.

 

그런데 문제는 평양이나 다른 지역들은 손쉽게 복속과 협력을 이끌어냈지만, 신의주는 만만치 않았다고 한다.

 

1940년대 초경 당시 신의주에는 정팔이라는 인물이 오야붕노릇을 하고있었다. 신의주의 최고의 주먹은 누가 뭐래도 시리소니임은 더할 나워가 없다.

그런데 그당시 시라소니는 일본경찰을 두들겨패고 체포령이 내려져서 만주로 떠난 후라 신의주에는 없었고, 신의주는 시라소니의 동생뻘 되는 정팔이 시라소니를 대신해서 통치하고 있었다.

 

 

김두한은 경성최고의 주먹으로 올라서고 난 후, 남한의 대부분의 대도시를 자신의 휘하에 복속시켰고, 이제 북한의 남아있는 신의주마저 복속시키기 위해서 동생 병수와 털마진 개고기를 중심으로 일련의 주먹들을 신의주로 보냈던 것이다.

 

그런데 김두한 동생들로부터 우미관에 귀속하라는 메시지를 전달받은 신의주의 정팔은 즉답을 회피한 채, 다음에 답을 주겠다고 시간을 달라고 요구했다고 한다.

 

이렇게 신의주의 정팔이 시일을 질질 끌면서 지연작전을 쓰게 되자, 몇 달이 지나도록 답변을 못받은 김두한은 다시 수십명의 부하들로 돌격대를 편성해서 신의주로 올려보냈다고 한다.

 

그런데 우미관의 중간보스급인 병수와 털빠진 개고기를 위시로 해서, 수십명의 돌격대가 신의주의 정팔사무실로 들어서자 마자, 전혀 의외의 인물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고 한다. 바로 만주로 갔다던 시라소니가 정팔의 사무실에 딱 버티고 있었다고 한다.

 

신의주에서 오야붕노릇을 하고있던 정팔은 우미관에 복종하라는 김두한 동생들의 메시지를 받았지만, 즉답을 하지않고 버틴 것은, 바로 만주에 있던 시라소니를 믿었기 때문이다. 

일주일 후에 답장을 우미관으로 보내겠다고 거짓 약속을 한 정팔은 이렇게 시간을 벌어놓고서, 재빨리 만주 봉천으로 사람을 보내서 시라소니를 모시고 온 것이다.

 

천하의 싸움꾼 시라소니라는 든든한 백그라운드로 갖고있는 정팔은 김두한의 부하들에게 결코 항복할 수는 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김두한부하들에게는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말하고 난 후, 곧바로 만주 봉천에 가있던 시라소니를 재빨리 모셔왔던 것이다.

 

우미관의 중간보스급인 병수와 털빠진 개고기가 동생들과 함께 정팔 사무실로 들어가자, 사무실앞에 딱 버티고섰던 시라소니는 대뜸 김두한동생들에게 뭔일로 이곳에 왔냐고 물어봤다.

병수가 신의주의 우미관복속 이야기를 꺼내자, 시라소니는 앙칼진 목소리로 신의주는 자신이 관리하는 지역이며, 신의주는 그 어떤 조직에도 귀속 따위는 안한다고 일성을 내밷었다고 한다.

 

그리고 시라소니는 내말을 용인하지 못하겠다면 자신을 쓰러뜨려보라고 말했다. 시라소니는 김두한의 동생들에게 부하들을 희생시키지 말고 대표끼리 싸워서 승부를 내자고 제의를 했으며, 드디어 시라소니와 김두한 동생들간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사무실 밖으로 나온 시라소니는 쏜살같이 뛰어나가면서 그대로 병수의 이마를 들이받아 버렸고, 또한 옆에 있던 털빠진 개고기에게 오른발킥을 날려서 턱에 명중시켰다.

싸움이 시작된 지 몇초만에 시라소니의 전광석화같은 콤비플레이공격에 두명의 김두한 동생들을 그대로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그리고 다시 일어난 털빠진 개고기가 거품을 물면서 달려들자, 시라소니는 이번에는 공중으로 뛰어오르면서 공중걸이 박치기를 체중을 실어서 털빠진 개고기의 이마에 들이받아 버렸다.

 

뛰어오는 탄력을 이용해서 몸전체의 체중까지 실린 엄청난 파워의 시라소니의 공중걸이 박치기는 그 한방으로 털빠진 개고기를 그대로 실신시켜 버렸다.

그리고 다시 일어난 병수에게 시라소니의 오른손 펀치 한방이 턱에 적중되고 이어진 무릎찍기에 복부를 가격당한 병수는 신음소리도 못내고, 바닥으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눈깜짝할 사이에 두명의 사내들을 쓰러뜨린 시라소니의 눈부신 싸움실력을 본 김두한의 부하들을 더이상 싸울 기력을 잃어버리고 그대로 철수해버렸다고 한다.

   

이렇게 신의주에서 시라소니에게 된통으로 당하고 철수한 김두한의 동생들은 경성으로 돌아오자 마자, 김두한에게 이같은 사실을 알린다. 자신의 동생들이 신의주의 시라소니에게 묵사발이 될 정도로 얻어맞고 온 사실을 접한 김두한은 노발대발했다고 한다.

 

내 이런 시라소니란 촌뜨기놈을 당장 찾아가 요절을 내버려야지!’ 하면서 화가 머리끝까지 난 김두한은 곧바로 동생들을 데리고, 열차를 타고 신의주로 떠났다고 한다.

이당시 김두한은 경성(서울)을 모조리 다 장악하고 경성의 최고주먹으로 급부상해있었기 때문에, 수도 경성의 오야붕은 전국을 대표하는 오야붕의 권위를 인정받게 된다고 한다.

 

따라서 경성의 오야붕인 김두한의 동생들이 찾아오면 지방의 주먹들은 그들을 최고오야붕인 김두한에 버금가는 예로써 극진히 대접하는 게 예의라고 한다.

그런데 자신의 동생들이 만신창이가 되도록 두들겨맞고 돌아왔으니, 김두한으로서는 자신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당시는 김두한의 기세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아오르던 시절이었고 김두한에게 맞설 자는 없었던 시절이었다. 김두한은 지체없이 시라소니를 손보기 위해서, 신의주행 열차를 타고 신의주로 찾아갔다고 한다.

김두한의 몸속에는 피아노줄을 갈아서 만든 날카로운 칼한자루가 숨겨져있었다고 한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한 김두한의 호신용 칼이다.

 

그런데 김두한이 찾아간 신의주의 정팔사무실에는 시라소니는 없었으며, 신의주 그어디에도 시라소니는 없었다고 한다. 신의주에서 체포령이 내려져있는 시라소니는 김두한 동생들을 두뜰겨패고 난후, 다시 만주 봉천으로 되돌아갔던 것이다.

 

그렇지만 시라소니에 대한 복수심에 사로잡혀 있었던 김두한은 시라소니가 있다는 만주 봉천까지 찾아갔다고 한다.

그런데 봉천역에 내린 김두한일행은 그만 일본경찰의 불신검문을 당했으며, 가슴팍에 숨겨놓았던 칼이 발견되어서, 자신의 정체가 탄로난 김두한과 동생들을 일본경찰의 명령으로 다시 열차를 타고 경성으로 되돌아올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1940년대 초반 남한최고의 주먹 김두한과 북한최고의 주먹 시라소니의 역사적인 대결이 벌어질 뻔했지만, 전혀 석연찮은 이유로 인해서, 조선최고의 주먹을 가리는 두사람의 대결은 무위로 끝나버리고 말았다.

 

만일 이때 김두한과 시라소니가 실제로 만나 싸움을 벌였다면, 과연 누가 이겼을까? 이시기는 김두한도 혈기왕성한 20대 초반의 나이 때이고 시라소니도 김두한보다 2달 더 많은 20대의 나이라서 정말 볼만한 싸움이 벌어졌을 뻔했는데,

일본경찰의 불신검문 때문에, 두사람의 대결이 이뤄지지 않아서 안타까울 따름이다.

아마도 신은 최고의 주먹의 출현을 원치 않으셨나 보다!

 

그렇게 싸움이 무산되었던 김두한과 시라소니는 해방이 된 후인 1946년 초에 종로 우미관의 한술집에서 우연찮게도 다시 조우하게 되는데, 이때는 김두한이 먼저 시비를 걸어서 두사람간의 운명적인 대결이 벌어질 상황에 처했다고 한다. 

 

게시글이 너무 길어진 사정으로 인해서, 김두한과 시라소니의 대결은 다음 게시글에서 포스팅하기로 한다.

 

 

 

 

 

 

 

 

Posted by 프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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